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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Apr 02. 2023

내거인듯 내거아닌 내거같은 너

결혼생활 에세이

지은과 나는 동갑내기 커플이다. 우리는 러닝 크루에서 서로를 알게되었다. 먼저 끌림을 느꼈던 건 나였다. 지은을 처음 만났던 그 황홀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7년 3월 벚꽃이 만개했을 무렵. 러닝 크루 친구들과 함께 구로구청 10k 마라톤에 출전한 날. 집결지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데상트 흰색 썬캡 모자를 쓴 뽀얀 얼굴을 가진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흡사 한지민? 아이유? 그녀는 청순미를 내뿜으며 내 시야를 독점하고 있었고, (이 글을 아내도 볼 수 있으니..) 작은 거짓말을 보태자면 그녀의 등 뒤에 비치는 후광을 보기도 했다.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첫 눈에 반했다’가 딱 맞았다. 그 뒤로 나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긴 레이스를 시작했다. 우선 나와 가깝게 지내는 회장 친구에게 “나 지은에게 관심있어” 슬쩍 의견을 표했고, 그는 기꺼이 나의 큐피트가 되주었다. “지은이 엠티에 참석한대”, “풀마라톤을 준비 중이라더라” 고급 정보를 들은 나는 지은의 눈에 최대한 많이 노출되려 노력했다. 첫 시작은 엠티. 친해질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지만 내성적인 나는 말 한번도 제대로 못 붙이고 이름 석 글자 알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회장 친구의 주도로 기획된 몇 번의 소규모 모임 달리기 (판을 제대로 깔아줬다). 그 중에서 탄천을 뛰었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함께 땀을 흘리며, 15키로를 뛰었다. 지은이 힘들어 할 때마다 나는 옆에서 허리를 밀어주고 물을 건네주며 독려했다. 역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우리가 갖고 있던 심리적 거리는 그 날 이후부터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더 만남의 빈도를 늘여갔다. 단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김해 뒷고기를 안주로 맥주를 마셨다. ‘지은 나한테 관심 있는게 분명해’. 무슨 자신감과 착각에 빠져있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리 지은은 내 손을 뿌리쳤다. 30년 동안 쌓아왔던 연애 데이터베이스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은은 말했다. “넌 아무 여자랑 손 잡니?” 우리 사이는 더 가까워지기에는 아직이야라 표현하는 그녀의 완고한 제스쳐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부터 나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 감정소모가 많아서 지쳐있어. 당분간 풀마라톤 완주에 집중하고싶어”라는 의사를 표현해 온 상황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내가 손을 덥썩 잡았으니 지은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지은에게 풀마라톤을 뛸 때까지 가까운 친구로 남으며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나는 6개월 넘게 지은의 꽁무니를 쫓아다녔고, 지은의 풀마라톤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함께 42.195km를 완주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결혼 4년 차의 신혼부부가 되어있다.


결혼 초 2년 동안 우리는 뭐든 함께 하고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말이면 함께 등산과 캠핑을 즐기고, 짬을내어 LA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연필과 지우개 처럼 부부가 세트로 다녀야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평일에는 일하느라 동료 직원들과 부대끼고, 주말에는 아내와 껌같이 달라붙어 열심히 놀다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극 I 성향’인 내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점점 외부활동을 통해 밖에서만 에너지를 얻으려는 ‘극 E 성향’인 ‘지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불만을 터트렸다.


“나 여보 따라다니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 일도 힘든데 좀 쉬어가고 싶어”, “나는 여보가 하고 싶은 거 다 따라다녀 주고 있는데, 여보는 왜 내가 하고 싶은 거(카페에서 함께 책을 읽는 것) 하지 않아?” 지은은 갑작스러운 나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몹시 당황했다. 결혼 전에는 본인과 시간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내가 어느 날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서 볼멘소리를 내고 있으니 ‘이제 잡은 물고기 밥은 주지 않겠다는 건가?’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병무가 결혼 전에 E 성향인 줄 알았어. 바깥 활동을 좋아한다고 나에게 말했었고, 나는 그런 병무와 좋은 시간을 최대한 많이 보내기 위해 노력한거야”, “그리고 카페에서 책 읽는 거 나도 여러 번 했잖아. 사실 카페는 나에게 대화의 공간인데, 여보랑 가면 대화 없이 책만 읽다 오니 나는 그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졌어”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우리는 I와 E가 서로가 함께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장의 MBTI 짤로 지은이 나의 성향을 먼저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지 속 ENFP인 지은은 사람들 사이에 섞어 점프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INFJ 인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벽지에 달라 붙어 잔뜩 웅크린 자세로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지은은 이 이미지를 보고 실소 지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병무를 그동안 본인이 너무 끌고 다녔구나 하며 반성했다고 한다. 나의 성향을 완전히 파악한 뒤로 지은은 나의 시간을 온전히 존중해 주었다. 지은은 등산 동호회에 가입하여 심야 슬리핑 버스를 타고 동호회 회원들과 한라산, 태백산, 무등산 등을 돌아다니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지은이 집을 떠나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자유 남편이 되어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 스포츠 다큐를 시청하며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MBTI 공감짤 (출처: 짤군)


이렇게 지금 우리는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과 각자가 따로보내는 시간을 존중하며 온전히 상대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전히 돌봄의 비중과 집안일에 대한 기여도에서 아주 가끔 입장 차를 서로 보이고 있지만, 전보다 다투는 횟수가 줄어들고 집 안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어제는 폴리아모리 관계 홍승은 작가의 ‘두명의 애인과 삽니다’ 책에서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이 있어 책을 크게 접고 밑줄을 그었다. “그나마 지난 연애와 지금이 다른 점이라면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게 된 태도 정도라고 했다. 넌 내거니까 당연하잖아?가 아닌, 넌 내 옆에 있지만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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