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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Aug 21. 2022

수천 개의 마음

너는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작은 독서실에서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아주 못생기고 아주 웃긴 애였다. 왜인지 모르게 대화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너에게 오늘 내 발 냄새가 심하다며, 어서 맡아보라며 너에게 발을 들이밀었고 너는 또 왜인지 저리 꺼져, 하며 웃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너는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애였다. 갑작스레 남녀 분반에서 합반으로 바뀌게 된 학교 정책에 분노했던 너는 3학년만이라도 여자반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바꿨다. 반 배정에 사용되는 사회탐구 과목들을 문과 반 아이들이 어떻게 선택했는지 일일이 조사하고 분석하여 여자반을 만들어 낼 조합을 발견했으며 그대로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선택과목을 바꾸도록 종용했다. 문과 주임 선생님은 막대기로 이 미친년, 이 미친년, 하면서 너의 머리를 때렸다. 결국 3학년 13개 반 중 덩그러니 여자 반 하나가 만들어졌고 너는 그 속에서 편안하고 의기양양하게 공부하여 K대에 입성했다.


너와 함께할 때면 너처럼 나도 멋져지는 것 같았고, 이상하지만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이과 반의 남자아이들 그룹과 친해졌고 그들과의 이슈가 얼마나 재미있었던 건지 나와 하교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가장 좋아하는데 너도 나를 가장 좋아해야지! 너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나에게 질려버린 너는 그만 좀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집어던지고 반으로 되돌아갔다.


너는 여행을 좋아했고, 나는 여행을 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너는 어학연수를 떠났고 한국과 미국에서 모은 돈으로 남미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쿠바인가  도시에서 14 많은 학교 선배를 만나 그를 새로운 남자 친구로 삼기도 했다. 내가 연이은 취업 실패로 울상을 짓고 너는 졸업 전에 입사를 했을 때에도, 너의 화병을  뻔한 면접 썰을 들으며 그저 웃을  있었다.


내가 계속 공기업 필기시험의 문턱을 넘지 못해 헉헉대고 있을 그때에는 네가 전문직을 갖고 싶다며 퇴사를 했다. 불안한 시기를 거쳐 모 로스쿨에 진학을 하고 또 살이 확 빠지기까지 공부를 하는 너를 보면서, 나는 참 너를 동경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날 난 수면제를 먹고 제정신이 아닌 마음으로 그런 부러움과 사랑과 자격지심을 고백하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너는 이게 뭐냐며 깜짝 놀랐고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나는 모두 진심이라는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약 기운 때문이야,라고 웃어넘겼고 네가 웃어 넘겨주길 바랐다.


어느 시점을 지나 보내면 혹은 사회적 지위에 변동이 있으면 한 동안 친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는 참 이상하게도 나에게 계속 연락을 주고, 생일마다 기프티콘을 보내준다. 갈림길을 지나왔는데도 끝과 끝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바뀌는 와중에도, 어른들은 그저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는 와중에도 나는 기도했다. 너와 계속해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너의 이상함 곁에서 특별하고 소중해지는 경험을 계속해나가길 바란다고. 너를 향한 수천 개의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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