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ella(에스텔라)
에가 강이 흘러가는 마을인 에스테야는 1090년 나바라 왕 산초 라미레스가 순례길이 마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수정하면서 세워졌다. 그에 따라 에스떼야는 여러 기념비적인 유적지와 함께 순례길의 쉼터로서 번성했다고 한다.
-Buen Camino app 자료 발췌
카푸치노 수도회의 유례
1534년 교회의 공식 문서에도 카푸치노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때까지 형제는 700명이었다. 그들은 1619년 바울 5세의 결단으로 92년 동안 카푸치노스 가문이 붙어 있던 콘벤투알레스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단이 되었다.
단순함, 선교 정신, 사람들과의 친밀함(많은 곳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아포스톨라에서의 이란성 생활의 경험은 우리 생활 방식의 가시적인 징후이며, 초기 카푸친들의 참회와 기도의 삶에 대한 강조는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
2014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야코바이트 길을 따라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 8주년이 되는 해에, 그의 순례에 대한 열정과 성지로 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알려져 있다. 그 해에 이탈리아나 그 밖의 지역에서 그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산티아고 길을 따라 있는 재단들의 증언이 있는데, 그들의 중요성과 양은 오직 수도회 창립자의 근접성만으로 정당화된다.
https://www.alberguescapuchinos.org/identidad/
카푸치노 숙소
땀으로 샤워를 할 정도로 햇볕에 익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라 해서 나는 전통적인 오래된 수도원을 상상했으나 숙소는 새 단장을 한 듯 보였다.
입구에서 카푸치노 귀족의 동상이 입장을 환영하는 듯했다.
베로니카와 아담은 카푸치노 숙소를 찾으러 마을로 들어오고 나서 약간 외곽으로 빠지는 길에 유턴 길이 있는데 구글지도가 이상한 길로 인도를 해서 길을 한참을 헤매었다고 한다.
가끔 구글이 이상한 길을 안내하기도 하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해야 한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베로니카와 아담은 에스텔라에 있는 마사지샵에 가서 마사지를 받을 거라 했었고,
도착하고 한참 지난 시간 문자가 왔다.
그리고 훨씬 몸이 좋아졌다며 나에게도 마사지를 권했다.
나는 오늘 점심때 같은 숙소를 예약했다는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짐이 되는 건 싫었어서 오늘 역시 저녁을 함께 먹자는 제안에 나는 조심스럽게 너희 둘의 시간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면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카푸치노 숙소에는 대형 주방도 있었고, 굳이 시내로 들어가 비싼 음식을 사 먹지 않아도 될 터였다.
자연스러운 배려와 내 공간에서 오는 여유가 내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기는 듯 카미노 길 위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층까지 올라가는 숙소 길에서 다들 난간을 붙잡고 숙소까지 어기적 거리며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곳은 입구에 신발장과 지팡이 꽂이가 없고, 각자 방앞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방으로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방은 총 6인실 벙커 배드
방원은 6인이 꽉 차 있었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숙소에 도착해서 선착순으로 2층 침대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됐다.
6개의 캐비닛과 창가 앞에는 테이블이 한 개와 의자가 놓여 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는 이층 침대 두 개가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되 있다.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이층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여기 숙소는 프렌치 웨이앱에도 소개되어 있는 숙소라 그런지 한국인 순례자들이 머무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난 한국인 모녀 순례자
낮에 길에서 만난 40 km챌린지 청년
종교적 이유로 길을 걷는 동유럽 노부부 순례자 2분이 방배정을 함께 받아 이미 시에스타 중이었고,
챌린지 청년이라 부르는 나와 같은 성씨의 양군이 내 맞은편 2층 침대 자리에 이미 일찍 도착해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른하게 쉬는 시간이다.
한국인 모녀
한국인 모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짐을 싸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무래도 하루종일 짐을 들고 다니는 게 무리인 듯 보여서 나는 어머니에게 짐을 동키로 보내시면 어떨지 의견을 드렸다.
의도 한건 아니지만 이번 방은 한국인이 4명이나 있으니 당연히 방 분위기는 한국어만 쓰는 분위기가 되었다.
뭐 일단 나는 너무 땀에 찌든 옷을 벗고 씻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빠르게 샤워할 옷가지와 목욕용품을 가지고 샤워실로 향했다.
화장실 겸 샤워실도 공용이 아니라 따로 되어 있고, 깔끔해서 영화에서 봤던 혼용 야외 샤워장 같은 건 옛날 얘기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빨래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빨기 위해 일층 뒷마당에 있는 빨래방으로 향했는데, 양군이 손을 흔들며 세탁기 지금 돌리는 중인데 같이 해도 괜찮으니 넣고 같이 돌리자고 했다.
음..
나는 모르는 사람들의 빨래와 섞어 빨래를 하기까지는 낯가림과 더불어 많은 산을 넘어야 하는 사람이다.
정중히 거절을 하고 손빨래로 조물조물 빨래를 빨아 건조대에 걸어두었다.
화장실만큼이나 나에게 빨래를 함께 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내려놓음의 중요한 이슈였는데,
날도 이렇게 뜨거운데 굳이 매번 돈을 들여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고단해도 손빨래를 택한 것이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가져온 대부분의 옷들과 속옷이 빠르게 마르는 재질의 등산용품이었기에 가능했다.
엄마와 딸
빨래를 널고 숙소로 다시 돌아오니 한국인 모녀는 아직도 보낼 짐을 딸이 분류하고 있었다.
짜증 한번 안 내고 꿋꿋이 해내는 딸의 모습이 나였으면 분명 신경질을 내면서 찡찡 냈을 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 있는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 소식
감기에 걸려서 한 달 동안 장사를 못했다며 카카오 톡이 와있었다.
나는 점점 한국에서의 소식이 희미하게 멀어져 다른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평행우주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왠지 모르게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아마도 한국에 있었으면 투닥거리면서 말다툼하고 밖으로 나가 꿍시렁 거리며 불평을 토로하는 상황이 펼쳐졌겠지?
서로 독립하지 못한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가 가족이라곤 엄마와 나뿐 이라지만 서도 당연히 다 큰 자식이면 탯줄 끊고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엄마 배 주머니에서 잠시 나와 독립을 꿈꾸며 이렇게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녀는 나에게 오늘 주방에서 한국인 순례자들끼리 다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생각이 있으면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 한국말로 말을 트는 게 반갑지 않았다. 한국인 패치를 켜고 이야기 나누는 게 아직은 빨래를 함께 돌리는 것만큼이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턱끝까지 참고 있는 걸 꾹꾹 눌러 담고 온 순례길에서 까지 한국사람들과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관광을 목적으로 만난 사람이었다면 다르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처음 보는 외국인이 낮지 아직은 한국인과 얘기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있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번 만나 인사를 나누는 길에서 쌀쌀맞은 나에게 꾸준히 친절하게 대해 줬던 한국인 모녀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고마운 기억만 있다.
순례길을 끝까지 가는 동안 마지막 TRIACASTELA에서 선택한 SANBOL로 가는 갈림길에서 마주친 마지막 마주침까지 정말 수차례 우리는 비슷한 템포로 길을 걸으며 마주쳤었다.
서로 연락처 한번 주고받지 못한 게 제일 아쉽고 미안한 부분이다.
카푸치노 숙소 아쉬운 점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다 좋았지만 전기 플러그가 두 개밖에 없고 작은 조명등 대신에 아주 밝은 백색 형광등을 달아둬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9시부터 소등을 하고 잠을 자는 순례자들에게는 작은 조명등 정도가 적합한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침대였는데 침대의 재질이 중간이 비어 있는 쇠봉이었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빠지직하는 소리가 났다.
모두가 자고 있는 새벽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조심조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계단 앞에서 베로니카와 아담을 만났다. 샤워를 마치고 깔끔해진 우리는 어기적 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마을로 향했다.
나: 먼저 약국에 가야 해
베로니카: 알겠어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성당 구경을 마치고 마을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나: 혹시 먹을 만한 음식점 알아놨어?
베로니카: 아니 모르겠어, 일단 걸어보는 거지?
우선 너 약국 쪽으로 가보고 그다음에 알아보자.
굽이 굽이 골목길을 돌고 돌아 에스텔라 로고가 보이는 약국을 발견했다.
약국에 물건을 사는 동안 아담과 베로니카는 음식점을 찾아보겠다고 한다.
나는 약국에서 안나가 알려준 종이테이프 사진을 약사에게 내밀고 상담을 받은 후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다.
구매 목록:
종이테이프, 근육테이프, 꼼 삐드, 보타겔(근육이완젤)
총 16,70유로가 나왔다.
베로니카는 약국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성당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톡이 날아와서 나는 곧장 직진해서 길을 걸어갔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 애매한 시간대여서인지 웬만한 식당들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스페인 말을 할 줄 알았던 베로니카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이곳에 먹을 만한 음식점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우리는 강가 근처 테라스가 있는 음식점들에 들어가 봤지만 뭔가 음식이 맘에 안 드는지 두세 번 자리를 옮겨 다녔다.
다리를 건너 테라스가 있던 음식점 겸 바였는데,
대부분 밖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해가 지고 빠르게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밤이면 추워지기도 하고, 안으로 들어가 식사 주문을 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현실에서 내 또래인 외국인 친구들(키 크고 눈이 파란 잘 생긴 외국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닌 트루먼쇼를 찍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 혹시 내가 모르는 유명 연예인이 언더커버로 신분을 숨기고 영화나 TV쇼처럼 리얼리티를 찍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들의 직업도 여러 일을 하는 “노마드”라고 하고 하고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
인생은 누군가 펼쳐놓은
연극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내가 모르는 인생의 대본이 있어서 신이라 말하는 연출가의 큐사인에 맞춰 움직이는 무대일지 모른다.
지금 걷는 산티아고 길을 우연히도 마주친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친구가 되었다니!
나는 오랜만에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밥을 시켜 먹었다.
이 음식점이 어딨었는지 찾는데도 한참을 베로니카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카드로 계산하지 않은 곳은 구글 지도와 검색만으로 음식점을 찾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아담은 이곳에서 파는 PATATAS BRAVAS(파타타스 브라바스) 웨지 감자에 케첩과 마요네즈 범벅을 한 이 음식을 두 번이나 시켜 먹었다.
유럽 음식은 늘 배가 안 찬다며 말이다.
베로니카는 채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먹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담은 요즘 미국에선 chat GPT를 활용해 시간 활용을 하고 번역을 알아보는 게 얼마나 편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나 역시 최근에 공부하고 참여하게 된 NFT덕분에 미디어 아트와 Ai 아트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찰나에 구색이 맞아떨어지는 티키타카 수다였다.
그 와중에 아담은 추가 주문을 위해 웨이터를 부르기 위한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우물쭈물 고민 중이었다.
스페인은 호칭을 부르는 부분에서 남자는 “세뇨르” 하나이지만 여성들에게는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 그리고 통틀어 부르는 호칭이 다르기 때문에 정말 고심해서 우리는 웨이터를 불러야 한다.
señora세뇨라(나이 든 여성)
Senñorita 세뇨리따(아가씨)
¡Que tal! 깨딸! (저기요! 혹은 어떻게 지내세요?)
한참을 고민을 하다 스페인어로 주문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보름달 직전의 큰 달이 하늘 위에서 은은하게 달빛이 물가에 반사된 밤풍경이 낭만적으로 보였다.
아빠가 없는 첫 추석이 다가온다.
이곳에 와서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무너지고 새롭게 개편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순례길의 밤은 몸이 고되고 주머니는 가볍지만,
길을 걸으며 나와 화해하고 대화하며 나만의 길을 찾기를 희망해 보았다.
두둥실 뜬 밝은 달이 유독 크게 보였다.
우리는 9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다들 잘 준비 중인데 여전히 한국인 모녀는 짐을 싸고 있었다.
불을 켜놓고 짐을 싸고 있는 건은 아닌 거 같아서, 내일 8시 전까지만 갖다 놓으면 된다 안내를 해드렸다.
한 번도 동키를 써보지 않았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쓰는 도미토리 방에서는 9시에는 보통 불을 꺼야 하니 만약 길을 준비하는 예비 순례자라면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기본적인 에티켓이니까.
베로니카와 아담은 하루를 더 쉬었다가 로스 아르고스를 걷고 로그로뇨에서 기차를 타고 레온까지 가서 다시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 단축을 위해 앞으로 펼쳐질 사막 구간을 간주 점프하듯이 뛰어넘는 순례자들이 꽤나 많았다.
내일은 Los Arcos까지 21.5km를 걸을 예정이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