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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Nov 21. 2024

이탈리안 해피니스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 가는 길(Calzadilla de la Cueza


10월 9일

샤워를 마치고 주방을 뒤져 보니 푸실리(꽈배기 모양의 파스타)와 토마토퓌레 한통과 마늘이 보였다.

아나와 나는 간단하게 이걸로 요리를 해서 간단하게 배를 채웠다. 시끌시끌하게 숙소에 들어온 프로미스타에서 봤던 이탈리안 무리 중에 한 명이 발 찜질을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왔다.

우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이 이탈리아 청년의 호의와 이탈리안 특유의 호감 가는 외모는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배고픈데 장사가 없다. 나는 코를 박고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고, 혹시 전에 만났던 단체 관광객들처럼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설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빌라카자르 데 시르가

나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빨래도 널고 동네 구경도 할 겸 바깥으로 향했다.

숙소 바로 옆에는 아이들 놀이터 겸 공원이 있었다.

알베르게 출구 바로 옆 벤치에는 이탈리아 순례자들 중 여자 2명이 앉아서 줄담배를 피고 있었다.


이탈리안

이탈리아 남자들이 서글서글한 외모와 호감형의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이탈리아 여자들은 예쁘다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잘생겼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남자도 여자도 잘생겼다. 게다가 인상도 쌘 언니 느낌이 강하달까?

물론 안면을 익히고 서로 도움이 오고 가면 이내 밝게 웃으며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블랑카 교회

숙소 뒤에 있는 산타마리아 블랑카 성당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성당 앞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호주 여자분들을 만났다.

우리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늘 가벼운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분들은 나를 보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그분들이 앉아 있는 테라스 테이블에 앉았다.


Oz호주인

Oz의 뜻이 뭐냐 하면 영국 영어에서 격식이 없는 맥락의 경우 사용하는 호주의 별칭을 뜻한다.


아나: Gooday Mate(구다이 마이트); Have a good day! My friend.


호주식 인사를 건네자 호주분들은 밝게 웃으며 너 그거 아는구나 하며 크게 웃었다.

중학교 때 갔었던 호주 어학연수에서 배웠던 문장이 갑자기 내 안의 호주식 마인드 버튼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다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장인데, 내가 그 기간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흡수하고 지금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깨닫게 됐다.


느릿하게 걷던 사람들과 호주식 사투리 말투, 내가 지향하는 여유로운 삶의 자세 모든 것이 호주의 태양아래 몸으로 습득한 것들이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는 순간 그 호주 분들에게 확 마음이 열렸다.


호주분들은 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우리의 종알거림을 다 들어주셨다.

커리어나 고국으로 돌아가면 적응해야 하는 고민이라던가 등등 잡다한 고민거리들 말이다.

아나는 방에 들어가 쉬어야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 역시 잠시 숙소로 돌아갔는데 아나는 자원봉사자 분과 주방에 앉아 상담을 받고 있었다. 꽤 진지한 분위기여서 나는 저녁을 먹으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Bar Las Cantigas

저녁을 먹으러 다시 성당 앞에 있는 유일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아직은 배가 안 고프니까 “띤또 데 베라노”를 시켰다.

식당에 있던 지배인 아저씨는 나에게 스페인어를 배우라며 핀잔을 줬다.


나: 노력은 하고 있는데 당장은 어렵네요.

@albicocca_in_cammino

이탈리안 저녁

띤또 데 베라노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 석양을 구경했다.

숙소에 있던 이탈리아 무리들이 한 두 명씩 테라스에 앉더니 이탈리아 영화에서나 볼법하게 라운드형 테이블을 일자로 길게 붙이고는 대식구의 저녁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진들처럼 말이다.


아까 인사를 나눴던 귀여운 이탈리안 순례자는 나를 보더니 함께 식사하자고 해서 함께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탈리어와 영어가 뒤섞인 시끄러운 한상차림이었다.

이 속에는 이탈리안 말고도 미국인, 네덜란드, 스웨덴 그리고 나 한국인까지 있었지만 노래하듯 말하는 이탈리안 목소리가 압도했다. 어딜 가나 늘 저렇게 긍정적인 분위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브라질 순례자 패드로도 그랬었고, 안나도 그렇고 모두 이탈리안들 특유의 쾌활한 긍정주의를 사랑했다.


이탈리안들: 네 친구는 왜 없어??

나: 지금 호스트와 중요한 얘기 중이더라고. 저녁 안 먹는대.


아까 그 이탈리안 큐티 청년은 몸이 안 좋은지 목도리에 긴팔까지 입고 있었다.


Eat+aly (맛있는+이탈리아)

이탈리아라고 말하면 맛있는 먹거리 얘기를 안 할 수 없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맛있는 음식 또한 빠질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밖으로 꺼내 논쟁을 즐기기도 하는데 각자 나라마다 금기 사항이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나 먹는 방법은 정말 앞에서 자랑을 한다는 것은 일단 진심으로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봤던 뉴욕 대학생 청년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뉴욕 피자가 최고라는 얘기로 논쟁이 시작됐다.


맙소사!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탈리아 배낭여행에서 먹었던 피자보다 뉴욕 피자가 훨씬 맛있다는 얘기였다.

하필 이탈리아 사람들과 음식 자부심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데 왜 저럴까 싶게 논쟁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미국이 최고라고 으시되던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데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 보였다.

미국이 최고라는 얘기를 유럽까지 와서 해야 하는 걸까?


사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들의 시야가 얼마나 넓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논쟁을 듣다 보니 나는 배가 고파졌다.


에티켓

유럽에서 주문을 할 때 “저기요”와 같은 말은 암묵적으로 안 하는 룰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랫사람으로 하대하는 표현이기 때문인데, 나는 주문된 음식을 서빙하는 아저씨를 보고는 아저씨에게 ”저기요(Excuse me)”라고 왜 쳤다.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아주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나는 “저기요”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 시끄럽던 테이블 분위기에서 갑자기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런 저런 사정을 알턱이 없으니 아주 해맑게 아저씨에게 물었다.


나: 저는 스페인 매너를 잘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아저씨: “Señor 세뇨르”

세뇨르: 모든 남성을 부를 때 쓰는 명칭으로 존칭어이다.

나: Señor, Una Hamburguesa, Por favor. 세뇨르! 우나 햄버거 뽀르 파보르?( 아저씨! 햄버거 한 개 주세요)

나는 간단한 스페인어를 쓰고 서로 악수를 청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 실수를 메꾸려는 행동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던 분위기는 다시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나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루카

내 앞에 앉아 있던 말수 적은 이탈리안 “루카”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름이 루카라고 자기소개를 마친후 나는 곧바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탈리아 남부 배경의 “루카“가 떠올랐기 때문에 이름이 더욱 기억이 남았다.

애니메이션 주인공 루카가 30년 후 산티아고 길을 걷는 다면 저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루카는 스위스 본사가 있는 “머렐”이라는 트레킹 브랜드 본사에서 마케팅 홍보일을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어른들에게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라고 알려주었더니, 일한 보람이 있다며 어깨를 으슥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수다와 높은 텐션, 이탈리안 특유의 노래하듯 말하는 말투가 계속되다 보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나는 식사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왔다. 아나는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잘 준비

촘촘히 붙어 있는 이층 침대는 나같이 작은 사람에게도 편하지 않았다.

걷는 여정 내내 익숙하지 않은 트래킹과 불편한 잠자리에 늘 잠이 모자라다.

아나와 나는 내일 7시 즈음 일어나 출발하자고 얘기를 마쳤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탈리안들과의 저녁식사가 아마 한국이었다면 2차 3차 밤늦게까지 파티를 했을 텐데, 내가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 금방 모두 숙소로 돌아왔다.


일층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이탈리아 여자 순례자는 머리에 늘 고프로 밴드와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거의 15kg의 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한다.

민머리의 남자분은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지 못했었지만, 휠체어를 지팡이 삼아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stay2go


아까 테이블에서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달리 9시 취침시간이 가까워 지자 잠 잘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많이 걸었던 것 때문인지 나는 한없이 피곤한대도 잠이 오질 않는다.

긴 하루를 보내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해 봐야지!


10월 10일 아침 6시

이른 새벽 아침 길을 걷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끄러울까 봐 짐을 방 밖으로 꺼내 짐을 싸고 있지만 사실 전혀 방음이 안 되는 건물구조상 크게 의미는 없다.


알베르게의 좁은 공동 화장실의 줄을 서기 싫어서 일찍 화장실 볼일을 보고 양치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줄줄이 공동 화장실에 긴 줄이 생겼다.

이미 주방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과 아침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새어 나오는 커피 향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아나는 어느새 주방에 합류에서 주방 분위기를 밝은 에너지로 모두를 웃게 만들어 버렸다.


아나의 계획

어제 아나는 호스트 자원봉사자 분과 길게 상담을 했었다. 그 이유는 알고 보니 오늘 함께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까지 5.6km를 걷고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대략 99km의 걸리라 걸으면 4일에서 5일 차로는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우리가 거의 4일을 함께 지내며 정이 들었지만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아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이 길에서 배울 게 없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또다시 혼자 남겠지만 괜찮다. 그저 내 걸음대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함께 걸었던 추억과 헤어짐은 아쉽지만 함께 걷었던 순간을 소중히 기억하기로 했다. 함께 5.6km 정도 걸으면 가볍게 몸도 풀릴 시간이었고 부담 없는 거리이다.

아나는 앞으로 이어질 평야 사막지대의 길의 특성과 에너지를 고려해 레온까지 버스를 타기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부상

숙소방에 숏컷에 검은 곱슬머리 인상이 샌 이탈리아 여자분이 무릎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통증 관련해서 도움을 조금 줬다.

그때 이후 이 새침하고 콧대 높은 이탈리아 여자분은 더이상 경계를 풀고 친절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늘 함께 걷던 남자분과 로마에서 왔다고 한다.


빌라카자르 데 시르가에서의 이탈리안 무리들과의 추억은 삶을 즐기는 긍정적인 자세를 배우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Carrion de los Condes 5.6km


우리는 아침 동이 트는 도로를 지나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9시 정도에 도착했다.

새벽 도로길을 걸어야 해서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줄줄이 움직이는 순례자들의 조명등 덕분에 무섭지 않았다.


Bar Espana카페에는 어젯밤 함께 묵었던 이탈리안 무리들 뿐만 아니라 초반 길에서 만났던 순례자 친구들이 대부분 있었다.

나처럼 3일 이상을 휴식을 취했던 사람들이 아닌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출발한 날짜와 다르게 뒤섞여 있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에 따라 도착하는 곳도 천지 차이였다.


잘 가! 아나

아나와 우리는 Bar España 카페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바로 맞은편에 있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버스 뒷모습이 보일 때까지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나누고는 아나는 레온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10월 10일 새로운 여정의 시작

오늘은 아마도 23km 정도를 걸어 칼자딜라 델 라 쿠에자 (Calzdilla de la Cueza)에 도착할 예정이다.


어제저녁때 안나에게서 온 기념사진에는 수잔과 캐시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안나와 수잔은 오늘 이미 다음 코스로 길을 떠났지만 수잔에게 연락을 오랜만에 한 결과 캐시는 오늘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초반길 팜플로나 이후에 캐시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 나서 왠지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산티아고 안내서에서는 어제처럼 계속 지평선을 일직선으로 걷는 길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몸도 마음도 카미노길에 젖어들어 익숙해진 길 위에 다시 걷기 시작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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