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박 이야기
올해 수촌리는 호박 농사가 풍년이었다. 여름 내내 넝쿨만 웅성하던 마을 여기저기의 텃밭 귀퉁이에는 가을이 되자 언제 자랐는지도 모르게 훅 자라나 똬리를 트고 잠든 장군이만큼이나 커버린 호박들이 하나 두 개씩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호박이 얼기 전에 모두 부지런히 호박을 따서 부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묵직한 두 팔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텃밭에 호박이 3개나 자랐다. 하나는 성격이 급했는지 텃밭에서 자기 혼자 빨리 자라 노랗게 늙은 호박이 되었다. 우선 파릇파릇한 젊은 호박들은 반으로 쩍 갈라 씨를 다 긁어냈다. 긁어낸 씨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바짝 말려두었다. 바짝 마른 호박씨는 팬에 들들 볶아 먹으면 고소하니 입이 심심할 때 간식으로 참 좋다.
씨를 다 긁어낸 호박 살은 찌개용으로, 부침용으로, 반찬용으로 채 썰고, 깍둑 썰고, 편 썰어서 한 번씩 먹을 만큼 소분해서 얼려두었다. 냉동실 가득한 호박을 보니 냉장고에 음식 쌓아두기를 제일 싫어하는 엄마 덕에 겨울 내내 호박만 먹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걱정은 뒤로하고 이미 달달하게 맛이 올랐을 늙은 호박은 바로 그날 밥상에 오를 호박죽으로 당첨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을 갈라보니 집안 가득 달콤한 호박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도 이미 맛있는 호박죽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박을 듬성듬성 자르고 물을 부어 큰 곰솥에 푹 삶았다. 호박이 잘 물러지면 믹서기로 곱게 갈아준 후 풀 쑤듯이 질게 쑨 찹쌀밥을 넣고 중불에서 뭉근하게 계속 끓여준 후 원하는 만큼 소금과 설탕을 넣어주면 완성. 레시피랄 것도 없이, 늘 모든 수촌리 우리 집 요리가 그렇듯 계량 없이 막 넣고 푹푹 끓인 호박죽은 참 향긋하고 달달하니 맛있었다. 집에 있는 온갖 통이란 통은 다 꺼내 곰솥 가득 끓인 호박죽을 나눠 담고 잘 식혀서 우리 먹을 것 몇 개만 남기고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호박을 다 처리하고 한 해 농사도 이렇게 끝났구나 하고 있을 때 윗 집 할머니께서 찾아오셨다. 할머니의 손에는 낮에 드린 호박죽 통이 들려있었다. 일회용기라 안 돌려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굳이 굳이 그 불편하신 몸으로 우리 집까지 오신 것은 필히 그 빈 통 안에 그 어떤 무언가를 채워오셨기 때문이었음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반투명한 통 속으로 까만 무언가 들이 가득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귀한 검은콩이었다. 할머니가 봄에 씨 뿌리고, 여름 내내 물을 주고, 수확해서 껍질을 까 한 알 한 알 모은 귀한 할머니 텃밭의 콩들이었다. 너무 많아서 만든 호박죽을 드리고 받기에는 너무 귀한 알맹이들이었다. "할머니 집집마다 다 넘쳐나는 호박 그거 너무 많아가지고 쑨 호박죽 좀 드리고 받기에는 너무 귀한 콩이다..! 안 주셔도 돼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이 콩도 집집마다 다 있는 거여"하시더니 "아주 간만에 너무 맛있게 먹었어. 고마우면 한 번 더 쒀주던가" 하시고는 정말 쿨하게 뒤돌아 가셨다.
호박죽과 검은콩이 오고 가는 풍경. 그 풍경이 아직은 수촌리에는 여전히 있다. 그리고 그 풍경 안에 내가 있었다. 흔히들 말하지만 흔히들 보기 어려운 '정'이라는 것이 있는 풍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참 큰 복이다. 봄에 심은 호박이 무럭 무럭 자라 텃밭 온 곳에 넝쿨을 퍼트렸던 것처럼, 올해 우리집 호박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넝쿨째 큰 복과 이야깃거리를 내게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