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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속에서 만난 제주 윗세오름

흐린 하늘 아래 시작된 여정, 하얀 눈이 덮인 윗세오름

by HaNdNoTe

2025년 3월 13일, 제주도 여행의 주목적인 윗세오름 등반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외진 곳에 위치한 숙소에서 제주도립미술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불렀고, 5분 뒤 도착한 택시 안에서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를 바라며 올려다본 하늘은 제법 흐렸다. 조금은 걱정되는 날씨였지만, 오늘의 목표는 분명했다. 윗세오름.

9시 48분, 도립미술관에 도착했다. 휴대폰으로 미리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지만, 착각으로 30분을 정류장에서 무의미하게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10시 19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240번 버스는 1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작은 실수와 지연들이 모여 아침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여행이란 원래 이런 작은 우연들의 연속이 아닐까. 10시 28분, 버스에 올라 '어리목 입구 남' 정류소를 향해 출발했다. 꼬불꼬불한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는 내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10시 45분,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차장 근처 화장실을 이용한 뒤, 오늘의 등반 계획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서 출발해 윗세오름 대피소를 거쳐 영실 탐방로로 내려가는 코스.

입구에선 윗세오름에 눈이 쌓여 아이젠이 없으면 통과시켜주지 않는다는 안내를 받았다. 실제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행히 나는 준비를 했지만 사람들의 배낭을 일일이 확인은 하지 않았다. 아이젠이 없었어도 입산은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위험과 맞바꾸는 행위다.

등산이 시작되고 어리목 목교를 지나 해발 1,100m 지점에서 아이젠을 착용했다. 설렁설렁 오르다 보니 다른 등산객들에 비해 뒤처진다고 생각했지만, 앞서간 사람들이 중간중간 쉬고 있어 결국 오르는 속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12시 20분, 오름을 오르는 길 옆으로 레일이 보였다. 쌓인 눈과 비좁은 길로 인해 잠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체온 변화에 따라 옷을 수시로 입고 벗기를 반복했고, 아이젠도 지형에 맞춰 끼고 빼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며 오른다.


12시 31분, 사제비동산을 지나 근처 샘터에서 물을 마셨다. 나중에야 수질검사 성적서가 떼어져 있어 마셔도 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시원하게 마신 뒤였다.

사제비동산을 지나 만세동산 구간으로 진입하자 주변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만세동산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윗세오름 주변의 다양한 오름들(노루오름, 바리메, 노꼬메오름, 붉은오름, 쳇망오름)의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흐린 날씨 탓에 조금은 흐릿하게 보였다.

1시 2분, 등산로 한켠에서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산행 중 담배를 피우는 이런 무분별한 행동이 최근 대형 화재의 불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자연을 훼손하는 모순된 행동들이다.

1시 9분, 나무데크길을 지나 만세동산 전망대에 도착했다. 비록 날씨는 흐렸지만, 그럼에도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망대에서는 삼형제오름, 노로오름, 바리메오름, 쳇망오름, 큰노꼬메, 족은노꼬메, 사제비동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해발 1,600m를 넘어서자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고, 눈에 반사된 햇빛이 얼굴을 따갑게 했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민대가리동산 - 장구목 - 백록담(화구벽) - 윗세붉은오름 - 윗세누운오름
삼형제오름 - 노로오름 - 바리메오름 - 쳇망오름 - 큰노꼬메 - 족은노꼬매 - 사제비동산
윗세오름 안내소

1시 55분, 드디어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눈밭으로 덮여 있어 어디가 정상인지 헷갈릴 정도다. 윗세오름 정상을 알리는 나무는 아랫부분이 눈에 묻혀 있었고, 해발 1,700m를 알리는 정상석은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오름 정상이지만 저 멀리 백록담 화구벽이 보이기 때문에 오르다 만 기분도 든다. 하지만 백록담 동벽과 남벽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한라산 정상과는 달리 사람도 많지 않고,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념사진과 셀카를 찍는 동안, 눈밭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자꾸 실눈을 뜨게 된다. 선글라스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옷을 털다 카메라도 떨어뜨렸지만 다행히 파손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챙겨 온 바나나와 연양갱, 단백질바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사진도 더 찍고, 화장실도 이용하며 정상에서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오후 2시 30분쯤, 하산을 시작했다.

장구목오름 - 화구벽(백록담) - 윗방아오름 - 방아오름 - 앞방아오름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남벽 분기점을 통해 예전에는 백록담 정상으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은 출입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돈내코 탐방로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시간이 늦어져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계획대로 영실 탐방로 코스로 하산했다. 하산 코스는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윗세족은오름을 만날 수 있었고, 백록담 화구벽과 장구목오름, 윗방아오름, 방아오름, 앞방아오름의 장관이 펼쳐졌다. 백록담 화구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다시 나무데크를 따라 내려가는 풍경도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특히 병풍바위 구간에서 내려다보는 오름과 구름, 그리고 저 멀리 바다까지의 전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3시 42분, 볼레오름과 세오름이 보였고, 3시 50분쯤에는 병풍바위가, 그리고 5분 정도 더 내려가자 영실 폭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병풍바위는 수직의 바위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모습으로, 신들의 거처라 불리는 이곳은 한여름에도 구름이 몰려와 몸을 씻고 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4시,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을 지나 10분 정도 더 내려가자 점점 나무들이 하산길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10분을 더 내려가자 시원한 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레오름 - 세오름

4시 45분, 드디어 영실탐방로 입구에 도착하며 하산을 완료했다. 영실탐방로는 한라산 탐방로 중 가장 짧은 서남쪽 탐방로로, 시간은 짧았지만 풍경만큼은 결코 짧지 않았다. 입구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로 조금 더 내려가야 했지만, 가는 길은 완만해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5시 24분,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곧이어 5시 26분 막차 버스를 타고 제주시로 향했다. 버스터미널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


하루 동안 경험한 윗세오름의 매력은 단순한 산행 이상이었다. 때로는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때로는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던 풍경들. 눈 덮인 산길을 오르내리며 느낀 도전과 성취감. 그리고 자연이 선사한 찬란한 아름다움까지. 다음에 제주도를 찾게 된다면, 맑은 날 다시 한번 윗세오름을 오르며 오늘 보지 못한 또 다른 풍경을 만나고 싶다. 그때는 꼭 선글라스와 선크림을 챙겨야겠다는 작은 다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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