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계> 리뷰
그 옛날 퇴계와 고봉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을 했다고 한다. 13년 동안의 서신왕래 속에 녹여진 학문에 대한 두 사람의 열정은 고스란히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들지 않는다. 눈 깜짝할 새 보내지는 단문의 문자들에서는 깊이를 느낄 수 없다. 이런 세태 속에 편지를 쓰기 위해 펜 대신 카메라를 든 세 사람, 각자 다른 나라에서 온 그들은 한 가지 이야기를 위해 모였다. 빛으로 써내려 간 세 사람의 서신, 영화 <경계>가 광선을 통해 바다를 건너 세계 각지의 스크린 위에서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경계>는 한국 출신의 문정현 감독, 세르비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토도로비치(이하 ‘블라디미르’) 감독, 그리고 인도네시아 출신의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이하 ‘루디’) 감독 세 사람이 풀어낸 ‘경계’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가 편지 형식으로 묶여 만들어진 일종의 옴니버스 로드 다큐멘터리다. 일본의 영화제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가 가진 공통의 관심사를 영화로 만들어보고자 결심했고 삶의 자리에서 떠돌이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영상에 담아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싱가포르, 세르비아, 베트남, 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세계 각지에서 물리적 경계 그 이상의 경계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그 어떤 사람들. 바로 우리 곁에 있음에도 보지 못했던 그들의 사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하려는 몸짓으로 다가왔다.
세 감독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마주한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렌즈를 정면으로 보며 감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개인으로 나타난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의 거대한 역사로 느껴지는 건 역사 그 자체가 그들의 삶 안에 스며들어 그들을 경계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디스트릭트 6에서 쫓겨난 가족부터 베트남 전 이후 인도네시아로 망명하여 갈랑 섬 난민 캠프에 모인 사람들, 분단 이후 65년 만에 처음 남한 땅을 밟은 어떤 사내까지 국경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경계>와 맞닥뜨린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마음으로 방랑하며 갈 곳을 잃어버렸다. 전쟁, 인종차별, 분단 등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던 ‘고향’이 있는 삶, ‘정착’하며 사는 삶이 누군가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유랑민이 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 있지만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 몰랐던 차별들이 어느새 보편적인 일이 되어 그들을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괴롭히는 상황. 가감 없이 그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은 세 감독들은 여기에 그들의 담담한 내레이션을 더해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삶에 대한 본인들의 생각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여기서 그들을 한 줄기로 잇고 있는 키워드는 ‘그리움’. 이 공통점은 감독들로 하여금 단순히 물리적 경계를 넘어 공간적, 시간적 경계를 말하며 남들보다 조금 더 ‘떠도는 삶’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곧 <경계>가 되어 우리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그리고 꼭 나눠야 할 이야기가 되었다.
특히 <경계>가 특별한 건 영국의 브렉시트로 대두된 난민 문제와 관련이 있다. <경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전쟁으로 인해 자기 고향을 떠나야만 했는데 이들을 마주한 시선이 바로 지금 영국이 브렉시트를 통해 보여준 태도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의 전쟁으로 인해 국경 밖으로 밀려난 시리아 난민들을 대하는 유럽 각국의 다양한 태도는 앞으로 다가올 난민 문제가 머나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시점에 <경계>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하나, 결코 ‘경계’ 근처에서 떠도는 삶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드는 역사적 흐름은 개인의 힘으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조금씩 대두되고 있는 상황. 난민 문제에서 외노자 문제로 오버랩되는 문제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경계>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기억해야 할지 넌지시 알려준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조종사들은 그 보이지 않는 길로 다닌다. 경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경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무리 뉴스가 이 시대를 초연결사회라 부르며 인간, 사물, 인터넷 등 모든 것들이 연결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옆 사람 조차와도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경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이나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혹은 보지 않으려 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 <경계>. 모두가 세계의 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 광경만을 찬양할 때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현실을 가리고 있던 여행 판타지를 걷어내 우리가 보아야 할 게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