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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24. 2020

과거를 마주하는 일

영화 <우주의 크리스마스> 리뷰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는 일명 ‘타임리프’, 즉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소녀가 등장한다. 주인공 소녀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그녀가 진짜 하는 일이라고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더 오래 부르거나 좋아하는 푸딩을 마구마구 먹는 것뿐이다. 사실이 그렇다. 범인들에게 시간 여행이란 수세기를 뛰어넘어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개입하는 수단이 아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겪지 못한 인류의 시간보다 내가 당장에 지나온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 특히 후회로 남았던 선택의 순간들을 바꾸는 것에 더 마음이 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김경형 감독의 신작 <우주의 크리스마스>에 과거를 바꾸다 못해 허물고자 하는 여인이 있다.
 서른여덟의 성우주(김지수 분)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오래된 물건들처럼 쌓인 낡은 과거를 버리고 싶었던 그녀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골동품점을 선택한다. 창고에 쌓여 있는 골동품들에는 그 물건을 소유했던 사람분의 과거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골동품점은 성우주의 과거의 표상이었다. 그녀는 낡은 골동품점을 바라보며 건물과 함께 그녀의 지난 시간도 허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의 바람이 골동품점에 깃들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골동품점은 그녀의 과거가 겹치는 기이한 공간으로 변이한다.

골동품 가게의 손자 승현(장경엽 분)의 도움으로 카페 공사를 시작한 서른여덟의 우주. 그런 그녀 앞에 승현의 친구라며 나타난 열아홉의 성우주(윤소미 분)는 그녀의 과거와 꼭 닮아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흐 화집을 안은 열아홉 우주에게서 기시감을 느낀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일에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나타난 또 한 명의 우주. 골동품 가게에 맡겼던 물건을 찾으러 온 스물여섯의 성우주(허이재 분) 역시 서른여덟의 우주가 지나온 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겪는 중이었다.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다가온 과거의 잔재들에 서른여덟의 우주는 자신의 기억 속에 진득하니 붙어 있던 미련을 발견한다.
 <우주의 크리스마스>는 성우주라는 한 여자가 신비스러운 일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더듬은 유사 시간 여행 이야기다. 뒤틀린 시간의 축은 닮은 삶을 살아가던 세 여자를 한 장소에 모이게 만들었고 골동품 가게를 매개로 마주한 성우주의 열아홉, 스물여섯, 서른여덟은 선택의 기로 앞에서 서로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본다. ‘시간’을 소재로 판타지적 감성을 그려낸 김경형 감독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 성우주에게 일어난 일에 신비감을 더했다. 우주의 딸이 발견한 세 개의 달이나 승현의 할아버지가 만든 작은 소품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더불어 ‘성우주’라는 이름 역시 평행 우주처럼 존재하는 세 여자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서른여덞의 우주가 겪는 일을 마치 환상처럼 만들었다.

같은 일을 겪고 있지만 결국 개별적인 세 명의 우주. 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기시감에 사로잡힌 서른여덟의 우주는 두 사람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또 다른 꿈을 떠올린다. 마치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서른여덟의 우주에게 일어난 과거와의 조우. 두 사람이 떠나고 남겨진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직 걷지 않은 길뿐이다. 시간 여행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은 우리가 가지 않은 길로부터 기인한다. 시인 프로스트 역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노래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이미 앞으로 나아갔다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더욱 남는 것이 미련. 서른여덟 우주가 남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열망이 한 여름밤의 꿈같은 우연을 낳게 한 것일까? 아니면 승현의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잠시 시간의 틈이 생겨버린 것일까? <우주의 크리스마스>는 그 무엇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영화가 남겨둔 빈틈을 채우는 일이 결국 우리의 몫이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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