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도밍고 데라 칼자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새벽 6시부터 시작한 하루는 마치 삼등분해서 하루를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스티브에게서 문자가 왔다.
마을 외곽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 그늘 분수대에서 (Hermosilla Garden)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거기까지 간 거지?)
내가 있는 Dia 슈퍼마켓에서 스티브가 있는 곳 까지는 구글 안내와는 다르게 출구가 없는 골목들이 꽤 있기 때문에 정말 삥 둘러서 슈퍼를 들렀다.
숙소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스티브에게 가야 했다.
음… 쉬려고 했는데 어찌 된 게 한시도 못 쉬고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스티브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심 이후 휴식을 가지기 위해 외곽으로 빠져나간 듯했다.
시에스타라는 기준은 뭔가 하루를 오전 오후가 아니라
새벽에서 오전, 점심에서 씨에스타 그리고 저녁에서 밤으로 삼등분된 느낌을 주었다.
1. 새벽 시간 걸었던 아침의 하루
2. 점심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씻고 정리를 했던 오후 시간
3. 5시부터 저녁시간까지가 나의 세 번째 하루의 시작이었다.
스티브가 있는 Hermosilla Garden으로 들어갔다.
듣도 보도 못한 새소리와 부서질듯한 태양이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게 할 만큼 뜨거웠다.
보통 현지인이나 관광객들은 동네에서도 걸어 다니기보다는 버스나, 자전거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비해 순례자들은 걷기가 몸에 붙어서 5킬로 내외의 모든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 다니게 되는 게 자연스러웠다.
평상시 문명인으로서 온갖 편리한 기기들에 익숙해져서 살다가 그 정보들을 사용하지 않고 걷기 시작하자
두발에 의지해 동네를 파악하고 냄새와 걸음을 기억하는 게 익숙해졌던 것이다.
스티브와 나는 이틀을 함께 걸으며 아직까지는 괜찮은 합을 내고 서로 배려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몸상태와 속도이다.
나:
만약 함께 걸을 때 제가 너무 느리거나 스탭이 맞지 않는다면 바로 얘기를 하고 길을 먼저 가셔도 돼요.
스티브: 오케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좋은 분이고 함께 걷는 것에 익숙해질 만큼 나쁘지 않지만,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다.
하루 12시간 중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붙어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문화적으로 서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어렵게 온 유럽에서 자신만의 까미노를 망치는 추억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
스티브가 간식으로 샀던 마트용 빵을 함께 뜯어먹으며 앉아서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걸 구경했다.
레스토랑이 문을 열려면 6시가 넘어야 할 것이다.
걸을 때 발이 아파했던 스티브와 성당 앞에 있던 스포츠샵에 가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샌들과 트래킹 슈즈들을 구경했지만, 스티브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눈치였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사고 싶었던 인다스 인솔을 구매했다.
우리는 충혈된 벌게진 눈으로 돌아다니다 다시 공원 쪽으로 돌아오니 음식점들이 삼삼오오 문을 열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기름진 빵을 먹고 배가 고프지 않아서 둘러보던 카페 메뉴에 있던 블루베리 파르페를 먹겠다며 이때까지는 신이 난 눈치였다. 나는 이곳에서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만드는 제대로 된 빠에야를 먹고 싶었다.
내가 여태껏 길에서 먹은 빠에야는 인스턴트용이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노란 불빛들이 켜지고 나자 마을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르누아르 물랭 드라 갈레트의 무도회]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예쁜 파라솔들이 펼쳐지고 야외 테라스들이 줄지어 늘어선 카페와 노란 천막 스타일의 야외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파르페를 판매하던 카페테리아에 앉아 '파르페와 빠에야'를 주문했다.
¿빠에야와 볶음밥의 차이?
빠에야는 전면에 불이 닿을 수 있게 평평하고 고루 열 전도율이 갈 수 있는 냄비요리이다.
1. 빠에야는 닭, 돼지, 소고기류의 육류를 볶다가 기본 육수 베이스를 넣고 오랜 시간 저어주면서 집에 있는 여러 야채들과 각종 서양 허브를 넣고 은근하게 조린다.
2. 고기들이 다 익으면 이제 생쌀과 샤프란, 스튜 국물을 넣고는 자박하게 함께 익히다 못해 바닥에 누룽지가 될 때까지 밥을 익혀야 한다. 샤프란 때문에 우리가 봤을 때 익숙한 노란색 빠에야가 완성된다.
3. 그에 비해 볶음밥은 조리가 다된 고기와 야채를 달달 볶다가 소스를 넣고 마지막에 밥을 넣어 함께 볶아서 함께 먹는 요리이다.
결과물은 비슷하지만 나는 왠지 조리법을 들었을 때 닭볶음탕이나 즉석떡볶이를 먹고 난 후에 먹는 볶음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쌀을 넣기 때문에 좀 더 요리의 풍미가 쌀이 밥이 코팅되면서 간이 자연스럽게 배이는 것 같다.
한국에 살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볶음밥과 빠에야의 맛도 그렇고 식감까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일단 배를 채우는 것이 먼저였지만 한국에 돌아와 빠에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긴 한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까 숙소 비용을 59유로를 카드대금으로 냈기 때문에 스티브는 나에게 21유로를 현금으로 건네주었다.
그 돈으로 빠에야를 사 먹으면 될 터였다.
테이블에는 팜플로나 때부터 줄곧 만났던 캐나다 경찰 은퇴 부부 패트리샤와 이안 아저씨가 보였다.
늘 우리는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에만 마주쳤기 때문에 나는 두 분이 늘 술에 취해서 코가 빨개져 있을 때만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두 분은 너무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기 때문에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
이안 아저씨의 하얀 콧수염과 패트리샤의 환대는 어디에 있던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음식주문을 기다리며, 점심때 내가 겪었던 불친절한 웨이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물건을 던지고 엄청 늦게 가져다주는 웨이터라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불친절한 곳은 그곳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온 도시가 관광유적지인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의 음식점은 대부분 불친절했다.
마침 빠에야와 파르페가 나왔는데, 스티브는 분명 블루베리 파르페를 시켰는데 딸기 파르페가 나왔다.
늘 인자하게 얘기를 들어주던 스티브는 잘못 나온 주문을 정정하러 카운터로 갔다.
스티브: 블루베리 파르페를 시켰는데요,
딸기 파르페가 나왔어요.
웨이터: 제대로 나온 거 맞아요.
스티브는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그냥 파르페를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나서서 컴플레인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나는 하루종일 산토도밍고 시내를 돌아다니느라 너무 배가 고팠고, 컴플레인하고 교환하는 거 정도는 어른인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먹지 않고 사진을 찍은 후 요리사에게 보여주고 이건 블루베리가 아니니 바꿔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나의 생각: (블루베리의 보라색이 아니라 이건 딸기의 빨강이라고 이 사람들아)
하지만 스티브는 컴플레인을 하지 않았고, 화가 난 채로 그냥 파르페를 먹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지켜봤다.
레스토랑의 불친절함과 뻔뻔함에 내가 살펴본 스티브는 서서히 뒷목을 잡으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보였다.
나는 후식을 먹고 싶었지만, 화가 많이 난 스티브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까 스티브를 만났던 정원 쪽으로 올라가서 유럽 어느 도시마다 있는 도너케밥집을 향했다.
우리로 치면 동네에 있는 맥도널드 정도로 흔한 튀르키예식 패스트푸드 집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 했던 것은 그 시간대는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였고, 마을의 경계에 있던 그곳은 유독 어둡고 어린 10대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낮에는 경찰들이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지만 밤이 되면 다 퇴근하고 이런 경계지역은 유독 위험해지기 때문에 웬만하면 문제를 안 만드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케밥집에 들어가 스티브는 콜라 나는 감자튀김을 시키고, 곧이어 십 대 무리가 들어왔다.
어딜 가나 10대 무리가 제일 위험하다.
나는 레스토랑 쪽으로 그들이 이동할 거라 생각만 했지 우리 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 녀석들은 우리 옆테이블에 앉더니, 처음에는 키득거리며 질문공세를 늘어놓아서 내 혼을 빼놓을 만큼 소란스러웠다.
바깥자리에 앉아 음식을 한참 기다리는데도 음식은 한참을 나오질 않았다.
한참을 지나 들어가 보니 여기는 서빙을 안 해주는데 왜 이제 왔냐는 표정이다.
나는 왜 안불렀냐며 황당해하니 서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며 음식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뭐 나왔으니 됐다. 쯧(드릉드릉하는 중)
나: 하~음식 먹기 힘들다.
피곤하니 예민함이 가시처럼 돋아나는 것 같다.
아니면 좀 전 카페에서 스티브가 당한 불친절함과 화가 나에게 옮겨 붙었을 수도 있지.
옆에 10대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더니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질문의 강도가 쌔지면서 인종차별 발언과 무례한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칭챙총(아시안을 비하하는 발언), 돼지 소리 등등
도저히 이곳에서 음식을 못 먹겠다는 결론이 나서 음식을 포장해서 숙소로 이동을 했다.
나는 스티브처럼 철없는 10대들의 인종차별 발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 시작했다.
아주 둘 다 참 언짢은 저녁이었다.
즐거운 식사가 불친절함과 인종차별로 기분을 망쳤으니 더 이상의 마을 구경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스티브와는 내일 새벽 6시에서 7시 사이 즈음 대성당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만약 기분이 이렇게 상한 상태에서 일반 도미토리 형태의 공립 숙소에서 오늘 잠을 잤다면 어떻게 됐을까?
방으로 돌아오자 1인실 방에 적막감이 흘렀다.
나: 휴~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아까 케밥집에서 싸왔던 감자튀김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면서 갑자기 낮에 널어놨던 빨래가 생각났다.
부랴 부랴 2층 건조대로 가서 빨래를 걷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고되고 긴 하루를 보답이라도 하듯 아름답게 별들이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점심시간 즐겁게 이곳에서 순례자들을 만나고 저녁시간 스티브와 저녁때 격은 불친절과 인종차별이 기분이 상하며 숙소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 풍경은 그 마음을 치유해 줄 만큼 고요하고 아름답다.
사람에게 상처 입고 자연에서 치유받는다.
씨에스타 때 자고 있던 현지인들은 8시가 넘은 시간부터 아이부터 강아지까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밖으로 나와 골목을 점령하고 여가를 즐기는 이들의 여유로움이 돌아오는 길의 나의 화를 조금은 누그러뜨리게 했던 것 같다.
오늘은 침낭을 안 펴도 되니 가방 정리를 할 것도 없이 세기말에나 봤음직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켜고 스페인 예능을 보면서 남은 감자튀김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부르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눈이 스스륵 감긴다.
오늘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고, 울고 웃고 화도 내면서 이곳에 녹아들었다.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의 하루는 아직까지도 긴 하루만큼이나 긴 여운이 남는다.
내일은 Belorado라는 도시까지 22.2KM를 걸을 것이다.
아침 일찍 또 걷기 위해 알람을 맞추고 이제 자야 할 것 같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