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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Jul 11. 2024

불안과 마주하기

로스 아르고스 가는 길

과거는 상관없어 아프긴 하겠지

하지만 둘 중 하나야

도망치든가 극복하든가

-라이온 킹



로스 아르고스 가는길



2023년 9월 26일 새벽 6시 기상


밤새 터뜨린 물집으로 욱신거리다 진통제 알약 하나를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일층에서 주무시던 동유럽 부부와 챌린지 청년 양군은 새벽 5시에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자리가 비었다.

남은 사람은 나와 한국인 모녀뿐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한국인 모녀 역시 밤새 뒤척이다 잠을 설쳤다며 아침 수다를 잠깐 떨었다.

아마도 나의 느슨한 걷기를 대하는 태도가 영향을 준 듯했다.


힘들면 배낭을 보내고 천천히 걸으라는 것 말이다.


그렇게 우리 셋만 방에 남아 천천히 느린 걷기를 준비했다.

우리 세명만 몸집이 작은데 몸집이 컸던 세명만 쿨쿨 코를 골며 잘 잤던 것 같다.


7시 51분 드디어 출발 카푸치노 알베르게도 안녕이다.

오늘은 아직 숙소 예약을 안 해 놓은 상태였고, 일단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에스텔라 카푸치노 숙소 근처에는 데카트론 매장이 있었다.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미리 이곳에서 구매할 계획을 세우고 와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푸엔테 때처럼 마을을 관통해 가면서 카페가 보이는 곳이 아니라 카푸치노 알베르게에서 바로 산길로 빠져나가는 루트였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냥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입구에서 한국인 가톨릭 관광객 무리들이 나와 동선이 겹치며 함께 잠깐 걷게 되었었는데 어떤 어머니 신도분이 나에게 오시더니 등산 스틱 한 개를 건네어 주려고 했다.


아마도 내가 피레네에서 구했던 지팡이보다 등산 스틱이 훨씬 낮다고 생각하며 카미노 정신으로 나눠 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감사하지만 이 지팡이로 만족한다고 사양하고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의 바르고 정중한 다가옴이 오늘 아침을 기분 좋게 열어주는 것 같이 느껴져 타는 발뒤꿈치 고통 보다 오늘 21킬로 미터를 더 잘 걸을 에너지로 차오르는 듯했다.


에스텔라를 빠져나가는 산길 내내 새벽부터 강아지들과 아침 산책을 하는 현지분들과 “Buenos Dias(좋은 아침)”라고 인사를 하며 길을 지나갔다.


한국은 눈을 마주치면 누가 이기나 눈싸움이 일상인데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문화가 너무 좋은 것 같다.

어릴 때만 해도 누구나에게 인사를 건네던 시기가 있었는데, 사라져 가는 문화가 아쉽다고 생각한다.


아침동선
Hotel Casa Luisa 아침


아침 식사 8시 22분

빵오쇼콜라+카페 아메리카노:2.90유로


삼십 분 정도 숲길을 걷다가 Estella에서 Ayegui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카페를 발견했다.

Hotel CASA LUISA에 멋들어진 카페테리아와 반고흐 그림에서 봤던 나무들이 있어서 앉아서 해 뜨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여유롭게 순례길의 아침을 즐기기 딱 좋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빵오쇼콜라와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테라스에 앉아 아침식사를 여유롭게 즐겼다.

길을 걸으며 이런 호사도 못 누리며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 길은 혹사라고 생각한다.


아침 길 1킬로미터를 돌파하고 길목에 있던 카사 루이사 호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커피냄새를 참고 지나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를 스타트로 꽤 많은 순례자들이 앉아서 아침을 즐기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아침 시간 모여 떠들어 대는 새들의 지저귐이 즐거울 정도로 아침 볕이 아름답게 빛났다..


아예구이 대장간 품경과 기념품 구매
아예구이 대장간 풍경



Ayegui 대장간

Ayegui 마을 초입의 카사 루이사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마을의 끝자락에 아예구이 대장간이 나타났다.

Ayegui를 빠져나가는 다리를 지나면 산길 바로 앞에 나타나는 아예구이 대장간은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생긴 아름다운 대장간이다.


순례자 표식의 조개와 호리병 지팡이 기념품을 직접 망치질로 만든 기념품이 있다.

이곳에서 기념품을 보고 있던 안나와 다시 만났다.

그리고 조셉 아저씨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대장간 안을 한참을 구경을 하고 기억에 남기고 싶어 순례자 여권에 대장간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조개 모양 기념품도 부담이 안 가는 크기로 5유로짜리 조개펜던트를 한 개를 구매했다.


Irache 와이너리 앞


Bodegas Irache와인 공장


길 초입은 참 구경거리 많고 체험할 것들이 많게 빠르게 지나갔다.

이곳은 순례길에 대한 관심이 있어 찾아봤다면 누구나 알만한 곳이다.

와인 공장과 농장이 길 입구서부터 성처럼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포도가 발효되고 있는 콤콤한 포도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을 했다.

그리고 다들 즐거워 보이게 기념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가져온 패트나 컵에 와인을 담아 마셨다.

와이너리에서 순례자들에게 와인을 베푸는 전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불교의 보시처럼 지나가는 순례자를 귀인으로 여기며 했던 전통 같다.


나는 가지고 온 실리콘 컵에 와인을 담았다가, 성에 안 차서 페트병에도 추가로 담기 시작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욕심만 많다.)


병째 담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이안이 나를 보고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지천에 널린 포도밭까지 풍요롭고 기분 좋은 곳이다.



첫 번째 갈림길

이 지점에서 루퀸으로 지나는 순례길 변형 루트가 시작한다.
공식 루트와 비교했을 때 거리가 훨씬 짧고 그늘이 더 많다는 점이 있으며, 도로와 포장된 길 대신 흙길을 지나며 이용할 서비스는 적다는 점이 있다.

빌라투에르타에서 에스텔라를 거치지 않고 사라푸즈를 경유하여 오는 순례자는 루킨 변형 루트를 계속 따라갈 수 있고, 혹은 이라체 주변 지역으로 이동한 후 아즈케타와 빌라마요르 데 몬자르딘을 경유하는 전통 루트를 따라갈 수도 있다.
Buen Camino app 자료 발췌


와이너리를 지나자 순례자들이 화살표시 앞에서 웅성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무슨 일이죠?

순례자들:두 가지 길중 한 개를 선택해야 해요!

왼쪽은 빠르지만 숲길이고

오른쪽은 느리지만 마을을 둘러가는 길이에요.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마을 길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화장실과 식사 때문이었다.


화장실과 식사 그리고 잠자는 것은 나에게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심을 벗어나 고요한 길을 누릴 여유는 아직까지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후에 에스페란자는 대안 루트를 선택하여 아주 고요하고 조요한 산길을 걸었다며 후기를 전해 줬었다.


일반루트에서 슈퍼마켓에서 점심


점심 11시 7분 Markiola 슈퍼마켓

일반 루트로 들어와 슈퍼마켓에서 인스턴트 파스타 샐러드를 먹으며 안나와 다시 마주쳤다.

안나에게 혹시 숙소를 구하셨는지 여쭤 보니 안나는 늘 항상 예약을 다 마쳐놓는다고 하셨다.

로스 아르고스에 “알베르게 라 푸엔테 카사 데 오스트리아“ 숙소였다.

나는 시간대도 예약을 받을 수 있는 시간대라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번호를 검색 후 바로

전화 예약을 했다.


나: 오스트리아 알베르게죠?

주인장: 안녕하세요. 오스트리아 알베르게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지금 로스 아르고스로 걷고 있어요.

침대 한 개 예약할 수 있을까요?

주인장: 그럼요. 몇 시까지 오시죠? 3-4시 넘어서 안 오시거나 연락이 없으면 자동 취소 되는 점 알고 계세요.

나: 그럼 숙소에서 만나요. bye.


안나는 기특해하는 엄마 표정을 하고는 또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마지막 식수대


슈퍼마켓이 있는 Villamayor de Monjardin이후에 더 이상 마을이나 식수대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식수대에서 물을 채우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빌라마요르에서 로스 아르고스까지 대략 12킬로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내 걸음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략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렇다면 3시에서 4시에 도착을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걸음을 걸을수록 급한 마음이 점점 내 머릿속을 꽉꽉 채워 불안이 나를 잠식해 버렸다.


길을 걷다 다시 마주친 한국인 모녀도 다른 지인들도 보이지가 않고 나는 거의 5킬로 넘게 배낭을 멘 채 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11시 오픈 시간에는 잘 받았던 숙소는 몇 번을 전화를 해도 바쁜지 연락이 통 되질 않아 나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중간에 아침에 나와 여유 있는 걷기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은 어디 가고 다시 길에서 마주친 나는 조급한 마음에 냅다 달려가는 뒷모습만 그들에게 비추며 빠르게 뛰어가기 급급했다.


정말이지 이 “시간 강박”은 언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인사이드아웃2 불안이의 폭주


나는 도무지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을 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겪었던 트라우마들이 집합되어 이곳에서 나는 내 안의 불안과 마주하게 됐었던 것 같다.


유럽을 오기 전 엄마의 보이스피싱 사건부터 아빠가 돌아가시기 한 달 동안 주말 내내 아빠의 상태를 살피며 주말마다 아빠가 있는 원주로 내려가야 했다.

일어났던 일 들 모두 날이 서있어야 하는 응급상황이었다.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임에도 나는 내 안의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 심리 상담을 받았을 때 느꼈던 건데 상처는 절대 묻어두면 아무는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곪아서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덧나기 일수이다.

상처를 받았던 그때 그 상황으로 똑같이 회귀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저 회피하던 그곳에 그대로 있었을 뿐이다.


정면 돌파 만이 치유의 답이다.


볼드모트가 열개의 영혼을 분리했듯이 나의 그때 당시의 자아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방치된 채

그대로 홀로 서 있었다.

그곳에 어린 시절 등 돌리고 숨어 있던 내면아이가 순례길에서 내 눈에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길을 걷는 내내 나를 자책하고 강박에 휩싸여 아침 시간 누렸던 여유는 갖다 버릴 만큼의 불안에 휩싸인 채 소용돌이처럼 바람을 잃으키며

산티아고 길을 뛰어서 로스 아르고스에 도착을 했다.


딱 4시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강박과 그간의 약속을 놓치거나 늦어서 잃어버린 기회들이 한꺼번에 내 머리 안을 뒤집어 놓아 이 여유로운 산티아고 길에서 까지 식중독에 이어서 머리까지 뒤집어놓다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안의 나와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또 도망쳤던 건지도 모른다.


로스아르고스에 도착했을 때 기어코 안나에게 왓츠앱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 안나 저 이제 로스 아르고스예요.

안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들은 너를 알고 있어. 제발 진정해!!!!

나: 그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늦을 것 같고,,,, 그러니까 주저리주저리


사실 길에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게 무례하게 선을 넘는 것인데, 나는 이곳에서 안나에게 나 스스로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숙소에 도착해 내가 얼마나 많이 전화를 했는지 호스트에게 알리니 너무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며 스페인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걱정하지 말란 표정으로 해프닝이 끝이 났다.


서양사람들은 선을 지키는 매너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이번일로 안나와 친해질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이 모든 해프닝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나는 비로소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 안의 나):조금 늦으면 어때?

미뤄도 돼?

숨 쉬어! 제발

천천히 가도 돼!

누가 쫓아오니?


로스 아르고스 입구에 앉아서 쉬고 있던 스티브와 에스페란자를 마주쳤을 때 그들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에스페란자와 스티브:

전화를 안 받고 예약이 안 돼있음 다른 숙소를 가면 되지 않겠니?

스페인 사람들은 늘 친절하지 않아.

그냥 이곳에 앉아서 조금 쉬는 게 어때?

숙소 따위 다른 곳을 찾으면 그만이야.

우리는 로스 아르고스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다음 도시인 산솔에 머물 예정이야.


인사이드 아웃에 나온 불안이 가 내 머리를 잠식하고 완벽하게 4시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은 다른 것들을 할 수 없고 즐길 수 없게 만들어 버렸는걸…


내가 얼마나 살면서 내가 정한 규칙과 규율에 얽매여 살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실수투성이에 느린 아이였던 나에게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대하며 일상이 나도 모르게 카미노 길에서 조차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단 걸 나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괜찮다.

괜찮다.

천천히 가자!



불안도 결국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감정이다.



Albergue La Fuente Casa de Austria


순례길을 걸으면 나와 마주하는 순간들이 나올 거라더니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뜀박질로 땀에 절어서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숙소로 들어가 침대 배정을 받았다.

7일 차라 익숙해졌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길은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zubiri 가는 길에서 속을 비워냈고, Los Arcos 가는 길에서 내 안의 불안과 맞이하며 뛰었던 뜀박질 덕분인지, 숨 가쁘게 뛰어온 길에서 나는 숨 가쁜 불안을 털어놓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이제 짐을 풀고 좀 쉬어야겠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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