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1학기가 가장 두려웠던 이유는 <대학국어> 때문이었다. 나는 '국어'라는 단어만 보아도 몸서리를 쳤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시한 논술시험의 악몽이 떠올랐다. 논술시험에 참여한 학생의 수는 약 250명이었고, 우리반에서는 25명이었다. 논술시험은 지문을 읽고, 주어진 질문에 대한 나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시험이었다. 지문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의 글이었다. 질문은 이 철학자의 주장에 찬성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를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답안지의 빈 공간을 보자마자 머리속이 하얘졌다.
그 때부터 까만 것은 글자, 하얀 것은 종이라는 것만 구분될 뿐, 나는 그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빈 답안지를 제출할 수 없었다. 나는 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우등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논술에 대해서는 바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각사각 친구들이 답안지를 채우는 연필 소리가 쉴 새없이 들려왔다. 나는 연필을 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따라적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따라적었다.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적었다. 나는 논술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끝에서 두 번째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 평생 최악의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글쓰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1학년 1학기 처음부터 글쓰기 과목이 등장했다. 교수님께서는 4-5명씩 팀을 만들어 특정 주제에 대한 연구 소논문을 써오라고 하셨다. 나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 혼자 필사적이었다. 나의 목적은 성적이었지만, 다른 팀원들의 목적은 행복이었다. 그들은 동아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친구들을 만나고, 대학생활의 자유를 즐기거나, 쉬었다. 반면, 나는 주말에도 학교 에 나왔다. 나는 PC실에서 소논문 자료를 수집하며, 속으로 팀원들을 욕했다.
내가 지금 '대학국어' 수업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지난 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자료를 모으는 대신, 팀원들을 다 불러모아 치킨을 먹고 음료수를 마실 것이다. 팀원 한명한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주제를 물어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다. 성적을 위해서 소논문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논문을 활용할 것이다. 나는 2005년도에 그렇게 하지 못한 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대학국어'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원의 길은 존재했다. 대학국어 책 뒤에 있는 한자들을 다 외우기만 하면 A+를 받을 수 있었다. 7막7장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홍정욱씨가 48시간동안 복잡한 131행의 시를 다 외워 영어에서 A를 받아냈다. 나도 A를 받기 위해 한자를 외우기 시작했다.
등교 시간, 쉬는 시간, 주말에 계속 외웠지만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다. 한번은 단 1분도 안 자고 밤새도록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항상 100점 만점에 60점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나는 소논문 작성에도 실패하게 된다. 나의 최종 작품은 자격 미달이었고, 발표 또한 형편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팀원들을 원망했다. 교수님께서 팀장들에게 팀원들의 기여도를 적으라고 하셨을 때, 나는 사실대로 적고 싶었다. 하지만 동기들에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모두에게 동일한 점수를 주었다.
대학국어의 성적은 B0가 나왔다. 대학교에서 받은 다섯 개의 B 중 첫번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B를 보며 감사했다. C가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대학국어에 대한 공포가 생긴 나는 감히 재수강은 꿈도 꾸지 않았다. 국어 대신 나는 수학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수학은 수능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였다. 분명히 대학교에서 듣는 유일한 수학 과목인 '생명과학을 위한 수학'도 내게 기억에 남는 친구가 되어 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수학과 친해지기 위해 매일 책을 들고 중앙도서관을 향했다.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중앙도서관으로 갔다. 중앙도서관에서 나는 주로 수학책을 붙들고 씨름했다. 분명히 고등학교 수준이었지만 나는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수업이 없는 금요일에는 밤을 샌 적도 많았다. 한 번은 약대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갇힌 적도 있었다. 그 때 난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엎드려 잠을 청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깜짝 놀라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셨다. 나는 그분에게 새벽에 문을 여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고, 그분은 친절하게 문 옆에 버튼을 누르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약대 동기생들은 매일 중앙도서관에 앉아 있는 나에게 '중도인생'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이름 대신 '중도인생'이라고 불렸다. 동기생들 중에는 나처럼 중도인생이 되고 싶어하는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 그 여학생은 한동안 나와 함께 공부하곤 했는데, 동기생들은 모두 그녀와 내가 사귀는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금요일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영화 보러 갈래요?"
"아니, 난 그럴 시간이 없어. 난 공부해야 해."
그날 이후 그녀는 내게 더이상 데이트를 신청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 때문에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동기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와 그녀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못박아두었다.
수학 중간고사날이 되었다. 나는 수면부족으로 만성피로에 시달렸다. 커피를 많이 마셔 항상 각성상태였지만, 두뇌는 회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춘 것만 같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부했건만 난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200점 만점에 128점을 맞았다. 100점으로 환산하면 64점이었다. 밤새도록 공부한 대가 치고는 가혹했다.
수학 점수는 학번만 입력하면 누구나 점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적에 민감한 누군가가 전체 평균을 내어 알려주었다. 평균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145점 이상이었던 것 같다. 동기들은 180점이 넘는 고득점자의 이름을 열거하며 찬양했다. 주로 과학고 출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점수를 언급했다. 동기생들은 내 점수를 보며 실망한 것 같았다. 나는 공개적으로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대학생활 중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