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감상평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by HaNdNoTe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4막이 공개되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니 끝까지 멈출 수 없었고, 완결까지 그대로 정주행했다.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영화 국제시장'과 '애플TV의 파친코'였다. 국제시장에서 느꼈던 한국적인 정서와 파친코가 보여준 3대를 아우르는 서사, 시대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점이 그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제주도라는 배경과 정서, 요즘 드라마다운 세련된 연출이 잘 버무려져 있고, 좀 더 가족 중심의 서사가 위 작품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SE-474efaf5-fa76-470d-b227-d9490de1ab3a.jpg?type=w966

'폭싹 속았수다'는 우리네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담아 보편적인 정서를 섬세하게 건드린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려오는 '서울대 간 누구네 집 딸', '대기업에 입사한 누구네 아들'과 같은 성공담과도 닮아 있다. 나와 내 가족의 삶 같으면서도 사실은 몇 다리 건너야 닿을 법한 잘 된 집안의 서사인 것이다.

SE-ad7968b0-0e06-4fe4-87fd-fd972e14ed2c.jpg?type=w966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오애순과 양관식 캐릭터'다. 양관식 같은 인물은 현실에서 100명 중 1명 있을까 말까 한 느낌이고, 오애순조차 50명 중 1명꼴로 볼 수 있나? 싶은 그런 캐릭터다. 솔직히 말해, 박보검과 박해준이 연기한 양관식 같은 캐릭터는 '현실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이상적이고 희귀한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인가? 오히려 우리 주변의 이야기와 닮아 있는 건 부상길네 집, 영범(금명의 남자친구)네 집, 애순의 삼촌들, 미숙이 같은 주변 인물들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애순과 양관식이 주인공인 것일까? 익숙하고 슬프고 공감도 가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몰입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의 서사는 제법 정교하다. 자잘한 떡밥 회수가 뛰어나서, 잠깐 등장했던 단역이나 대사, 사건들이 어떻게든 뒤에 다시 등장해 의미를 갖는다. 연출과 편집 방식이 무심한 듯 지나가면서도 어느 순간 소소한 감동을 주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물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장면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다.

SE-06c0ce7b-78b9-4753-864f-80a002291070.jpg?type=w966
SE-e05c928e-5c3d-47e6-af21-7f26414ce231.jpg?type=w966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아이유의 1인 2역 연기는 칭찬받을 만하다. 사실 초반에는 아이유의 연기와 분량 때문에 문소리의 존재감이 묻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문소리 배우의 연기와 캐릭터의 무게감이 빛을 발했다. 반면, 박보검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다. 박해준이 연기한 중년 양관식의 임팩트가 컸고, 아버지 양관식으로서의 박보검 분량도 다소 모자랐다고 느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4막 마지막,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가 1인 2역으로 등장할 때다.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드라마 속에서는 크게 비중 있는 장면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엄마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이런 예상치 못한 공격(?)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광례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오애순 같은 삶을 나는 살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우울해졌다.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봐야 하는데, 너무 몰입한 게 문제다.

SE-d8079887-c4c2-4708-9dcf-f0efd980840a.jpg?type=w966

이 작품은 여성 서사가 두드러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혁신적인 캐릭터는 양관식이었다. 그는 가부장제를 부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답답할 만큼 우직하게 헌신하는 인물이다. 이 캐릭터 없이는 이 드라마 성립 자체가 어려울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폭싹 속았수다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IMF를 제외하면 국가적 맥락을 깊게 다루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한 인서트 장면으로 활용만 할 뿐 굵직한 현대사는 대부분 비켜가고 가족과 직접 연관된 IMF 정도만 비중 있게 다룬다. 금명의 일본 유학 설정 역시 시대적 흐름 속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필수적인 요소였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음악이다. 드라마가 전하는 감정선이 보편적인 만큼, 음악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감정의 깊이가 한층 깊어졌을 것 같다. 물론, 제작진이 감정 과잉(신파)을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극적인 장면에서 감정선이 뭔가 충분하지 못한 기분이 전편에 걸쳐 들었고, 이미 연기와 영상은 너무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리지널 스코어 음악에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 또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가 전하는 이야기도 결국 그 의미와 맞닿아 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가 아닐까.

SE-efb0b364-3656-4176-90c9-760a135fbdc7.jpg?type=w966



keyword
작가의 이전글'폭싹속았수다' 속 빈티지 카메라 Petri 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