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아빠는 특히나 산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주말마다 나는 아빠와 북한산 산행을 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아빠와 함께한 발걸음은 더 이상 없었던 것 같다.
벨로라도를 떠나 산길로 들어서며 나타난 숲길을 걷는 내내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걸었던 발걸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벨로라도 숙소에서의 아침 새벽 5시 어둠 사이로 벌써부터 움직이는 순례자들의 움직이는 소리 덕분에 알람 없이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소음과 동시에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내가 쓰던 공동 숙소에는 정말 연세가 많으신 호호 할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숙소에 묵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여정이 될 발걸음을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걷는 것이다.
숙소의 모든 것이 연세가 드신 분들이나 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친절한 숙소가 있지 않다.
심지어 멀쩡하고 어리고 젊은 순례자들에게 조차 불편한 곳이 순례길이다.
이 어르신은 아주 느린 보폭으로 짐을 밖으로 옮겨 아침부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에서 이내 깨어나 할아버지를 지나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어르신은 걷기에도 쉽지 않은 이곳에서
씻는 것은 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이 길을 걸으며 웬만한 냄새는 다 정복했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다 일어나 마음의 준비 없이 내 코를 찌르는 냄새에 너무 놀라 아침잠이 확 달아났다.
그 와중에도 아들은 묵묵히 아버지를 부축하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는 걸음을 함께 발걸음을 떼고 았었다.
아침부터 코끝이 시큰해지는 풍경이었다. 이내 내 코는 찌든 땀냄새가 아니라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추억도 미움도 불평도 함께 마지막을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움과 아쉬운 감정이 올라왔다.
(아빠하고 북한산, 도봉산, 인수봉을 자주 올랐었지)
보조 가방 속 작은 노트에 붙여 놓은 아빠 사진을 확인하고는 배낭을 둘러메었다.
출발합시다!
아침 5시 56분 벨로라도에서 출발
벨로라도에서의 이른 기상 덕분에 아침 길은 스티브와 함께 걸었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아 달과 별이 떠 있는 허공에 헤드렌턴을 켜고 길을 걸어야 한다.
벨로라도 성당 쪽 마을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니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족적과 핸드프린트가 바닥에 남겨져 있다. 아직은 노란 전등불도 켜지지 않은 새벽 골목길에서 길을 걷기 시작한 순례자들은 연신 기억에 남기기 위해 프린트를 찍어댔다.
발걸음이 빠른 스티브와 함께 걷고 있자니 아빠와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180이 넘는 아빠의 큰 키에 성큼성큼 걷는 아빠를 뒤따라 나는 늘 빠르게 걸어야 했었다.
절대 기다려 주지 않았었으니까.
아빠와 고등학교 때 크게 싸우고 나서 아빠와의 대화는 단절 됐었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갔다.
스티브의 발걸음이 빠르다고 절대 빠르게 걷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단지 동이 트지 않는 새벽의 어둠 속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무섭다는 안심이 된달까?
야맹증에 가까운 까막눈이라 더 용감하게 새벽길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피로감과 허기가 급격하게 찾아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문을 연 카페를 찾아야 한다.
이미 스티브는 먼저 발걸음을 떼고 나보다 한 템포 빠르게 걷고 있었고, 우리는 다음 도착지에서 소식을 전하기로 하고는 먼저 길을 떠났다.
6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5.1km를 걸어 커피숍을 찾다가 해가 다 뜨고 8시가 넘어 두 번째 도시인 Tosantos입구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테라스를 발견하고 나는 카페로 들어섰다.
스티브는 볼일을 다 보고는 마침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아침식사와 화장실이 급했기 때문에 서둘러 가방을 풀고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침 내내 앞뒤로 함께 걷던 뉴질랜드 커플과 스티브 그리고 조셉 아저씨까지 여기 카페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아침으로 크루아상과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서둘러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일찍 걷기
아침 일찍 걸을 때 단점은 걸으면서도 졸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금 늦게 걷게 되면 뙤약볕에 타 죽을 것 같은 더위와 싸워야 했다.
더위와 졸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특히나 오늘 가는 길 같이 오르막과 산길을 가는 경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이 순간의 졸음이 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간간히 이렇게 카페들이 있어준다면 더위와 졸음 두 가지를 다 채울 수 있으니 다행인일이지만 말이다.
Espinosa del Camino/ 두 번째 휴식처: La Taberna de Espinosa
나는 첫 번째 휴식처였던 Tosanto를 지나 세 번째 도시인 Espinosa del Camino에 다 달았다.
아직까지는 완만하고 무난한 스페인의 시골농경 풍경과 작은 마을들이 작품 퍼럼 펼쳐졌다.
어쩌면 평지보다도 산으로 들어가는 게 그늘을 만들어 줘서 더위를 피하고 산의 에너지를 받으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완만한 경사는 걷기에 무리가 없다.
새 사람이 되는 방법
21일을 넘기면 없던 습관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미 13일을 걷고 있었다.
나는 법륜스님의 즉문 즉설을 마음이 불안할 때 자주 듣는데 거기서 스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이 진짜로 변화를 원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1. 아주 큰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
2. 매일 3000배를 하며 행동한다.
이렇게 사람이 바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단군신화에도 나오지 않는가? 마늘만 먹으며 동굴 안에 들어가 버틴 일화말이다.
왜 이렇게 산티아고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 역시 길을 떠나기 전 사람과 세상과 나 자신에 비관적이었다.
나는 아빠와 부고와 엄마의 사고, 친구의 사기 등등의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내가 견고하다 생각했던 성이 무너지는 것을 인생의 덧없음에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았다.
나 정말 착하게 법 없이도 살만큼 열심히 착실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건지.
단지 내가 이 길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이 환경에서 튀어 올라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동기부여가 어찌 되었든 어떤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그렇게 매일의 나를 쌓아 올리고 실천하면서 나는 여기 산티아고까지 걷게 된 것이다.
처음 걸음을 걸었을 때는 이 길 자체에 대한 환상을 품고 오는 이들에 비관적이었고, 그렇다고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지만 매일의 길을 단지 걸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아직 초반의 길을 걷고 있지만 온전히 아무 생각 안 하고 길을 걷기만 할 때가 종종 생겨 나고 있다.
부르고스 도시까지 고지가 멀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다 된 유심 칩
어찌 된 일인지 잘 되던 내 핸드폰 와이파이가 작동을 안 하는 것 같다. 한 달 만기로 9월 5일 자로 맞춰서 열었던 유심이니까 한 달이 다 된 시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나의 계획은 10월 초쯤 다시 파리로 돌아가 파리에서 불어학원을 갈 거라고 언니에게도 얘기했었고, 심지어 팜플로나에서도 그 기안에 유심칩을 개봉할 수 있게 날짜를 맞춰 유심칩을 구입했던 게 갑자기 기억이 났다. 이 길을 완주하기보다 찍고 돌아오는 게 목표였으니까.
현대인이 핸드폰이 안된다는 게 어떤 뜻인 줄 아는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롯이 길을 화살표만 보고 가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휴식처가 귀하게 느껴진 것 같다.
13일 차 여정
내가 갈 이정표를 알려주는 카미노 비석에 548km가 남아 있다고 알려 준다.
아주 거대한 목표라고 생각했던 800km를 아주 잘게 쪼개어 나는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Monumento La Pedraja
언덕을 올라 잠시 정상에서 숨 고르기를 하면서 남아공 부자와 마주쳤다.
늘 숙소에서 쉬는 모습만 보던 그들의 모습은 휴식을 취할 때와는 다르게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화살표
수세기 전부터 순례자들이 매일매일 걸었을 이 길에 처음에는 바위였을 돌들이 잘게 부서져 길가에 펼쳐져 있다.
누군가 한두 명이 만들었을 돌로 만든 이정표에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기운을 불어넣듯이 한 개씩 다시 또 돌을 얹어 화살표는 대를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치 이 화살표가 한국의 절에서 보는 신비한 돌탑처럼 순례자들을 이정표 대로 이끌었다.
산길을 걸을 때 나는 한국의 산을 걸을 때처럼 맨발 걷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대부분의 평지길은 뾰족한 돌들이 많아 위험하지만 숲길의 경우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0월 중순까지는 카스틸라 이 레온 지역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발목을 잡아주는 트레킹 샌들을 신고 걸어도 될 만큼 길이 완만하다. 무거운 트레킹화를 신고 더위를 먹어가며 걸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트레킹 샌들과 집에서 자주 신던 테바 도시형 샌들 중 어떤 걸 가지고 갈지 늘 고민했었는데 내 선택은 가벼운 테바 샌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기회가 돼서 가지고 간다면 바닥이 튼튼한 트래킹 샌들을 가지고 갈 것 같다.
단체 관광 순례자
숲길을 걷다 보니 하늘 높이 길게 뻗은 나무들이 줄지어 길게 뻗어 있었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그들이 생겨 해를 등지고 걸으며 줄 지어 심어진 나무들에게 그림자가 생긴 곳으로 해를 피해 줄줄이 걷는다.
조용히 걷던 숲길 사이로 단체로 짐 없이 걷는 관광순례자들이 지나갔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단체로 움직인다는 것은 엄청난 소음을 발생시킨다.
나는 정말이지 단체 관광객이 맘에 들지 않는다.
조용히 모든 길을 걸으며 순례를 하고 있는 순례자들과 똑같은 대접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길을 걸으며 제일 아쉬웠던 것이 블루투스 이어폰이었다. 다이소에서 테스트도 해보지 않고 사갔던 아이폰 줄 이어폰은 무늬만 이어폰이었다.
전혀 아이폰에서 인식을 못해서 무용지물이다.
파리에 두고 온 에어팟이 자꾸 눈에 아른 거렸다.
이럴 때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틀어막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면 먼저 그들을 보내거나 빠르게 걷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까지 걸으며 점점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이 길들에서 그간의 인생을 정리할 만큼 완만하고 평화로웠다는 증거이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입구
산길을 벗어나 San Juan de Ortega 입구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 있는 El Descanso de San Juan이라는 알베르게 겸 레스토랑이 우리 순례자들을 반겼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고, 햇볕이 머리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자리를 살펴보아도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지 못하고 주변을 살펴봤다.
거기엔 낯익은 얼굴들이 테라스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패트리샤와 이안 아저씨였다.
내 기억으로 여기 산후안 이후로 이 부부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먼저 길을 마쳤을 수도 있고, 더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여기 카미노 길에서의 순간순간의 만남은 모두 소중하다.
이 두 분과 함께 식사 한번 못했던 게 제일 아쉽다.
늘 두 분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안부를 물어주셨었다. 나의 산티아고 카미노 길 초반 나의 길 동무로서 더더욱 잊히지 않는 분들이다.
짐은 무겁고 빨리 숙소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에 잠깐의 대화를 뒤로 미루고 나는 성당 쪽으로 길을 향해야 했다.
원래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 머물 계획이 아니라, 3KM를 더 가서 Agés(아게스)에서 짐을 풀 예정이었다.
산후안 데 오르테가에 머물 곳이라곤 성당옆 기부 알베르게인 Albergue de peregrinos de San Juan de Ortega는 규모가 큰 알베르게 여서 단체 관광객부터 저렴한 숙소만 들르는 순례객들까지 수십 명이 뒤섞여 하룻밤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숙소 앞 벤치에는 스티브가 오후 체크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Bar Marcela
더위와 허기에 지쳐 일단 산후안 오르테가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 테라스에 가방을 벗고 피자를 주문했다.
남아공 부자와 몇몇은 맥주를 마시며 여유롭게 체크인 오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빠르게 그곳을 지나가는 순례자들도 보였다.
피자 주문이 나오자마자 1시 체크인 문이 열렸다.
음식을 서빙을 해주지 않아 한참을 주문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웨이터는 왜 이제 왔냐며 성회였다. 나는 더위를 먹고는 여권을 잃어버릴 만큼 정신이 나간 상태를 파악하고는 주인장에게 피자를 맡겨 두고 체크인을 하러 부랴 부랴 대기 줄에 섰다.
아침 6시부터 23km를 걸었으면 충분했다.
3KM 라도 한번 내려앉은 마음은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는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남아공 부자에게 여기 머물 거라고 말하자 박수를 춰주었다.
부랴 부랴 선 긴 대기줄에는 아까 숲길에서 만났던 브라질 순례자 단체 관광객 무리도 끼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 다인실 숙소자리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으면 된다.
까딱 잘못 잡으면 코골이가 심한 남아공 부자와 함께 또 잘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아직 자리가 넉넉한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 1층 침대를 차지했다.
짐을 풀고 헐레벌떡 내려와 방치돼 있던 내 피자를 먹으러 갔다.
다들 순례길에서 베드버그 걱정만 하지 파리 걱정은 안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길을 걷는 내내 베드버그 보다 파리를 더 많이 구경한 것 같다.
순례길이라 그냥 킵해둔 피자를 아무도 손대지 않았겠지만, 내가 없는 동안 피자에 파리들이 앉아 아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겠지? 그래도 뭐 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팠고, 지쳤다.
나는 그 피자를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 치웠다.
(감히 내 피자를 먹을 생각을 하다니… 파리새끼ㅡㅡ)
시원한 맥주가 더위를 식혀 준다. 땀도 허기도 긴장도 식혔을 즈음, 내 옆에 앉아 있던 젊은 무리의 순례자들은 더 이동을 한 듯 자리에 없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보니 처음에 방을 잡았을 때는 텅 비어 있던 침대가 어느새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단체 관광순례자들과 한방을 쓰게 됐다.
양쪽 숙소방 가운데에 위치한 화장실 겸 샤워실로 들어가 으레 이제는 카미노길이 일상인 것처럼 씻으면서 하루 일과를 마친다.
빨래를 복도식 통로로 나와 빨랫줄과 통로식 난간에 걸쳐둔 빨래들을 따라 나도 빨래를 널어놨다.
깨끗이 씻고 방으로 돌아오니 내 옆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엇! 익숙한 뒷모습이다.
어?! 안나?
우리는 보자마자 또 만났다며 반가워하며 웃어댔다.
나는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걸으며 와이파이 기간이 끝난 유심칩을 새로 갈아 끼웠다.
왜냐하면 내일 도착할 부르고스 숙소를 예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칩을 교체하자마자 와이파이가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마치 고구마를 먹고 막힌 속이 사이다를 마신 후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한 순간이었다.
현대인에게 핸드폰이 소통이 안된다는 건 정말 답답한 일이다.
PTSD직전의 응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유심칩을 갈아 끼운 후 안나에게 연신 질문을 해댔다.
나: 부르고스 숙소 예약해 두셨어요?
안나: 욕조가 있는 1인실 호텔을 예약해 뒀어.
아마 이틀을 휴식하면서 머물 예정이야.
나: 저는 동키로 짐을 부치려고요.
그렇게 말하고 처음으로 “부킹닷컴”앱을 이용해서 “Hostell Catedral Burgos”에 여성 전용방으로 예약을 마쳤다.
그런데 급하게 예약을 마치고 다시 확인해 보니 날짜지정을 잘못해 놓은 것이다.
역시나 이렇게 급하게 하면 늘 이렇게 실수를 한다.
날짜 수정을 위해서는 직접 숙소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이놈의 숙소들이 정말 전화를 안 받아…..
으>, <정말
10통이 넘게 전화를 걸어서 겨우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예약을 내일로 미뤄둘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그냥 두면 20유로를 날려야 하기 때문이다.
취소 수수료가 있어서 꼭 전화로 확답을 받아야 한다.
한바탕 혼자 예약건으로 난리부르스를 치고는 숙소 침대에 겨우 누웠을 때 방에는 단체관광 순례자들이 들어와 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어찌 된 게 안나 앞에서 매번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스 아르고스의 오스트리아 숙소 건도 그렇고 그때 이후에 나 바레떼에서 나의 사과와 감사함을 표현한 후 우리는 순례자를 넘어 친구가 되었다.
이제는 오늘 내가 예약을 하며 하는 실수를 보며 너그럽게 기다리며 바라봐 주셨다.
차갑고 개인주의가 강한 유럽인이라는 고정관념과 낯선 동양의 이방인이라는 첫인상을 걷어내고 서로 한 발씩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안나는 자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했다.
안나: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웃음)
짐을 보내면 서브가방은 있어?
나는 나의 낡은 핑크색 도트무늬 에코백을 보여주었다. 돌돌 말아 주먹만큼 작아지는 에코백이 기저귀 가방만큼 커졌다.
늘 진지한 모습만 보이던 안나가 살구색 배경색에 여러 색 도트로 프린트된 패턴이 수영복 같다면서 웃기 시작했다.
안나의 유머에 핑퐁을 치기라도 하듯 에코백 팔걸이를 어깨에 갖다 대보았는데 기가 막히게 수영복 같은 느낌의 상상 매치가 되었다. 우리는 수영복처럼 가방을 몸에 갖다 대보며 배를 움켜쥐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안나: 너 벨로라도 수영장에서도 이 수영복 입었니?
진짜 트렌디하다~
안나와 나는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산후안 데 오르테가 까지 같은 숙소를 쓸 때면 늘 옆자리였고, 아니면 길에서 마주치며 거의 매일을 함께 걸었다. 그래서 안나만큼 나에게 특별한 순례자 메이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겐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오른쪽 방에는 스티브와 조셉 아저씨 그리고 남아공 부자가 있다.
조셉 아저씨와는 오래간만에 숙소를 같은 곳에 쓰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숙소가 의도치는 않았지만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 안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안나: 저녁은 여기 숙소에 예약을 해뒀어.
너는 어떻게 하니?
나: 아직 안정했어요.
안나: 그러면 로비로 내려가서 예약을 하면 어때?
화장실에서 나오는 조셉 아저씨와 마주치며 저녁을 물어보니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와서 그럼 저녁을 함께 하자고 말을 전하고는 0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문 틈 사이로 뜨거운 햇볕이 드리우고 있었다.
스티브와 내 침대 2층을 쓰는 단체 관광순례자 여자분과 로비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호스트 매니저에게 저녁 예약을 지금 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4시까지만 저녁 예약을 받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일정 중에 시에스타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 갑자기 시공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로비 바에는 아기를 살피는 엄마와 아기의 따듯한 눈빛과 테이블 한편에서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순례자들의 수다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조용하고 느린 공기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남아공 부자와 다른 순례자들이 술을 마시며 여담을 나누는 게 보여서 나는 허리까지 머리가 내려오는 남자분에게 머릿결 관리를 어떻게 하시냐고 물었다.
나: 머릿결 관리 어떻게 하세요?
혹시 록 음악 하시는 분인가요?
그 순례자는 ‘ROCK” 제스처를 하며 같이 막 웃어댔다.
거기 있던 코에 피어싱 한 여자분과 남자 롹커 같은 분들과 한바탕 웃고는 여전히 뜨거운 햇볕에 숙소로 돌아왔다.
산티아고 여행뿐 아니라 특히 홀로 여행을 떠나면 한없이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파묻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내가 얼마큼 그들에게 다가갈 것인지만 선택하면 된다.
숙소 앞 테이블에 앉아 홀로 컵라면을 먹는 한국인 순례자를 보았는데 그분을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한국에서 17시간을 날아 여기 산티아고를 200km를 넘게 덜었고 조만간 천 번째 고지인 Burgos를 찍을 시기이다. 한국에서처럼 익숙함에 안주해서 누군가 나를 도와주겠거니 하고 고고한 백조처럼 가만히 있기에는 지금의 일분일초가 너무나 아쉽고 아까웠다.
그분을 탓하는 게 아니라 홀로 라면을 먹고 있는 한국인 순례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처럼 따라다니던 과거의 그림자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이 말이다.
길을 떠나 환경을 바꾸고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하는 이유도 역시 바로 이것이다.
모험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나를 열고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그릇을 만들고 문을 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수 있다.
이런 우연한 깨달음은 순간 나에게 찾아왔다.
오르테가의 성 요한 수도원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산토 후안 데 오르테가는 비야프랑카에서 온 불우한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9세기 이상 전에 이곳에 수도원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산토 후안 데 오르테가가 남긴 유산 앞에 서 있습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수도원은 12세기와 13세기에 지어져 로마네스크 양식과 초기 고딕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구역에 본당 3개, 눈에 띄는 교차랑, 제단에 예배당 3개가 있으며 특히 12세기에 지어진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니콜라스 데 바리 예배당에 주목해야 합니다. 15세기 중반에 증축되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조각된 장식 머리, 성인의 삶을 상징하는 부조로 장식된 고딕 양식의 발다키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요한 무덤으로 유명합니다
조셉님과 성당
숙소로 다시 돌아가려는 찰나 조셉님이 성당에 간다며 밖으로 나오는 길에 나와 마주쳤다.
유서 깊은 성당으로 가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셉님은 1유로를 동전함에 넣고 촛불을 붙였다.
나도 조셉님을 따라 성당으로 들어가 나만의 방식으로 기도를 했다.
나: 기도하는 모습(앞으로의 걷는 모든 일정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합장)
조셉님: 가톨릭 신자예요?
나: 신자는 아니지만 가톨릭 길인 순례길을 이해하고 기원하기 위해서는 성당이 핵심이고 길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늘 기도해요.
(매번 신자냐고 물어보신다)
저녁 식사
아주 작은 마을이라 레스토랑이 3개뿐이다. 점심은 마을 초입에서 피자를 드셨다고 한다.
우리는 내가 점심때 피자를 먹었던 숙소 옆 레스토랑에 일찍 자리 잡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대부분 7시가 넘어서야 식당이 꽉 찬다.
이 식당의 매니저 겸 홀서빙 하는 지배인은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이 지배인 넋살이 좋았다.
어디서 배운 한국말인지 한국말을 조금 섞어가며 농담을 건넨다.
조셉아저씨와도 이때부터 낯가림을 벗어내고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저씨가 저녁을 사주셔서 다음번에 만나면 내가 뭐라도 사드리기로 했다.
매번 식사 때마다 제일 원하는 것은 고기도 과일도 아니다. 신선한 야채이다.
늘 샐러드만 먹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야채를 먹지는 않는 것 같았다.
순례자 코스를 시켰을 때 의례 늘 마지막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을 먹고 싶었다.
레스토랑 안에는 비아나에서 만났던 지안 아저씨와 스페인 친구분도 같이 계셨다. 여기저기서 이제는 길에서 익혔던 순례자들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고 인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셉님과 나는 식사를 하며 다음 도착도시인 부르고스에서의 첫 휴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부르고스에 도착 후 마드리드로 여행을 갈 것 같다고 계획을 털어놨다.
기차로 마드리드까지는 2시간밖에 안 걸리고 걸어서 259KM/ Google은 이틀을 걸으면 마드리드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구글이 로봇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예측한 게 아닐까 싶은 거리였다. 지금 내가 생장에서 부르고스까지 걸은 걸음과 비슷할 정도로 먼 거리이다. 대략 열흘이 걸리는 거리인데 이틀이라니 말이 안 된다.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은 뺀 거리일 것이다.
조셉님 역시 이틀을 부르고스의 좋은 호텔에 머물며 휴식과 그간 못한 빨래와 한식도 먹는 게 휴식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스토랑에 서빙을 하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는데 식당을 가득 매운 순례자들로 만석이었다.
나는 점심때 숙소예약을 잘못해서 직접 숙소에 전화를 해서 날짜를 변경했던 해프닝을 얘기를 했더니 젊은 사람들도 이렇게 실수를 하냐며 그간 자신의 실수담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 기합이 많이 들어간 가톨릭신자로서의 엄격함과 사명감으로 걷던 모습이 부담스러웠었다. 이제는 조금은 느슨하고 여유로워진 등산용품들처럼 나와 조셉님도 서로의 모습도 이곳에 어울릴 만큼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다.
그간의 여행담을 풀어놓으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디저트로 지역 특산물인 쌀 푸딩이 나온다는 정보를 들었다.
도자기 단지 안에 들어 있는 푸딩에 지역 특산물로 나오는 꿀을 뿌려 먹으면 된다.
낙농업 국가인 만큼 원산지답게 꿀도 아주 신선하고 저렴해서 스페인에 가면 올리브 말고도 꿀을 사 오는 걸 추천한다.
조셉 아저씨는 벨로라도에서 안나와 같은 숙소였다고 했다.
안나랑 지금 바로 옆침대라고 말을 하며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정보를 공유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5분 거리도 안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숙소로 돌아오니 단체관광순례자들로 방이 북적인다.
보통 숙소는 9시가 다되는 시간이면 조용히 잘 준비를 한다. 단체관광객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이니 정말 시끄러웠다.
안나는 침대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짐 정리
나는 침대로 돌아와 배낭을 둘로 나눠 에코백에 물과 비상식량을 챙겨 담았다.
안나: (에코백을 보며) 너 부르고스에 가서 그거 입고 수영할 거야?(키득키득)
나: (맞받아치듯이) 오호호호 심지어 마드리드 가서도 입을 거예요. (하하하하)
그거 아세요? 이 살구색이 2024년 팬톤 컬러라고요!
안나: OMG! 매우 트렌디하는구나!
까르르! 왁자지껄
주변에 잡담 소리에 우리의 수다도 어느새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시에스타 때부터 코를 골면서 자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한마디 했다.
아저씨: (경직된 톤으로) 조용히 하세요!
여기는 모두의 공간입니다!
아무래도 소음소리가 너무 커지다 보니 잠에서 깨어나신 것 같다.
방사람들 모두 그 할아버지? 아저씨의 불호령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에서 정숙해야 하는 게 맞다.
잡담금지!
우리는 혼이 났음에도 이미 터진 웃음이 자꾸만 삐죽삐죽 새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웃음 참기 아닐까?
나는 늘 가지고 다니던 @susu forest 작가님의 고양이 일러스트 가챠를 안나에게 선물로 건넸다.
딱히 줄게 없고 이 가챠를 보며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안나: 너의 에코백은 절대 못 잊을걸?
안나는 나의 선물을 본인의 아코디언 아트북에 풀로 붙였다.
지금 든 생각인데 안나는 아트북에 풀에 가위까지 들고 색연필도 가지고 다녔다.
마법 가방처럼 그렇게 다 넣고 네덜란드에서부터 동키서비스도 한 번도 안 하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단 말이지? 유럽인들 체력에 놀랍고 대단할 뿐이었다. (어쩌면 진짜 천사인가?)
우리는 조용히 소근 거리며 키득거렸고 대부분 방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동의를 구한 후 9시 소등을 했다.
몸이 재밌는 게 한국에서는 늘 새벽 2시쯤 잠에 든다.
아마도 그 시간이 가장 어둡고 조용한 집안 환경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불을 끈 9시가 넘어 우리는 금세 모두 잠에 빠져 들었다.
레드 썬!
하고 모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큰 알베르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콘센트 구멍에 핸드폰 충전기를 꽂아 두고는 잠에 빠져 들었다.
내일은 아침에 동키 서비스를 붙이고, 부르고스까지 걸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대도시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드리드에 갈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쉴 수도 있다.
산후안 데 오르테가를 오르는 길에서 내 안에 그림자를 만나고 산에 흘려보내는 경험을 맞이했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늘 항상 교훈적일 수는 없지만 매일의 나를 채워 넣어 조만간 1차 고지가 보이는 부르고스로 간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벅찬 하루였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