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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짓는애 Jan 06. 2022

짓는애의 수촌리 이야기

#1_내 안의 마시멜로는 1년 365일이 제철

시골에 살다보면 계절의 변화를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들판의 색부터 그 들판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것들, 그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밤두꺼비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겨울이 왔음을 말해주는 지금이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오감으로 느낄 때면 수촌리의 벼가 자라던 넓은 논에는 제철맞은 마시멜로가 동글동글 귀엽게 무르익는다.


이 마시멜로는 사실 <곤포 사일리지>라는 것인데. 가을에 벼를 추수하고 난 후 남은 볏집에 미생물 등을 첨가하고 둥글게 압축해 비닐로 감싸 저장해 둔 것이다. 이렇게 만든 곤포 사일리지는 소를 기르는 축사에 팔려 건초와 함께 소의 먹이가 된다.


갑자기 나무위키마냥 마시멜로의 정체를 밝히며 여러분의 상상력에 급제동을 걸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 글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저 친구는 <곤포 사일리지>라는 외화 드라마 제목같은 본명보다 <논두렁 마시멜로>라는 가명으로 앞으로도 머릿 속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수촌리에 처음 이사왔을 때, 나 역시도 이 마시멜로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저 시골살이의 클리셰 같은 물체를 가까이서 본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엄마 마시멜로다 마시멜로. 나 이거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 봐.'

'마시멜로? 뭐가? 이거? 이 볏짚?'

'이게 볏짚이야?'

'응 이거 볏짚이잖아. 소 여물 줄려고 만든거.'

'아 진짜? 근데 멀리서 보면 정말 마시멜로 같지?'

'엄마는 휴지 같다 야.'


누군가에겐 휴지, 누군가에겐 마시멜로. 실제로는 곤포 사일리지.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라던 동요 <내동생>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때 문득 '어? 그러고보니 내 상상력 다 어디갔지.' '나는 왜 이걸 보고 마시멜로밖에 생각을 못했지?' '이제 보니 이빨 같기도 하고... 자일리톨, 모서리만 다 빨아먹은 박하사탕 같기도 하잖아?' 그렇게 갑자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생각했다.

어릴 땐 참 쓸 데 없는 상상들과 다양하고 말도 안되는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잘 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상상이라는 단어에 '력'이 달라붙어 상상력이라는 말로 평가의 기준이 되었고, 시험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그것들은 비유법이라는 개념이 되어 은유니 직유니 분류되며 내가 만들어 내야 할 것이 아닌 분석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 당시 나는 취준생이었고, 모든 취준생들이 그랬던 것 처럼 지원과 불합격을 반복하며 얻은 쓸쓸한 마음을 논길을 걸으며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해설지도 없는 주제에 이력서는 늘 정답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고 매번 반복되는 실패에 나는 점점 나의 생각보다는 남들이 좋아할만한 생각을 하는 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고 있던, 아니 사라져 가고있던 내 안의 상상의 나래들과 표현에 대한 용기를 문득 마시멜로 앞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요즘에도 일을 하다보면 다시 나는 정답에만 몰두하고 분석하며 곤포 사일리지를 곤포 사일리지로만, 끽해야 마시멜로까지로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마다 겨울 들판에 무르익은 마시멜로는 정답인 곤포 사일리지보다 더 정답같고 머리에 남는 마시멜로의 가치를 내게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또 시들어가던 내 안의 여러 마시멜로를 늘 제철인 마냥 동글 동글하게 무르익게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한다.


수촌리에 살면서 나는 먹음으로써, 봄으로써, 들음으로써 그러니까 결국 하루 하루를 ‘삶’으로써 많은 것을 배운다. 온 몸으로 느끼는 계절감부터 지금 내가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까지. 그래서 이 글은 옆으로 샌 것 같지만 절대 샌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며...(!) 우연히 트위터에서 보았던 논 위의 마시멜로를 본 어떤 아이가 외쳤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엄마 저기 저거 봐! 말랑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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