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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16. 2020

진실이 진실이 되기까지

영화 <트루스> 리뷰

조지 워싱턴은 언론과 싸우는 권력 앞에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정부와 정부 관리들이 계속해서 언론 남용의 주제로 오르내리고, 이에 대한 진의나 사실 파악이 겸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 생각에는 세상 그 누구도 지도권을 행사할 수 없고 나라를 운영해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1783년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미국 최초의 일간지가 발행된 이후 미국 독립의 초석인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데 있어 가장 핵심 역할을 했던 언론은 신문, 라디오, TV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용이 있게 하게 하여 유권자들이 합리적이고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있어 언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저널리즘은 정보 전달을 넘어 그 이상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하지만 옳은 정보, 즉 진실에 대해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적 아이러니 속에서 진실 규명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 언론. 우리는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2005년, 한 권의 책이 미국 저널리즘 계를 뒤집어 놓았다. 메리 메이프스가 쓴 회고록 <진실과 의무: 언론, 대통령, 그리고 권력의 특권>. 2004년 그녀를 해고당하게 만들었던 ‘그 사건’에 대한 당시의 이야기를 남긴 글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마침내 이는 제임스 밴더빌트 감독을 통해 영화 <트루스>로 재탄생하였다. 회고록이 출간되기 1년 전, CBS의 25년 차 베테랑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 분)는 새롭게 개편된 시사고발 프로그램 <60분>의 첫 방송 아이템으로 선거를 앞둔 부시 전 대통령의 베트남 참전 회피 의혹을 선택한다. 텅 빈 기록과 이를 증명할 한 장의 증거.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CBS의 최장수 간판 앵커 댄 레더(로버트 레드포드 분)를 비롯한 ‘60분’ 팀은 부시가 정말로 병역 특혜를 받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묻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난 뒤 이를 방송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찾아낸 증거 문서의 위조 여부에만 관심을 갖고 ‘60분 팀’을 공격했고 아무도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는다.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수록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권력. <트루스>는 진실 보도를 둘러싼 저널리즘과 권력의 관계를 고발한다.

2016년 2월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언론인의 위대한 활약을 통해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과 달리 <트루스>는 오히려 제목이 나타내는 ‘진실’은 뒤로한 채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행동하는 언론인, 정치인들을 비롯해 저널리즘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현주소를 ‘60분’ 팀의 방송 제작과정과 방송 이후의 행적을 통해 낱낱이 드러낸다. 시의성, 공공성, 주기성 등의 기준을 통해 결정되는 뉴스 보도 가치.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아젠다 세팅의 메커니즘 속에서 질문하려는 자와 질문을 막으려는 자의 ‘진실’ 싸움은 결코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부시 전 대통령이 병역 혜택을 받았는가’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로 명쾌히 떨어지는 대답을 원했던 ‘60분’ 팀이었지만 세상이 주목하는 건 ‘진실’에서 벗어난 ‘문서 조작 의혹’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에 대한 질문과 관심을 호도하려는 자들이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논점을 흐리기를 통해 본래의 의도를 잊게 함과 동시에 다른 일에 그 집중을 분산시켜 많은 사람들이 처음의 목적을 알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며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 시작한다.
 
‘진실 규명’ 이전에 언론을 지탱하는 건 인간이다. 진실 규명도 혹은 진실 은폐도 모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며 특정 보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말이다. ‘60분’ 팀은 문서 조작 의혹 하나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며 계속되는 비난과 배신,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신념에 대한 불확신으로 인해 좌절과 절망으로 침체되어 간다. 특히 이를 모두 기획한 메리가 자신의 질문 하나로 인해 무너져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표정과 숨소리 하나하나를 통해 ‘진실 보도’의 길을 걷고자 하지만 권력에 가로막힌 언론 속 개인의 나약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메리의 회고록과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 <트루스>. 영화는 치밀하게 얽혀 있는 사건들보다 ‘60분’ 팀 당사자들의 느꼈던 감정과 그들이 지녔던 가치에 집중하며 그때 그 순간의 치열함을 담아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진실’을 뒤로한 채 질문의 시발점조차 다른 사람들은 팽팽히 대립하며 점점 멀어지는 ‘진실’. 영화는 결코 ‘부시의 병역비리’를 고발하거나 이에 대한 진실을 다시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저널리즘이 지닌 실체적 진실 보도 자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해타산적 계산 속에서 힘겹게 싸우며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인간이기에 무너졌지만 인간이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 ‘진실’의 존재를 숨긴 채 다른 이야기로 여론 몰이를 하려는 이들의 존재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진실’,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언론인들이 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을 진정으로 힘들게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이 아닌 그들이 알리려는 진실은 보지 못한 채 그저 방송을 통해 재미만 찾으려는 시청자들일 지 모른다. 그저 여론에 휩쓸려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을 매도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진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진실을 찾으려는 언론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건 진실을 향해 같이 질문할 수 있는 타인의 관심. 진실 보도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향한 아름다운 헌정 <트루스>가  ‘진실’을 잃어가는 사회에 던지는 필사적인 구조 요청에 귀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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