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친놈이었다.
토끼와 나는 러닝 크루에서 서로를 처음 알게 되었다. 데상트 흰색 썬캡 모자를 쓰고 깡총깡총 한강을 뛰는 모습에 첫 눈에 반한 나는 반년 넘게 토끼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끼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특정 동네를 방문할 때면 저장해왔던 맛집 리스트와 함께 막차 시간을 공유했다. 또 내가 밤샘 근무를 마친 어느 날에는 풀마라톤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42.195km를 완주했다. 나의 노력은 결실이 되어 토끼와 약 1년 간 연애를 했다. 그리고 2019년 3월 16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2023년 올해로 결혼 4년 째를 맞는다.
내가 토끼와 결혼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토끼는 내가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였다. 결혼 전의 마음으로 언제나 변함없이 토끼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고, 응암동의 최수종이 되기만을 꿈꾸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최수종 형님처럼 살아가기 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토끼를생각하고 배려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나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지난 날의 경험을 되돌아 보면 후회로 남은 기억들이 많다.
2020년 코로나 여파로 국내외 비즈니스가 얼어붙었을 당시, 회사의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실직한 상황이었다. 실업급여처럼 국가에서 받는 지원금이 있었지만, 수익 되는 활동이 끊기다 보니 자신감과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부호를 던지며 매일을 걱정의 바다 속에서 헤엄쳤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다 보니, 좋지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토끼를 향했다. 잘 써지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한달 간이나 부여 잡으며,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티를 팍팍냈다.
같은 해 4월 25일 토끼의 생일도 그랬다. 1년 중 누구라도 가장 돌봄 받고 싶은 하루였는데.. 그 날도 나는 토끼에게 생색을 냈다. 토끼가 출근했을 때, 나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늦잠을 잤고, 아무 생각없이 쇼파에 벌렁 드러누워 뒹굴었다. 폰 게임도 해보고, 게임이 질릴 때면 멍 때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느 새 오후 5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자기 반성의 시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쇼파에 누인 몸을 벌떡 세워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 포트폴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빨리 작업을 마무리해서 입사 지원을 해야 하는데, 나는 언제쯤 이걸 마무리할 수 있을까?’ ‘회사 다닐 때의 마감은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잘 지켰었는데, 왜 나를 위한 마감은 이렇게 더딘 걸까?’ 그렇게 자기 미래에 대한 똥 걱정 만을 머리 속으로 채운 채, 토끼의 생일 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고, 혼자서 예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밤 7시, 업무를 마친 토끼가 ‘삐삑삐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다. 토끼에게 수고했다 말을 건내고느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거북이l 여보 나 들어가고 싶은 회사가 있는데, 포트폴리오 잘 써서 지원하면 좋을 것 같거든
거북이l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에서 맛있는 거 시켜 먹을까?, 떡볶이 어때??
토끼l …… 그래, 알겠어
짧은 대화를 마친 후, 토끼에게 떡볶이 배달주문을 부탁했다. 그러곤 당연히 토끼가 내 상황을 이해해주겠지 생각하며 공부방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떡볶이가 도착했다. 도둑이 제발 저리는 마음으로 비닐 포장을 뜯으며 토끼의 표정을 살폈는데… 역시나 좋지 않았다. 토끼의 기분을 애써 외면한 채 떡 하나를 집고 입 안으로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떡 하나가 채 목구멍을 다 넘어가기 전, 토끼는 설움을 토했다.
토끼l 나 오늘 생일인데 스테이크라도 구워 먹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뭐야?
토끼l 집 청소 하나도 안돼 있고, 자기가 먹은 설거지도 안 했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거북이l 여보 말을 왜 그렇게 해? 나 지금 놀고 있었던 거 아니잖아?
최애 음식인 떡볶이를 앞에 두고 우리는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의견을 굽히지 않는 감정싸움. 그날 나는 순간의 감정 그리고 욱함 때문에 토끼의 가슴 속에 또 다른 깊은 상처를 냈다. 조금만 더 토끼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싸움이었다. 토끼는 당시 어떤 심정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토끼와 그 때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봤다.
거북이l 이전에 여보 생일 때 떡볶이 먹자고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어?
거북이l 좋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래도 한 번 떠올려볼까? 글감이 필요해요!
토끼l 여보… 그 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내가 뭐라고 했었잖아… 근데 뭐 이건 적반하장인지 지가 같이 승질 내는 거야.. 난 이 정도 대접받고 사는 여자구나 이번 생 똥 밟았다 생각했지
토끼l그리고 그 날 주황색 축구 티에 줄무늬 반바지 입고 있었는데… 아 못 본 눈 할래.
뜬금 없이 봉변을 당했던 사람. 토끼는 역시 나보다 그 때의 기억을 잘 떠올리고 있었다. 한 맺힌 듯 그 날의 기억을 토해내는 토끼가 귀엽고 웃겨 그녀의 앞에서 버릇없이 잠시 실소했지만, 이내 아내를 신경 써 배려하고 돌보지 않았음에 후회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앞섰다. ‘나 정말 미친놈이었구나..’
우리는 결혼 초기 2년 동안 이런 다툼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다툼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배웠다. 현재의 우리는 이제 각자의 감정을 예측하고 갈등을 부드럽게 풀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대화를 많이 한다. ‘서로가 가진 걱정거리는 무엇인가?’, ‘돌봄에 대한 비중은 어떤가?’, ‘데이트는 자주 하고 있나?’ 이런 대화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태와 감정에 대한 변화를 읽는다. 변화를 알게 되면, 서로의 행동과 생각을 바꾸려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