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아르고스(Los Arcos)
신은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이들을 돕는다.
-샤인-
숙소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삼층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에는 푸엔테 때처럼 내 맞은편 일층에 안나가 있었다. 그리고 내 침대 일층에는 수잔이라는 독일순례자가 있다.
수잔과의 내가 서로 처음 알게 된 곳이다.
특이한 건물 구조로 전체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다.
내 기억과 사진을 보며 기억을 더듬으며 건물 배치도를 그려냈기 때문에 혹시 디테일한 사진이 있는 분은 나에게 사진을 보내 주면 그림을 수정할 것이다.
1층과 1.5층에도 벙커 (도미토리) 방이 있었고, 2층과 2.5층에 일 이인실 방들과 여자 화장실과 남자 화장실이 있었으니까. 올라가면서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로스 아르고스 전까지만 해도 벌써 몇 번 봤다고 나는 베로니카 커플과 에스페란자 커플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로스 아르고스를 오는 길 내내 내 다시 길을 더듬으며 걸어야 했다.
초반에 만났던 인연들이 끝이 나고 새로운 구간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그들의 걷기 템포가 달랐다.
인생처럼 카미노의 길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나 의지 없이 나 혼자 걷는 길이다.
신의 구원도 스스로가 돕는 자에게 온다고 하지 않던가?
1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뙤약볕을 쏘이며 배낭을 메고 뛰어 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나는 지금 멀쩡하게 이곳 로스 아르고스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강하다.
배낭을 풀어놓고는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샤워실로 계단 봉을 부여잡고 내려갔다.
화장실 벽에는 “세면대 빨래 금지”라는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문구가 붙어 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이곳에서 하면 이런 걸 붙이는 걸까?
땀에 젖은 옷가지와 빨래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1층에 있는 빨래방에 가서 손빨래를 해야 한다.
한국의 습식 화장실 문화에서는 익숙하지 않고 불편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땀에 엉겨 붙어 있는 옷을 빨리 벗어 버리고 뽀송하고 깨끗하게 목욕재계 하고 싶었다.
불안에 휩싸여 걸어온 이 길의 나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창피함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뛰어오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물집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와서 응접실을 지나면 뒷마당에서 빨래를 돌리고 건조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마리앤을 만났다.
마리앤과 안나는 뒷마당에 앉아서 100년은 족히 돼 보이는 이 프레스 기계에 양말을 빤 것을 물을 빼면서 즐거워했다.
베로니카는 왓츠앱으로 보낸 사진을 보고 1800년대로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안나는 이 기계를 이용하고 있는 나와 마리앤의 모습을 연신 사진으로 담으며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안나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어서 혹시 저녁 어떻게 하시는지 여쭤보니 안나는 이미 저녁을 예약해
두었다고 하셨다. 흠… 별수가 있나?
나는 물을 쫙뺀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나서 3층으로 올라와보니
조셉 아저씨가 테이블에 앉아 피자에 와인을 마시고 계셨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조셉아저씨는 오늘 고된 하루라 숙소에서 와인에 피자를 먹고 한숨 잘 계획이라 한다.
일단 나는 방에 들어가 물집을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일층침대에 머물고 있는 수잔이 들어와 있었다.
로스아르고스에서 처음 만난 수잔과 이렇게 길의 순례길을 끝나고 휴가길에서까지 다시 마주치는 길고 긴 인연을 맺게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자기소개를 했다.
수잔은 독일 사람이다.
독일 집에서부터 걷고 있다고 했다.
이 유럽 사람들 스케일 뭐지?
두 번째 까미노길이었고, 이번에 길 위에서 60세가 되는 것을 기념하며 길을 것도 있다.
우리는 나이를 떠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는 이곳 까미노 로스 아르고스에서 처음 만났다.
혹시 저녁은 어떻게 하시냐고 물으니 딱히 생각은 없지만 처음 만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며 수잔은
네가 권한다면 함께 음료라도 마시자며 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길을 나섰다.
숙소밖에서 걸어 나가는데 이층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던 세이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생장에서 주비리 가는 길까지만 보이다 그 이후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이층 창가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네가 잘 걷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너는 강해!
너는 잘 해낼 거야.”
라고 말하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뭐지?
뭔가 신기루가 지나간 것 같이 신비로운 느낌의 세이야를 뒤로 하고 나는 주린 배를 채우러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숙소에 돌아오고 제일 어이없는 게 왜 이 길을 그렇게 뛰어 왔지 하면서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나의 허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인정하고 하나씩 걸어 나가면 된다.
나는 느린 사람이다.
그 길은 항상 그곳에 있다.
단지 내 마음이 급했던 것뿐이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느리다고 그 길을 못 가는 게 아니다.
광장으로 도착하니 아담한 광장 앞에 성당이 광장을 꽉 메우고 서있어서 종소리가 온마을에 울려 퍼지며
해가 지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우리는 카페 부엔카미노에 앉아 나는 빠에야와 맥주를 시켜서 먹고
수잔은 맥주를 한잔 시켜 마셨다.
떠나온 길을 얘기하면서 수비리 가는 길의 식중독 사건을 이야기했더니 수잔 역시 그 길에서 식중독으로 길을 걷는 내내 속을 게워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에게 식중독 사건 이후 늘 달고 다니는 물집은 큰 사건이 아닐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헐….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냐고?
그렇다면 정말 거기서 먹었던 또르띠야가 문제가 있었던 거겠지?
내가 몸이 약하거나 예민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는 고생길을 똑같이 겪었던 동질감 때문인지 금방 친해지게 됐다.
수잔을 알고 있던 어떤 브라질 순례자가 수잔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때 당시 수잔과 나의 이야기를 하자
“아프면 쉬어야지”
”왜 걸었어? “
라며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 아프면 쉬어야지 멈출 생각을 못할 때였다.
길 중간에 갑자기 아팠던 건데 말도 안 듣고 가버리네?
잠시 머리에 종을 맞은 듯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합석했던 미국 텍사스 출신 마라토너 순례자가 기억이 남는다.
그 이유는 그는 아주 마르고 단단한 체형에 마치 퀸즈겜빗에 나오는 카우보이 베니 와츠처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긴 머리와 콧수염을 휘날리며 가볍게 길을 걷는 순례자였다. 다부진 체형이 운동을 오래 한 티가 났다. 그는 삼십 킬로쯤은 동네 산책 다니듯 가벼운 걸음으로 즐겁게 걸을 체력이 있다.
매년 4대 마라톤을 참가하고 도쿄 마라톤을 참가할 거라고 했다.
나는 대화를 들으며 개눈 감추듯 빠에야를 먹어치웠다.
광장 테라스 가운데에는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길을 걸으며 만났던 보더콜리 삼바와 삼바의 주인 프랑스인 오렐리 그리고 마리앤의 남편과 마리앤, 안나가 나타났다.
삼바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잘 걷고 있는 듯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는 만져달라며 배를 뒤집어까고는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보더콜리를 보자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 “으나심”이 생각났다.
아마도 아까 만났던 텍사스 출신 마라토너와 최근 마라톤을 뛰기 시작한 친구 그리고 장기 마라토너로 타고난 보더콜리까지 똑똑한 뉴요커 으나심이 떠오르면서 나의 기억 회로 버튼이 갑자기 고등학교 때 친구를 회상하게 만들었나보다.
나와 으나심 둘 다 각자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방법으로 나는 걷고 은심은 뛰면서 실타래를 풀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광장으로 나온 마리앤과 안나 그리고 마리앤의 지인과 가족들이 모두 모여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곳에 자리에 합석하게 됐다.
안나는 나에게 저기 성당 꼭 구경해 보라며 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나를 일깨우는 듯 청량했고, 마을 규모에 비해 웅장하게 컸던 성당에 꼭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미사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한참 같이 모두와 앉아있다가 식사가 끝나는 분위기가 되자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소란스러운 바깥 풍경과 다르게 고요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한참을 위를 바라보며 성당을 구경했다.
예배를 드리러 온 현지인 분들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순례자와 어우러졌다.
성당을 나오려는데 수비리에서 만났던 폴란드 청년 시몬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렇다 나는 느린 게 아니라 내 마음만 조급했던 거지
모두 각자 걷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세번째 만남에 반가움에 비쥬를 하고 이날 왓츠앱으로 번호를 교환했다.
또 연락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함께 앉았던 테이블에 사람들은 각자 숙소로 돌아간 후였다.
나는 하루의 마무리를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며 마무리한 후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까 피자를 먹었던 카페테라스에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카를로스 아저씨가 손을 흔든다.
여기서 다 만나네?
아저씨가 맥주 한잔 사주겠다며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카를로스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왔다.
우리는 매일 느리게 걷는 시간대 사람들에 속했기 때문에 늘 식수대 길목에서 자주 마주쳤다.
아저씨는 중간에 잠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들렀다 바로 부르고스로 기차를 탈것이라는 스케줄을 공유했다.
식전 식후 음주가 당연해진 하루가 이어졌다.
알베르게는 10시 전에까지 입소를 해야 해서 이제 들어가야 한다.
로스 아르고스는 해 질 녘 골목 사이로 거대한 성당 종이 30분마다 시간을 알려줬다.
길을 걷다 보니 삶의 기준이 원초적으로 바뀌며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늦은 시간 방으로 들어가니 방은 이미 불이 다 꺼진 상태였다.
종소리에 깨어난 나의 영혼이 정화되고 스스로 깨어나기를 원했던 나의 영혼의 안식처로 “로스아르고스”를 기억에 남게 되었다.
어두운 방으로 들어와 눈을 감으며 내일의 길을 걸을 준비를 해야겠다.
내일은 일정 자체를 계획하지 않았다.
가는 길 까지가 그곳이 내가 갈 곳이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