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철원기행> 리뷰
김대환 감독의 영화 <철원기행>은 제목을 보는 순간 비슷한 제목의 소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그 제목만으로도 벌써 철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무진기행] 속 무진은 주인공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 같은 장소였다. 가장으로서 사위로서 짊어지어야 할 무게를 잠시 잊기 위해 떠난 무진. ‘나’는 무진에 일상에서는 감히 못할 일들을 묻고 돌아온다. 그렇다면 <철원기행> 속 ‘철원’은 어떤가? 각자의 상상을 품은 채 마주 하게 되는 영화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제멋대로의 생각들을 철원이라는 공간에 자유롭게 풀어주며 그 안의 인물들이 걸어가는 여정을 따라 천천히 나아간다.
강원도 철원. 유난히 많이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노년의 교사 김성근(문창길 분)은 정년 퇴임을 맞이한다. 오랫동안 걸어온 길에 비해 초라한 퇴임식에 온 건 떨어져 살고 있던 아내 여정(이영란 분)과 큰 아들 내외. 기쁜 날 중국집을 찾아 식사를 하는 가족이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게다가 약속 시간에 늦은 막내 아들 수현(허재원 분)이 뒤늦게 합류하며 분위기는 점점 더 불편해지는데. 체 할 것만 같은 식사 자리가 끝나 가던 중 아버지 성근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아내 여정과 이혼하겠다는 것. 큰 아들 동욱(김민혁 분)과 며느리 혜정(이상희 분), 수현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여정은 경악하며 밖으로 나가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폭탄 발언 이후 가족들 간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지만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 폭설로 인해 온 가족이 철원에 발이 묶여버린다. 원치 않게 아버지 성근의 집에 머물게 된 다섯 사람. 그들 안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족상을 엿볼 수 있다. 무뚝뚝하고 속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어머니. 부모님을 어려워하는 큰 아들과 시부모님께 밉보이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며느리, 그리고 아직은 철없는 막내아들까지. 김대환 감독이 정확히 잡아낸 우리네 가족들의 모습들은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로 다시 태어났고 <철원기행>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관객들에게 찾아왔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다섯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 역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적 모습으로 영화에 감칠맛을 더하는데. 감독이 특히나 강조하며 드러내는 건 좋은 겉포장 속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의 못난 모습들이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치는 영화가 하나 있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의 2014년도 작품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포스 마쥬어> 속 가족들은 눈으로 뒤 덮인 아름다운 알프스의 스키 리조트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데 <철원기행> 속 가족들 역시 갑작스러운 날씨로 인해 그와 같은 행보를 걷는다. 폐쇄된 공간,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가족의 낯섦. 그들을 고립시키는 ‘눈’을 매개로 두 영화의 가족들은 서로의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각자의 마음이라지만 한편에 자리 잡은 이기적인 마음 역시 사람의 일부분. 두 영화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우는가 하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걷는다. <포스 마쥬어>가 모종의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 간의 불편함을 뒤덮어 버리는 반면 <철원기행>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신들을 맡긴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들이 남아 있지만 결코 그 해답을 영화 속에서 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딘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헛웃음마저 나오게 만드는 영화 <철원기행>은 굉장히 불친절하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이혼을 얘기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자식 세대가 겪는 문제는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는다. 찝찝함을 남긴 채 막내아들과 엄마는 버스에 오르고 큰 아들 내외 역시 아버지를 뒤로한 채 철원을 떠난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굳이 친절할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벌써 우리가 겪고 있을 일들이기에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그 이면을 모두가 이미 짐작했을 터였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End of Winter’. 이 땅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이 가족의 겨울은 이제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하나. 괜한 말 한마디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들의 모습에도 우리가 희망을 느끼는 건 떠나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끝에 걸린 봄을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