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아티스트> 리뷰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산문 역시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이 책을 넘기는 매 시간 시간마다 글을 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회화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다. 사람들이 그림 앞에 머무는 시간은 짧으면 몇 초 혹은 길어야 몇 분이다. 그림은 그 짧은 시간에 쫓기면서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려 애를 쓰고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으려 한다.
화가 김덕기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다. 넓은 캔버스 위에 올려진 그의 그림은 발걸음을 멈춰 서서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 곳곳에 수많은 이야기를 숨겨놓고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천히 그림을 따라가야 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그의 그림이 결코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이 느껴지는 풍부한 색채와 점들이 이뤄내는 부드러운 선과 면은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그의 그림 앞에 단지 몇 분 정도만 머물렀겠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이런 매력에 흠뻑 빠진 그림 너머의 화가 김덕기, 그리고 인간 김덕기를 알고 싶어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소울아트스페이스의 대표 김선영 감독이다. <풀 문 인 차이나>로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바 있는 그녀는 이번엔 장르를 바꿔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그녀가 선택한 피사체 김덕기 덕분이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사람에 대한 사람으로 이어졌고 곧 <아티스트>로 태어났다.
영화 <아티스트> 속에 드러난 김덕기는 일종의 시간 여행자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의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다. 가족을 매개로 추억 속을 여행하는 그의 여행은 행복이라는 흔적을 캔버스 위에 붓으로 남겼다. 사실 그의 삶 자체는 행복과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분단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이 그의 삶 깊숙이 배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오히려 그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웠고 그의 그림의 원천이 되었다.
차분한 색감과 음악의 사용으로 화가 김덕기를 닮은 영화 <아티스트>는 김덕기가 걸어온 길을 천천히 복기하며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 김덕기는 담담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 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그가 사용하는 언어다. 젠체하거나 가식적이지 않은 그의 말은 아주 어린아이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삶에 대한 진솔한 고찰을 담고 있다. 이런 쉬운 언어의 사용은 그의 그림에도 영향을 끼쳐 그의 그림이 세대를 아울러 사랑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복잡함은 걸러내고 눈을 즐겁게 하는 그의 예술처럼 영화 <아티스트> 역시 쉬운 언어를 선택했다. 특히 예술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관람객의 인터뷰까지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영화는 김덕기와 여러 사람의 입을 빌어 그의 작품이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덕기는 끊임없이 관객들과 그림으로 소통한다. 캔버스를 벗어나 붓을 올릴 수 있는 모든 곳에 그림을 그리며 제 세계를 구축한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보다 그림을 나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영화 <아티스트> 역시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관객들과 담소를 나누듯 흘러간다. ‘행복’을 그리며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화가 김덕기. 영화는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지만 오히려 그가 남긴 흔적을 통해 그가 걸어갈 또 다른 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