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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n 12. 2024

내 인생 최고의 과목

수학 중간고사 점수가 공개된 후, 나는 동기생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무시를 당하니 서러움이 올라왔다. 내가 이제 매달릴 곳은 수학 교수님의 보너스 점수 밖에 없었다. 수학 교수님은 학기초에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


  "매 시간 학생들의 적극성을 체크하겠습니다.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에게는 별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거나, 나와서 문제를 푼 학생에게는 왕별을 드리겠습니다. 학기말에 출석표에 그려진 별의 개수를 합산해 가장 많은 별을 받은 학생에게는 보너스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보너스 점수를 받는 학생은 성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나는 수학시간이 되기 한참 전에 강의실에 가서 맨 앞자리에 가방을 올려두었다. 수업시간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가끔씩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시면 난 항상 손을 들고 대답하였다. 교수님께서는 그런 나를 귀여워하셨고, 내 중간고사 점수를 보며 안타까워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중간고사 이후 '왕별'에 미쳐있었다.


  수학 수업은 선택권이 없는 필수 과목이었다. 나와 동기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한 교양 수업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이 의대생들인 걸 알고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약대생인 우리는 억울했다. 우리는 메뚜기 같았고, 의대생들은 골리앗 같아보였다. 우리가 웅성웅성거리자, 교수님께서는 성적을 매길 때는 의대와 약대를 분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문제 풀어볼 사람 있어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나와서 풀어보세요."


  사실 나는 푸는 방법을 몰랐다. 그저 왕별을 받기 위해 칠판 앞으로 무작정 뛰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게 풀이법을 알려주었다. 고마웠다. 내가 중간중간에 틀리면, 그 친구가 또 교정해주었다. 뒤돌아 얼굴을 보니 의대생 중 한 명이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의대생은 천재구나'라고 나는 속엣말을 했다. 어찌 되었든 난 그 친구 덕분에 왕별을 받았다.


  수학 기말고사 전날, 나는 대학국어를 포기하고 수학공부에 올인했다. 밤새도록 연습 문제를 다 풀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중간고사의 수치를 떠올렸다. 기말고사로 동기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중도인생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해야만 했다. 나는 밤을 꼬박 새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보다 더 어려웠고, 시험범위도 넓어 헷갈리는 문제도 많았다. 그러나 전날 공부한 문제들과 비슷한 유형들이 많아서 중간고사 때보다는 더 수월했다. 공식을 알기 때문에 정답은 알겠는데, 풀이과정을 적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나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시험이 끝나자, 수능시험날 느꼈던 뿌듯함이 밀려왔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후회가 남지 않는 시험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채점 결과를 기다렸다.


  수학 기말고사 점수가 공개되는 날, 나는 불안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A4용지로 모니터를 가린 채, 학번을 입력했다. 마치 포커카드를 확인하듯 나는 종이를 옆으로 조금씩 밀면서 한글자씩 확인했다. 첫글자는 1이었다. 다행이다. 200점 만점에 100점은 넘었다. 두번째 글자는 모양이 이상했다. 5라고 생각했는데 9였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종이를 던져버렸다. 내 기말고사 점수는 198점이었다. 나는 혼자서 어퍼컷 세러모니를 하며 "예스"라고 소리쳤다.


  우리과 커뮤니티에 수학 최고점이 공개되었다. 198점이었다. 의대생 그룹에는 200점 만점자도 존재했다. 의대생과 약대생 전체를 통틀어 기말고사 점수는 내가 2등이었다. 한 친구는 나에게 '몬스터'란 댓글을 남겼다. 이후 내 별명은 '몬스터'가 되었다. 내가 몬스터라고 부르던 아이들에게 '몬스터'로 불리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몬스터 중의 몬스터가 된 것 같았다. 중간고사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중도인생'의 이미지는 기말고사로 단번에 회복되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나는 다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관건은 누가 수학에서 A+를 받느냐였다. 상대평가였기 때문에 A+는 여섯 명 정도로 정해져 있었다. A+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160점대 후반의 평균 점수가 필요했다. 안타깝지만 내 평균 점수는 163점. A0였다. 이제 내가 믿을 것은 교수님께서 약속하신 보너스 밖에 없었다. 나는 매시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열정적으로 손을 들고 대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보너스점수는 내 것일 거라고 예상했다.


  최종 성적이 공개되었다. A+이었다. 수학 교수님께서는 게시판을 통해 '보너스 수상자'를 공개하시면서 동시에 수상자의 노력을 칭찬해주셨다. 한 동기생은 댓글로  내가 수상자가 된 이유를 질문했다.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박일섭학생이 귀여워서요."


  나중에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내 노력에 비해 중간고사 성적이 안 좋아서 안타까웠다고 말씀하셨다. 내 성적까지 기억해주시는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직접 들으니 감동은 더 커졌다. '수학과로 왔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내었다고 크게 칭찬해주셨다.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신 교수님으로 인해 '생명과학을 위한 수학1'은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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