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원 Dec 23. 2020

당신만의 온도 그리고 시간

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리뷰


 연재 당시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네이버 웹툰 <찌질의 역사>. 에피소드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인물들을 찌질함. 특히 누구나 겪을 법한 상황과 더불어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섬세한 심리 묘사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특히 주인공과 헤어진 여자 주인공이 같은 기억을 다르게 재생해가는 과정은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며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여자와 남자. 네드 벤슨 감독의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를 역시 다른 행성에서 온 것만 같은 남녀의 차이를 실감하려 한다.
 

코어(제임스 맥어보이)와 릭비(제시카 차스테인)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은 산산이 부서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릭비가 강물로 몸을 던진 이후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릭비. 코너는 릭비를 찾기 위해 그녀를 찾아 나서지만 다가갈수록 릭비는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서로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절의 기억은 점점 빛바래가고, 이제는 전혀 다른 길을 향해 걷는 두 사람. 무엇이 그렇게 이들을 갈라놓은 걸까?
1966년 비틀즈 앨범 [Revolver]에 수록된 노래 [Eleanor Rigby]의 가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중 이 노래를 듣게 된 네드 벤슨 감독은 노랫말 중 ‘저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라는 부분에서 영화의 결정적인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노래 가사 속 외로운 여인 릭비. 꿈속에서 살며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정작 죽은 뒤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인 릭비는 영화 속 릭비의 쓸쓸한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다. 서정적인 멜로디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영화는 같은 시간을 겪었지만 그 시간을 다르게 떠올리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색다르게 풀어냈다.
 

사실 영화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릭비와 코너의 이야기가 다른 온도를 갖고 진행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애초 이 영화는 하나의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와 <엘리노어 릭비: 그 여자> 두 가지의 버전으로 제작된 영화는 본디 하나의 영화에서 한 명의 이야기만을 풀어냈었다.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는 차가운 블루의 색감으로 릭비가 떠난 후 그녀를 찾아 헤매며 좌절하는 코너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차분한 블루톤의 이야기는 같은 일을 겪고도 냉정하게 이성을 찾고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 삶을 이어나가려는 코너를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릭비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엘리노어 릭비: 그 여자>는 조금 더 은은한 브라운의 색감을 지닌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삶이 송두리째 뽑혀 흔들려 버린 그녀는 코너와 다르게 감성적으로 삶의 변화를 모색한다. 집을 떠나 코너마저 잊으려 노력하며 새 삶을 준비하는 릭비. 두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달라져갔다. 그리고 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교차 편집된 이야기로 조금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온도와 각자의 시간이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건 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법. 기억은 조작되기 마련이고 추억은 재해석되어 포장된 채 재생된다. 남자와 여자. 다른 건 성 염색체 하나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연애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한 두 남녀. 전혀 다른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그들의 전혀 다른 위기 극복 방식.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엿보게 하는 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당신과 그 사람의 지난 시간은 어떤 온도로 기억되고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과거를 마주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