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얘기] 즉흥적인 P에게 필요한 '불완전한 계획표'

by 타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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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곧잘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부단히.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무언가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극도의 즉흥적인 P로 대표되는, 이른바 나 같은 인간들이다.


매번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혹은 뒤죽박죽) 쌓아놓은 다음, 데드라인을 코앞에 남겨놓고 그제야 울면서 손을 댄다. 그렇게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얼마간 어찌저찌 해내고 나면, '역시 나야' 하며 뿌듯해하는 답도 없는 인간들. 그런 즉흥적인 존재들이 이 세상에는 꽤 많다.


벼락치기가 효율이 좋다느니, 일은 몰아서 하는 게 합리적이라느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일을 단시간에 처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는 잔머리만 데굴데굴 굴려서는 해내지 못할 일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대체로 짧지 않은 시간과 꾸준한 근면을 철저히 요구한다.


예를 들면,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영어회화 공부 같은 것들이 그렇다. 효율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순 있겠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벼락치기만큼은 통하지 않는 영역이다. 큼지막한 대문자 P들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아주 촘촘한 시간과 근면으로 짜인 그물망인 셈이다.


하지만 즉흥적인 P들도 살아가다 보면 별수 없이 주기적으로,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들과 마주치게 된다. 아마 잔머리 대가인 'P'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생존비결 노하우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터다.


나의 경우에는 꾸준히 해야 하는 일들을 '루틴'으로 만들어 상당 부분 의존하는 편이다. 다만, 계획적인 J와 달리, '완전한 루틴'이 아니라 매우 '불완전한 루틴'이라는 것이 큰 차이라면 차이다. 내가 굳이 '불완전한 루틴'으로 이름 붙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획적인 유형이라면, '출근 전 헬스장 1시간', '잠들기 전 전화영어 30분' 같은 자신만의 룰을 정한 다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실행까지 거뜬히 해낼 터다.


그러나 즉흥적인 P들은 자기가 정한 아주 쉬운 일, 심지어 하루에 영어 단어 딱 1개만 외우기 같은 일조차, 매일같이 하려 들면 머리부터 지끈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은 어떻게든 버티더라도, 이후 여러 차례 빼먹다 보면, 어느새 '루틴'이나 '계획표'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부끄러운 넝마 조각만 남게 된다.


반면, '불완전한 루틴'은 부분적인 달성 여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웨이트트레이닝을 1주일에 4일 하기로 결심했다면, 분명 1~2일 밖에 달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완전한 루틴이라면 굉장히 미흡한 결과일 것이다. 기껏 고심해서 세운 계획이 또 실패했다며 위축될 수도 있을 일이다.


하지만 불완전 루틴에서는 이러한 점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운동을 나가지 않은 2~3일보다, 운동을 나간 1~2일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1주에 1~2일은 1달에 4~8일, 1년이면 100일 가까이 되는, 생각보다 적지 않는 기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가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흥적인 P들은 대개 자신의 역량을 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벼락치기를 하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과업을 처리해 본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하루 만에 이만큼이나 했는데 일주일이면 정말 장난 아니겠군, 하는 식이다. 실은 그 일을 일주일 내내 할 능력이 없으면서 말이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실제 존재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머릿속의 나는 운동을 주 4일 가고 싶지만, 현실의 나는 1~2일 밖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매주 1~2일씩이라도 꾸준히 나가고 있다면 나름의 최선을 다했으니 오히려 스스로를 칭찬할 일이다.


이렇게 계획 달성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주 1~2일씩 지속하게 되면 꽤 거대한 시간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즉흥적인 P들 중에는 자신이 뭔가를 꾸준히 하지 못하는 이유가 '완벽주의 성향'을 방패 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수준만큼 해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건 진정한 의미의 완벽주의가 아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부담감부터 느끼는 겁쟁이에 가까운 것이다.


'진짜'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보다 완벽히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밀어 넣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단 1%의 미완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상당한 에너지를 할애할 수 있는 무모한 사람들인 셈이다. 완벽주의자로 당장 떠오르는 인물로는 GD가 있는데, 그는 음반 작업이나 공연 준비를 할 때 스쳐가는 느낌 하나, 무대 위 작은 조명 하나까지도 무척 신경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앞서 언급한 '불완전한 루틴'은 즉흥적인 P에게, 시작에 대한 부담감을 대폭 줄여준다는 면에서 큰 효과가 있다. 즉흥적인 P들은 뭔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전에 실패했던 계획들이 떠올라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끼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흘러간 계획들도 자세히 뜯어보면 100%의 실패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기준을 지나치게 높이 잡은 나머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계획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즉흥적인 P들도, 실제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수준을 잘 찾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씩 해내다 보면 꾸준함마저 강력한 무기로 삼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계획적인 J의 근면성실과 다소 모양이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니까.


세상의 많은 P들이 저마다 타고난 기지에 꾸준함까지 더한다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아닐까 싶다.


※ 본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