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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13. 2020

마음이 있는 곳에 하루가 있다.

영화 <최악의 하루> 리뷰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 분)에게 삶이란 그저 하나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매 순간순간 그녀가 내뱉는 말은 연극의 대사가 되고 그녀는 여배우의 심정으로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열연을 펼친다. 자고로 배우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기에 그녀는 이렇게 결심한 듯 보인다. 매번 새로운 ‘은희’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자. 옛 남자 운철(이희준 분) 앞에서는 실연의 슬픔에 빠진 가녀린 소녀로, 현재 남자 친구 현오(권율 분)에게는 애인의 소홀함 때문에 화가 난 연인으로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에게는 멋진 배우를 꿈꾸는 매력적인 여자로 분하려던 은희는 어느 늦은 여름, 그만 <최악의 하루>를 마주하고 만다.
 연습을 마치고 나와 담벼락 앞에 앉은 은희는 괜스레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헛기침을 한다. 담배 역시 은희에게는 삶 속 연기의 일부이다. 그런 그녀에게 낯선 남자 료헤이가 다가와 조금은 어색한 영어로 길을 묻는다. 한국에 방문한 소설가 료헤이와 배우 지망생 은희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거짓말’이었다. 료헤이는 소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거짓말을 하고 은희 역시 무대 위에서 진짜가 아닌 삶을 표현한다.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속에서도 은연중에 동질감을 느끼고 그날 하루는 두 사람이 헤어진 순간부터 시작된다.  


김종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최악의 하루>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은희와 료헤이의 ‘최악의 하루’를 담담하게 바라본다. 영화는 제목에 충실하게 두 사람을 당혹스러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거짓’을 팔아 살아가는 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짓’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 앞에 좌절감을 느낀다. 아이러니 한 건 거짓말을 하는 은희와 관계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료헤이는 사실 누구보다 진실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희가 운철과 현오 앞에서 당당하게 화를 낼 수 있는 건 그녀가 그 두 사람 앞에 드러낸 것이 그녀 스스로가 느낀 진실함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을 하고 두 남자를 만난 파렴치한 여자지만 은희 스스로는 운철에게도 현오에게도 진심이었던 것. 그러나 진실이라는 말로 포장된 거짓은 오래갈 수 없기에 은희는 스스로가 만든 진실에 지치고 만다.
 
한편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온 료헤이는 자기가 진실로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진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현실을 빌려 써왔는데 결국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그 과정에서 료헤이는 진실과 거짓의 사이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 사실 벼랑으로 내몰았다고 하기에는 못 미치고 별 일이 아니라고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찝찝한 그런 애매모호함 속에서 은희와 료헤이에게 들이닥친 그 날 하루는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다. 최악으로 치닫던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있음을 통해 서서히 옅어지는데 여기서 영화는 비슷한 두 사람이 만나 상쇄되는 거짓과 중첩된 진실의 힘을 드러낸다.  

또 하나 <최악의 하루>에서 눈 여겨 볼만한 건 영화가 그려낸 서울의 모습이다. 희뿌연 파스텔 톤의 화면으로 보이는 서촌과 남산의 모습은 그 어느 옛날의 기억처럼 아련함을 더한다. 더불어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한 여행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서울은 이국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때 외국인의 시선으로 담은 서울로 주목을 받았던 프랑스 영상작가 장 줄리앙 푸스 감독의 작품이 <Sous L'eau >이 보여줬던 낯선 서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전작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역시 남산이라는 공간을 선택했던 김종관 감독은 <최악의 하루>로 다시 한번 그 특유의 빛과 색 사용을 보여줬다. 낮은 대비와 채도를 통해 빛과 색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한 꺼풀 벗겨낸 영화는 파스텔 톤의 화면이 주는 안정감을 더하며 그가 왜 한국의 이와이 슌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준다.  
 
누구나 마주치게 될 수 있는 <최악의 하루>. 영화 속 인물들로부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들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카페에서 귀를 기울이면 들릴 법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쏟아내는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비춘다. 진실과 거짓이 만드는 달콤 씁쓸한 맛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겪는 <최악의 하루>. 어쩌면 내일 은희가 서 있던 그 남산 오솔길에 당신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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