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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야 Jul 09. 2024

나는 나는 자라서 선생님이 될거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음주운전 차에 치여 크게 다치셨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음주운전을 단속해야 하는 경찰이었다. 당시 나와 형제자매들은 아버지는 그래도 곧 나으실거다라고 생각했지만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병원에 계셨어야 했으며 평생 불편한 몸이 되셨다.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듣던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려진 시간 사이로/윤상>는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노는 아이들 소리

저녁 무렵의 교정은

아쉽게 남겨진 햇살에 물들고

(생략)

지금까지 나 해매는 까닭엔

네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 숨겨졌지

가려진 시간 사이로

<가려진 시간 사이로/윤상>     



아버지 사고 전날은 나의 소풍날이었다. 아버지가 내 가방에 과자를 한아름 담아주시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평범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가려진 시간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간혹 그 음악이 나오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밥을 먹다 갑자기 그 노래가 나오면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잠시 뛰쳐나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치기 전까지 나는 아주 평범했고 그 나이에 맞게 철이 없었으나, 사고 이후 처음으로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만큼 애어른이 되어버렸다.


 11살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모님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고 모든 과목에서 수(수우미양가로 성적표가 나오던 시절이었다.)를 맞은 나의 성적표는 아버지를 오랜 기간 간호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던 어머니는 참으로 긍정적이셨다. 아이 셋에 남편은 걷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하루는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남들이 나보고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고 그런다. 그렇다고 맨날 울고 사니? 그렇다고 아빠가 괜찮아지니? 그냥 받아들이고 웃고 살자. 그래야 힘이 나지.”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 이후로도 웃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도 당신의 변화를 받아들이시게 되었다.


막내였던 나는 5학년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서울의 병원에서 한 달씩 머무르게 되었다. 그 무렵 내가 자주 만나게 된 직업인은 의사였다. 특히 아버지의 욕창을 정성스레 치료해 주셨던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어느 날 그 주치의 선생님이 보이지 않아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어떤 환자에게 감염이 되어서 8층에 입원 중이라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가 악화되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나이에 그 소식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착한 사람은 하늘이 정말 빨리 데려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환자로 인해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런 희생정신에 더 깊은 감명을 받은 걸까. 나는 이상하게 더더욱 의사가 되고 싶었다. 나도 그렇게 착한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잘 치료해 드려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직업이 숭고하게 다가왔다.     


나는 환경적인 상황으로 급속도로 철이 들어 공부에 눈을 뜨게 되었고 평범한 나는 그 지역 과학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과학고가 학교 이름대로 과학의 길을 갈 학생들이 진학하는 곳이지만 내가 진학할 당시에는 의대를 원하는 학생들도 공부를 잘하면 무조건 들어가고 보는 식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과학고의 내신 성적이 대학 입시에 불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시 정보에 대한 많은 정보없이 고1 과정을 마치고 일반고로 전학을 갔다. 물론 그곳에서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수능을 3번이나 보고도 말이다. 기껏 삼수까지 했는데 부모님 볼 낯짝이 어디 있나. 그저 엄마의 소원대로 엄마의 꿈을 이뤄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들어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8남매 넷째로 시골에서 태어난 나의 어머니. 남자 형제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여자는 살림 밑천이 되어야 한다, 농사나 가사를 도우며 살아야한다는 할아버지 말씀에 그저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착한 딸이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열망을 숨긴 채 아버지와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았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어머니의 바람은 자연스레 자녀의 꿈에 투영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희망과 전혀 상관없이 마치 내가 쓴 것 마냥 나의 돌사진 뒷면에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 “나는 나는 자라서 선생님이 될거야.” 나는 엄마의 꿈이 적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저주로(?) 인해 나의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며 어머니를 타박했다. 사실 나의 어릴 적 꿈인 의사가 되지 못한 건 순전히 내 탓인 걸 괜히 어머니가 쓰신 돌사진 글의 저주 때문이라며 나의 운명과도 같은 교사의 길을 부정하곤 했다. 그렇지만 내가 교사가 되기로 결정하기까지 어머니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수시로 여자직업으로 교사가 최고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일종의 세뇌처럼 말이다. 그 ‘여자의 직업’으로라는 말이 괜한 거부감을 유발해서 교사라는 직업에 부정적인 감정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할 당시 IMF이후인지라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나 스스로 체념하였고  이과였던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스스로 교대에 원서를 쓰기까지 잠재적으로 어머니의 세뇌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기껏 삼수까지 했는데 부모님 볼 낯짝이 어디 있나. 엄마의 소원대로 엄마의 꿈을 이뤄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들어 교대에 원서를 냈다. 나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아닌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도 한 몫했다. ‘배워서 남주자’ 고등학교때 급훈이었는지, 선배 언니의 말이었는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배워서 남주는 것의 보람이 그 당시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었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선택한 진로가 아니였기에 대학교 시절 배운 내용은 나에게 큰 흥미를 주지는 못했다. 중간 중간 가슴 뛰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가 얕은 고민을 하긴 했지만 타성에 젖은 나는 대학교가 만들어준 길을 그저 따라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 되었고, 임용고시를 보았고, 큰 이변없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큰 사명감이나 가르치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조금은 부끄러운 출발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대게 발령은 임용고사 성적 순으로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나 9월에 많이 난다. 임용고시 성적이 중간 정도였던 나는 9월에 발령이 났다. 발령 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기간제로 집 근처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평생 근무할 줄 알았다면 발령 전 만이라도 실컷 여행을 다녀왔겠지만, 시간만 있고 돈은 없었던 청춘인지라 자연스럽게 돈도 벌고 발령 전 경험을 쌓자는 마음으로 영어 전담 기간제 근무를 시작했다. 전담실은 다른 영어 선생님 K와 함께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은 업무 관련 통화만 해도 시끄럽다며 나에게 텃새를 부렸다.


K선생은 내가 만난 최악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하필 처음 같은 교실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그분을 만나서인지 교직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교직이 싫어졌다. 내 꿈도 아니었고, 엄마의 꿈을 대신 이뤄줬기에 괜스레 엄마를 향한 원망심도 올라왔다. 나는 이런 원망심과 괴로움을 어떤 필터 하나 없이 엄마에게 전화해 ‘나 교사 못해먹겠어!’라고 울면서 말했다. 과연 내가 교직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9월 발령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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