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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작가 May 01. 2024

이직

그리고 이로

86년생, 나도 이제 30대 후반을 향해 가고 있다.


20살 즈음이었나, 서울에 있는 외국어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어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바엔 아예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었다. 어디로 갈까,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일본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었고 뒤돌아보니 역시나 좋은 선택이었다. 나는 한 학기만에 대학을 자퇴하고 일본으로의 유학을 준비했다. 모국어인 한국어와 가장 비슷한 말이기에 꽤 괜찮은 수준으로 배우기에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훗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래도 꽤 자랑스럽게 얘기할 만한 오사카의 모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기자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으나 외국인 신분으로 오랜 고용을 보장받기란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이 나라 저 나라의 작은 매체에서 이런저런 기자로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줄곧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웬걸,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본어 가능자를 경력직으로 구한다는 공고가 떴다. 나는 일본어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자생활을 해왔으니 그 자리에 나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오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기록을 남기게 된, 남기게 될 일들이 벌어질 이 새로운 직장으로 말이다.






첫 출근 날은 쌀쌀한 가을날씨였고 해는 없이 먹구름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처음 보는 사무실 풍경이었지만 그 어느 때와도 다름이 없어 보였다. 조용하고도 분주함이 감도는, 그래, 딱 9시였다.


전혀 티는 나지 않는 듯하였으나,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신입 걔, 오늘 아무 말도 없이 출근을 안 했다네”


9시 40분쯤이 되었을 까, 여기저기서 귓속말을 해대던 그 신입직원은 어제 죽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릴 뿐이었다. 별로, 아니 조금도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어쩐지 요새 말이 더 없어지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어. “


“아-씨, 안 그래도 일손 부족한데, 이번엔 신입 말고 경력으로 뽑아주시려나?”


“새로 1명 더 와야지 당연히, 근데 저년 자리는 그래서 누가 치우냐?”


내가 기자생활 짬밥만 십 수년 째니, 이 정도 사건사고와 분위기 파악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속으로 되뇌었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잘근잘근 꺼내놓는 그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아무래도 막내 짬밥인 내가 치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직원들이 어디를 쳐다보는지 곁눈질로 열심히 파악해 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빈자리는 내 대각선 뒤 밖에 없었다. 걱정과는 달리 그 자리는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으며 사용하던 노트북과 키보드, 필기구 정도가 다였다. 마치 본인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걸까. 깨끗해도 너무 깨끗한 게 오히려 더 문제가 될 것만 같았다.


입사 첫날 늘 전통적으로 치르듯, 팀원들과 환영점심을 함께 한 뒤, 모두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그 틈에 나는 몰래 그 자리 가까이로 한번 가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웬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아깐 분명 깨끗했던 자리 위에 왠 수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기자시절의 빌어먹을 습관, 나는 그 수첩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그 수첩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의심을 먼저 했어야 했다.


0318… 비밀번호일까?


아직 채 버려지지 않은 그 이름 모를 그 신입사원이 쓰던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수첩에 적힌 비밀번호를 누르자 이내 화면이 열렸다. 절전상태에서 화면만 잠겨있었던 것 같았다. 그 신입사원이 매일 기록한 업무일지가 빼곡히 담긴 엑셀파일들, 그리고 여기저기 남기고 간 회사생활의 흔적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 메모창이 하나 열려있었다.


젠장, 역시 열어보지도 읽어보지도 말았어야 했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말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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