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 가는 길
산토도밍고 대성당 수탉의 기원
1158년 건설되기 시작한 건물의 기념비적인 가치와 함께 암탉과 수탉이 있는 닭장은 꽤 흥미롭습니다.
닭장 기원은 성 도미니크가 억울하게 정죄받은 청년의 생명을 구한 기적에서 시작됩니다.
마을 시장은 식사 중에 그 청년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놀란 그는 자신이 먹고 있던 암탉이 살아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바로 암탉이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서 구워진 암탉이 노래했다”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Buen Camino app 자료 중-
9월 29일 밤 숙소 안
1인실 방 안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려고 코드를 돼지코에 맞춰 꽂았는데 이게 웬걸
코가 맞지 않아 충전이 안되었다.
조금 콧구멍이 작다고 해야 하나?
신기하게도 문 밖에 통로에 전기코드는 맞는 게 아닌가?
게다가 창문이 꽉 닫히지 않았던 프랑스식 높은 창문은 꽉 닫히지 않아서 그 사이로 모기 한 마리가 들어왔다.
코 고는 소리나 사람들 소음은 없었지만 나는 연달아 이틀을 잠을 못 자게 된 것이다.
9월 30 새벽 6시
어제저녁 식당에서 우리는 6시 30분 함께 걷자는 제안을 했었다.
나는 겨우 2~3시간 잠이 든 게 다였다.
더 이상 잔다면 나는 아마 더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무겁게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마쳤다.
부지런한 스티브는 일찍 밖으로 나간 듯 보였고, 임마뉴엘은 왓츠앱으로 연락을 보내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에게 온 답은 일찍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볼 수 있다면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잘 지내! 임마뉴엘
언제 뜨겁게 햇살이 떨어졌냐는 듯 새벽공기는 스산하고 차가웠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아 환하게 어둠을 밝히는 달빛에 알베르게 마당에 작은 분수의 물줄기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일찍 나오기는 론세스바예스 이후에 처음이다.
아침식사 Bar Sevilla
스티브는 일찍 와서 미리 아침식사를 마쳤다고 했다.
나는 빵 오 쇼콜라와 카페 아메리카노를 먹고 임마뉴엘 소식을 스티브에게 전했다.
고맙게도 스티브는 아침식사를 사주셨다.
더운 날씨에 우리 모두는 지친 상태라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부터 오전 해가 가장 뜨거워지기 전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헤드렌턴을 켜고 밤길을 걸을 땐 잠에서 덜 깨서인지 아니면 새벽의 기운 때문이지 모르겠으나, 뭔지 모를 힘이 평소 걸음보다 2배는 빠르게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의 기적이라는 말처럼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미라클 모닝”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헤드렌턴과 별만 보며 앞길을 가다 보니 우리는 정말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 놓게 된다.
어쩌면 길이 무서워서 그럴 수도 있고, 스티브와 1:1로 제대로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이번길이 처음이었다.
속마음
인간관계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20살 때 이혼을 하셨다.
스스로 그 이혼을 말로 꺼내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었다. 그런데 굳이 이 먼 타지에서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내 안의 짐으로 남겨놓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본연의 나로 두 발로 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간의 미움과 원망이 다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 같기도 하다.
스티브에게 아빠의 부고 사실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보다 나의 더 과거에 대한 산토도밍고를 가는 길에서는 먼저 꺼내 나왔다.
그렇게 적절한 시기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털어낼 수 있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당시 이혼 과정을 실오라기 하나하나 지켜봐야 했고, 이혼 자체가 쉬워졌다고 하지만 인연의 끈을 끝는것은 결국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혼을 함께 겪는 것이다.
영화 “Catch me if you can”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시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이 분열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나에게 이 영화의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이야기보다 여리고 미숙한 한 영혼이 길을 헤매고 방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면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헛된 착각 속에 어느 어른 하나 위로의 말조차 건네주지 않아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깜깜한 새벽길에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길을 걷는 내내 개인사를 쏟아냈다.
스티브는 고등학생 딸과 대학생딸 2명이 있다고 했다.
그 역시 이혼을 했지만 딸들과 친구처럼 잘 지낸다고 했다.
스티브: 부모님 이혼을 받아들이는데 힘들었니?
나: 이해는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는 아팠어요.
원래 익숙했던 자리가 비워지고 나서의 충격은 더욱이 크기 마련이니까.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면서 이혼이 무엇인지 나는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은 결혼 생활 그리고 더욱이 서로 존경과 사랑이 넘쳐도 유지가 어려운 결혼생활에 사랑보다는 내 눈에 각자 자신들만 보였었다.
이혼 과정과 함께 그 과정을 겪은 입장에서 자녀에게 앞으로의 가치관과 배우자를 고르는데도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20대의 나는 긴 시간을 슬픔과 방황의 시간으로 꽉 차 개인적인 아픈 가정사들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길을 걷는 내내 묵묵히 들어주던 스티브가 큰 오빠처럼 의지가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너는 괜찮니?
힘들지 않니?
내가 앉아 줄까?
하는 위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어둠이 깔린 바다 위 파도도 바람도 없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느낌이었달까?
온몸으로 슬픔과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주변에 지천에 널린 포도밭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잘 맞는 것이 있다면 먹는 취향이겠지?
눈치 볼 필요 없이 포도를 한 움큼 따서 먹으면 수분을 섭취했다.
혼자 걷는 것의 장점은 걷던 곳의 새소리, 지나가던 순례자, 익숙하지 않던 풀벌레들, 대화를 나누느라 챙기지 못한 주변 환경에 소홀해져서 길을 한참을 걸으며 내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일출풍경이 하루가 시작됨을 알렸다.
뒤이어 줄줄이 따라오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아조프라를 한참 지나 Cirueña까지 일렬로 걷는 길들이 이어졌다.
조건
우리는 걸으며 직접 요리를 해서 먹자는 이야기를 곧잘 했지만, 같이 걷는 기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티클 같은 조건이라도 조건을 찾으며 걷게 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그라뇽 이라는 도시까지 가는 게 계획이었으나, 1시가 다 돼가는 시간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전화예약을 하기 위해서는 호텔이 예약을 여는 10시 이후에 전화를 거는 게 좋다.
11시 즈음 잠시 카페에 앉아 안내앱에서 말하는 숙소들에 전화를 돌려 예약을 잡았다.
여기 산토 도밍고는 마을 들어가는 초입부터 이 도시가 산티아고 순례객에게 중요한 도시라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정오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 뜨겁게 열기를 뿜어댄다.
우리는 임마뉴엘이 추천한 산토도밍고 대성당 구경과 짐을 풀기로 했다.
albergue Cofradia del Santo
전화통화 당시 분명 개인 방이 있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공립 알베르게로 사람이 많고 규모가 큰 곳이라 모두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1인실 숙소는 없고 전화 예약만 받았던 것이었다.
막상 도착해 순례자들이 대기 중인 줄을 함께 서고 체크인을 받자 일인실 방이 없다는 걸 알고 예약 취소와 환불을 받았다.
이곳은 유서 깊은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로서 마을 광장에 자리 잡은 숙소는 이동하기에도 좋은 곳이긴 했다.
상태가 좋았다면 나는 이곳에 저렴하게 묵었을 것이다. 13유로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단 것은 순례자의 특권이니 말이다.
나는 어젯밤도 잠을 설친 상태라 한계치에 다다랐다.
결국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숙소를 물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숙소들은 예약이 풀로 꽉 찬 상태라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산토도밍고 관광정보 센터
스티브는 information certre에 가보자고 제안을 했다.
안내원은 친절하게 숙소 중에 조용하면서 괜찮은 곳이 있다며 숙소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우선 여행안내 센터를 나와 잠시 근처 카페에서 머리를 식혔다.
스티브는 나에게 커피와 크루아상을 매겼다. ㅋㅋㅋ
잠을 못 자고 더위에 머리가 익으니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었나 보다.
빨리 쉬고 싶단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뒤에서 든든히 챙겨주는 스티브였다.
일종의 수녀원과 호텔을 겸업하고 있는 돌로 지은 건물이다.
내부로 들어가니 눈뜨기 힘든 바깥과 달리 돌집이라 무지 시원하다.
아조프라로 가는 길 아몬드 나무에서 아몬드를 깨 먹으며 만났던 콜롬비아 순례자와 함께 걷던 독일인 순례자 샬롯이 프런트에서 스페인어밖에 못하는 호호 할머니 수녀님께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샬롯은 딱 일주일 휴가를 내고 패키지로 짧게 걷고 있다고 했다.
수녀님은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공무원처럼 아주 아주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시며 체크인을 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연세가 많은 할머니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의 느린 처리방식에도 어느 하나 재촉하거나 화를 내는 이들은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재밌었던 것은 이 많은 인원중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독일인 샬롯뿐이었던 것이다.
샬롯은 나와 스티브가 체크인을 마칠 때까지 체크인을 돕느라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와 스티브는 각자 1인실 방을 신청했는데 커플로 오해하고는 2인실을 카드로 끊어 주시곤 수녀님은 어쩔 줄 몰라 두 손을 머리에 올리며 얼굴이 빨개지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순수해 보였다.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고는 카드를 취소하지 말고 현금을 추가로 더 내고 샬롯의 도움을 받아 체크인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수녀님: 아침과 저녁 식사를 할 거니?
나와 스티브: 아니요. 안 먹을 거예요.
Private room 13시 13분
예약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로 올라갔다.
세상에!
엘리베이터라니!!!
이런 호사가 있나?
생각해 보면 1인실에 38유로니까 서울물가와 비교해 보니 얼마 안 하는 돈이었다.
일상이 삶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호사가 이곳에서는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함이 절로 생긴다.
이것이 바로 산티아고의 기적이다.
한 달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비싼 돈일 수 있지만 하루의 충전이 앞으로 길에 큰 효과가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숙소배정을 받고 스티브와 나는 시에스타를 취한 후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스티브 역시 눈이 벌게져서 쉬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후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매일 부직포 시트와 공동화장실과 샤워실, 벙커 침대에서 여럿이 잠들다가 오래간만에 진짜 면시트와 솜배게 그리고 조용히 잘 수 있는 1인 침대와 개인 화장실과 옷장까지 어찌 보면 일반 관광객으로서는 작은 비즈니스호텔 정도의 평범한 숙소가 순례자 입장에서 이런 방을 투숙하려니 뭔가 작은 사치를 부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에스타
2시에서 4시경에는 건물 창틀에는 차양막이 해를 막기 위해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촘촘히 달려 있다.
이 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창문을 벽 안쪽으로 배치해서 비나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설계인 것 같다. 게다가 한국처럼 시스템 창호와 방충망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문화재에 손상이 갈 수 있다.
방 안쪽에 차양막을 조절하는 끈이 있어서 조정이 어렵지는 않다.
빨래
나는 방에 들어와 개인 화장실에서 아주 천천히 샤워를 마치고, 뜨거운 태양에 얼른 빨래를 말리고 싶었다.
땀에 절었던 레깅스를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탈수를 했지만 힘이 부족했는지 나무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물이 흥건해져서 나는 레깅스와 양말을 창을 열어 난간에 널어뒀다.
그런데 물에 젖어 있던 빨래가 무거웠는지 레깅스가 지붕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상황과 건물 지형을 빠르게 확인해 보니 창문이 앞에 있는 방으로 떨어진 걸 확인하고 위치 사진을 찍어서
계단으로 내려가 먼저 떨어진 곳 위치 파악을 마친 후,
대처할 수 있도록 프런트로 향했다.
레깅스가 떨어진 지붕 쪽 방은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숙소 형태가 매 층마다 다른 배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매번 방에 들어갈 때마다 길을 헤매었다.
프런트에는 여전히 호호 할머니 수녀님이 지키고 계셨다.
나는 옷이 떨어진 위치와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수녀님은 영어를 잘하는 남자 매니저분을 불렀다.
수녀님과 매니저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나를 데리고 지붕이 있는 1층으로 향했다.
1층 응접실 방문을 열고 지붕 위치가 있는 창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창밖으로 나가서 조심조심 지붕을 디디고 레깅스를 가져왔다.
수녀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썽쟁이 꼬마' 보듯이 나에게 손짓하며 무작정 따라오라고 손짓하셨다.
2층 빨래를 널어놓은 테라스 공간이 나왔다. 그러곤 여기에 빨래를 널라며 알려주시곤 아까처럼 이마에 손을 짚더니 한숨을 쉬시곤 다시 프런트로 돌아갔다.
언어 소통이 안되니 빨래 건조 장소 위치도 설명이 안됬었던 것이다.
스페인여행 시 스페인어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 세이야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세이야 커플이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세이야와 나는 반갑게 프랑스식 인사 비쥬를 했다.
나: 잘 지냈어요?
근데 더 멀리 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왜 여기에 있어요?
당신을 만나니 너무 반갑네요.
여기 숙소 괜찮은 거 같아요.
개인룸을 묵는데 가격도 괜찮고 서비스도 좋아요.
세이야: 잘 지냈어요?
여자친구가 중간에 합류해서 함께 걷느라 늦어졌어요.
숙소도 여자친구가 예약해 둔 곳으로 온 거예요.
나는 당신이 잘 걷고 있을 거라 믿었어요.
당신은 강해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세이야 여자친구(Maud)는 귀가 어두운 호호 할머니 수녀님과 체크인 확인을 하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에 그간의 해프닝들까지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지려는 찰나 여자친구는 세이야를 불렀다.
여자친구: 세이야!
체크인해야 해!
여권 가져와 줄래?
바쁘게 체크인 중인데 옆에서 모르는 여자와 수다를 떨고 있으니 덥고 지친 와중에 목소리가 올라오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15.5km밖에 걷지 않았었기 때문에 씻고 빨래까지 했는데도 한 낮이었다.
점심도 아직 먹지 않은 상태라 허기가 몰려와 나는 다시 산책 겸 프런트로 내려왔다.
프런트에 마리앤이 있었다.
프런트에 내려올 때마다 연극의 새로운 막이
열리고 연극의 무대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체크인 1장, 레깅스 2장, 세이야 3장, 마리앤 4장
우리는 늘 잊을만하면 서로 길에서 종종 마주쳤고, 안나가 없지만 마리앤을 만나 반가움에 서로 인사를 나눴다. 마리앤은 젊은 흑인 수녀님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나는 배도 출출하고 산책 겸 나갈 예정이라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왔다.
Restaurante La Gallina que canto 15:30
대성당 쪽으로 다시 가서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씨에스타 시간이라 마땅히 열려 있는 음식점들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알베르게 옆 대성당 구경을 마치고는 성당 한가운데 위치한 광장 테라스에 앉아 산티아고 메뉴를 주문했다.
사람은 너무 많은데 비해 주문받는 웨이터는 단 2명밖에 안 됐다. 정말이지 불친절해서 사실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사항이 없었다.
웨이터는 메뉴판과 음식을 던지듯이 세팅해서 모두를 언짢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듯했다.
음식은 아주아주 느리게 나오기 시작했고 식사를 하는 중 안나가 나타났다.
안나는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친구 만나듯이 내 테이블에 합석해서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마치 원래 있던 친구처럼 말이다.
우리 사이는 그렇게 편안하고 여유로워졌다.
안나에게 나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한 적은 없지만 인간적으로 서로 잘 맞는 사이였다.
나와 안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마리앤이 같은 숙소에 묵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서빙하는 웨이터는 처음에는 인종차별이 아닌가 지켜봤으나 그냥 모두에게 불친절했다.
안나는 함께 앉아 있던 곳의 위치가 해가 정면으로 들어서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웨이터가 너무 불친절해요.라고 말하며 소곤거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기 광장 테라스에는 유독 내 귀에는 한국인 순례자 관광객 무리들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유서 깊은 관광지인 만큼 산토도밍고 데라 칼자다에 시에스타 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과 순례자들 뿐이다. 여기 사는 주민들 집에는 모두 차양막이 닫혀 있고 시에스타 시간에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 웨이터가 시에스타를 못해서 화가 났다고 말하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나는 안나를 보내고 맥주를 홀짝이며 일광욕을 즐겼다.
신비로운 브라질 순례자
레스토랑 맞은편 음식점에 낯익은 얼굴의 브라질 순례자가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혼자 걷던 여자 순례자였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순례길은 남자에 비해 여자 비율이 훨씬 적다.
은발에 왼쪽 팔에는 “옮”이라는 네팔 불고 문양의 만다라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유럽의 산티아고 길과 옮 문양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나는 그녀를 인상 깊게 봤었다.
늘 혼자 걷는 그녀의 모습이 슬프고 고단해 보임에도 늘 자신만의 걸음을 걷고 있었다.
가끔 가다 만나는 혼자 걷는 순례자들 중에는 유독 이렇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뿜으며 걷는 순례자들이 있는데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이 튀어 올라 혹시 순례자들 사이에 함께 걷고 있는 천사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한데..
이분은 브라질 포르투갈 말과 스페인어 정도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대화가 되질 않았다.
우리는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언어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Dia 슈퍼마켓
나는 식사를 마치고 근처 Dia 슈퍼마켓으로 길을 향했다. 휴식시간이지만 마을을 다 돌아다니자면 하루 1만 보는 기본으로 걷는 게 순례자들이다. 버스로 갈 거리의 대부분을 자연스럽게 걷는 게 일상화돼서 그런 것 같다.
숙소가 부엌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을 정도로 큰 마트였다.
과일과 비상식량을 추가로 사서 쟁여놓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정말 만날 사람은 다 만난다더니 슈퍼마켓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모퉁이를 지나다 우연히 호주 순례자 크리스 아저씨를 만났다.
이분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런 식의 우연이 반복되었고, 우리는 드디어 이곳 산토도밍고에서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크리스 아저씨는 전 세계 여러 곳을 여행을 다니는 분이었다. 한국도 여러 번 여행을 왔다고 했다.
게다가 호주 사람이면 나에게는 제2의 고향 친구처럼 반가웠기 때문에 더 정감이 느껴졌다.
늘 항상 나를 응원하고 친절하게 받아 주셨어서 여기 산토도밍고 데라 칼자다부터 기억이 남아있다.
우연히 만난 길에서 What’s app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순례길 동안 간간히 서로의 위치를 주고받으며 소식을 주고받게 되었다.
점심을 2시 넘어 먹고 돌아다니다 보니 저녁시간이 다되어 갔다.
늦은 점심은 배가 쉽게 꺼지지가 않는다.
정말 이 모든 인연이 점심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이렇게 한 곳에서 만날까 싶을 정도로 반가움의 연속이다. 모든 인연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이 아님에도 아직 길의 초반이라 모두에게 더 열려 있었을지 모른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진짜 시에스타 시간을 가져야겠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