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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Nov 28. 2024

길 위의 오아시스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 가는 길(Calzadilla de la Cueza

산티아고 순례길과 로마도로

이곳은 순례길에서 가장 길고 쓸쓸한 직선 구간 중 하나인 길의 시작점이다.

물도 없고, 그늘도 없다.

카리온에서 나오는 지점인 이곳부터 긴 직진 길이 시작되며, 이 구간은 대부분 마을이 없다.
칼자딜라까지는 17KM 이상 떨어져 있다.
(보르도와 아스토르가를 연결하는 이 전 구간은 역사적인 로마 도로에 속함)
힘내세요! 부엔 까미노!

*개인적인 내 의견을 덧대자면, 초반길의 피레네 산길과 순례길을 적응하는 길이 초반의 고비였다면,
두 번째 고비는 일직선 사막의 길이다. 더위와 물, 화장실 근본적인 고통으로 길은 순례자들을 시험한다.
부엔 까미노 앱 중-

Carrión de los Condes에서 다시 걷기 시작


2023년 10월 10일 다시 혼자 걷는 길

아나를 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아침 상점과 마을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문이 닫혀 있었다.

생각보다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는 중소 도시였고, 도시를 벗어나면 이제부터 긴 직진코스 사막 길을 걸어가야 한다.


23킬로 칼자딜라 까지 가끔 보이는 나무들만이 길의 전부일 것이다.

그전에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끝 마쳐야 한다.

나는 마을을 빠져나가기 전 은행에서 현금 100유로를 인출했다.(여전히 수수료 비쌈)

마지막으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도로였다. 도시를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위험이 도사린다.


쭉 뻗은 지평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길 위에 오롯이 길을 걷기 위해 걷는 순례자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역여 걸어가고 있다. 높낮이도 없고, 오롯이 직선 코스를 비교하자면 고속도로 길을 계속 같은 화면만 보면서 지나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영화에서도 그렇고 여러 작품들에서 이 사막길에서 고비를 겪는 부분을 중점으로 그려낸다.


여태껏 여러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이곳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도무지 간음이 되지 않았다.

길 위에서 느끼는 건조한 더위와 갈증 그리고 외로움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말이다.


길 주변에는 추수를 끝내고 갈색 속살만 드러낸 맨땅만이 길에 덩그러니 보일 뿐이다.

땅자체도 크고 넓은 이곳에 숨을 그늘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온몸으로 태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길 위의 오아시스 coffee bar el camino 9.17km

조금 이른 점심 계속 길을 걷던 중 푸드트럭이 나타났다.

나는 화장실도 들리고 배도 채울 겸 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들어서자 비알까사르 데 시르가에서 아나의 지인으로 인사를 나눴던 미국인 2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에게 화장실을 물어보니 컨테이너 뒤가 자연 화장실이자 그늘 가림막이라며  알려준다.


나는 아직까지는 참을만해서 좀 더 몸을 숨길 만한 그늘과 자연 지형물이 있는 곳이 보이면 그곳에서 볼일을 봐야겠다 생각했다. 아직 그렇게 대자연에 탁 트인 곳에서 볼일을 볼 만큼 내려놓지는 못한 상태였던 것 같다.



점심: 점심세트로 베이컨과 계란 2개 빵하나 그리고 오렌지 주스

배가 고프지 않지만 앞으로 갈길이 멀기 때문에 일단 배에 채워 넣어야 한다.

그리고 늘 그랬지만 바나나를 판매하는 곳이 있으면 나는 늘 그곳에서 바나나를 한 개씩 비상식량으로 구비해 두었다.


이탈리안 알베르토

까미노길이 걷기에 정말 최적화되어 있긴 하지만 조용한 걷기 명상을 하기엔 너무 순례자가 많다. 그래서 거리 간격도 얼마 안 되게 뒤만 돌아보면 누군가 나보다 빠른 템포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늘 그렇지만 순간의 정적을 깨는 것은 “브엔까미노” 인사이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 인이 오는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한국처럼 매일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산을 타러 오는 산할아버지처럼 알베르토는 가방에 스피커를 매달아 놓고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걷고 있었다. 길의 고단함을 달래는 각자의 방식 중 가장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이름은 알베르토! 우리는 통성명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 밝고 명랑한 이탈리안 인지라 그곳에 있던 유일한 아시아 인인 나를 알베르토도 기억한 듯싶다.


갑자기 길을 걷다 말고 알베르토 이야기를 왜 하냐면 나는 누군가 뒤통수 뒤에서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려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노래가 힘이라도 있듯 지친 기색 없이 풍경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그가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노래 부르는 것도 웃기고 황당했다. 당당하게 노래를 하는 게 소음을 유발한다는 생각에 웃기면서도 그때까지는 황당한 뭔가가 지나갔다 생각했던 것 같다.


“이어폰도 안 끼고 굳이 모두가 다 들리게 노래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며 민폐를 끼치며 다니는 걸까라고 말이다. “


그렇게 한 발짝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것까진 아니어도 노래를 들으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은 꾸준히 해오고 있던 터라 어느 순간 오롯이 나만 있던 길 위에서 핸드폰의 볼륨을 키우고 노래를 틀고 허밍을 하며 알베르토처럼 걷기 시작했다.


리듬에 맞춰 허밍을 하면서 걸어가는데 길을 걸으며 느꼈던 짐의 무게와 고된 느낌이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알베르토가 왜 그렇게 노래를 틀어놓고 노래를 크게 부르며 걸어가는지 이해하게 됐다.

아직 크게 노래를 부르진 않았지만 길을 즐기며 나아가는 한 발짝의 진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든 경험해 봐야 굳어진 마음도 녹일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일보의 진보였다.



푸드트럭을 지나 줄곧 교차로와 밭 한가운데 생뚱맞게 서 있던 나무들이 한 폭의 달리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우리 순례자는 이 더위에 녹고 있고 나무는 중력을 받으며 이 땅에 서있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외관을 망친다고 잘라버렸겠지?


“달리의 늘어진 시계가 추상화로 유명한데 이건 뭐 완전 풍경화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이는 땅의 열기가 순례자들을 한 명 한 명씩 잡아먹을 기세로 올라왔다.


화장실

드디어 배에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신호가 왔다. 생리현상은 어떻게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큰 나무들이 우거져 나 정도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말이다.

교차로가 아주 멀리 보이긴 했으나 제발 차가 지나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앞쪽 인도에서는 이탈리아 로마커플이 앞을 지나갔다. 약간의 도랑이 있고, 덤블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너무 참았었는지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정말 이런 얘기를 안 쓰고 싶지만 나는 카미노길의 생리현상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화장실 문제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덤블을 해치고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국룰이긴 하지 마 볼일을 보고 나면 물을 마시고 싶어 진다.


휴식처

마침 길 중간에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휴식처가 있어서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려 그곳으로 움직였다.

내 옆을 지나가던 벚꽃펜던트를 매단 아시아 사람이 나와 동시에 휴식처에 들어왔다.

나는 사실 벚꽃을 보자마자 일본사람임을 직감했다.


질문

그곳에 나와 일본인 순례자 그리고 로마 커플이 함께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의 질문은 항상 비슷하다.


질문 1: ”왜 카미노 길을 걷는가? “


일본인 순례자의 경우 남편 회사 파견으로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다고 소개를 했다.

로마커플의 경우 회사계약이 끝나고 휴식차 걷고 있다고 한다.


질문 2: 유독 많은 한국인들이 유럽까지 가서 카미노 길을 걷고 있는가?


답변: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한국인들 역시 당신들과 비슷해요. 나 역시 회사 계약 기간이 끝났고, 한국이 아닌 곳으로 떠나 스스로의 답을 찾고 싶어서겠죠. 최근에 산티아고 영화를 유명방송인(손미나 님)이 만들면서 대중에게 미디어로 노출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길을 걷느냐는 이야기에 다시금 생각이 깊어졌다.


유독 한국인은 카미노길에 열광하는 걸까?

(지금의 생각이지만 타인의 시선과 생각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 아닐까?)


땀이 식을 때 즈음 일본순례자는 먼저 길을 떠났고, 저기 한 블록은 멀리서 빠르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로마커플 여자분은 무릎 상태가 안 좋아 자주 쉬는 듯 보였다. 내 생각이지만 다리가 너무 얇아서 무릎보호대가 딱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도착할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에서 조만간 캐티를 만날 것만 고대하며 다시 길을 나아갔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은 뜨겁게 덥혀진 대지를 디디며 한 발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바그다드 카페(1987년작)


바그다드 카페는 나에게 버려지고 지친 영혼을 그곳에서 우두커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영화 속에서 나오는 커피 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꽉 채웠던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영화이다.


 미국여행을 왔던 주인공은 남편과 다투고 어느 외딴 숙박업소인 바그다드 카페에 다다른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그녀의 옷은 목까지 채워 올린 단추처럼 그녀의 삶 역시 답답하게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었다. 극이 진행되며 그녀의 삶은 바그다드 카페의 구성원들과 어우러지며 점점 그녀의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간다. 길을 잃은 영혼을 위로해 줬던 영화였다.


나는 이 작품을 고등학교 때 영화 감상부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 산골 기숙사에 살던 고등학교 여고생이었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외딴 사막의 카페라는 지리적 특색이 이 영화 깊숙이 감정이입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었다.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칼자딜라 역시 외딴 사막 마을의 바그다드 카페처럼 지나가는 순례객들에게는 그들만의 오아시스를 만들어내는 곳이니까 말이다.


도시는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손끝으로 닿을 듯 도착할 것 같이 느껴졌으나 길이 제법 길었다. 언덕을 하나 넘자 열섬 현상으로 생긴 신기루처럼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도착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입구 테라스에 앉아 열을 식히며 맥주를 마시는 이탈리안 무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길 중간중간마다 수영장이 보이는 알베르게 광고판을 보며 나는 도착하면 수영장이 있는 숙소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오늘도 해냈음을 스스로 응원했다.


멀리서도 아까 휴게소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일본인 순례자가 오른쪽 방향의 숙소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같이 텀이 긴 길에서는 칼자딜라 데 라 쿠에바는 모두에게 소중한 휴식처였다.

아마 그런 이유로 안 나와 수잔 그리고 캐시가 함께 모여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칼자딜라 데 라 쿠에바 Callzadilla de la Cueza 도착/ 13:49

나는 더위를 한껏 먹은 채로 마을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생각할 여유도 가지지 않고 숙소가 보이는 곳으로 직진했다. 두 숙소가 한 건물로 붙어있는 것 같은 외관에 같은 숙소로 착각해서 바로 옆 숙소인 Albergue de Peregrions de Calzadilla de la Cueza로 들어갔다.


여기 숙소는 공립 숙소임에도 새롭게 리뉴얼을 해서 정말 깨끗하고 좋았다.

바로 옆 숙소인 줄 알고 들어가 나는 알아보지도 않고 체크인을 해버렸다. 수영장이 없는 것이 딱 한 개 단점이었다. 진짜 웃긴 게 벽한 개 차이로 수영장을 즐길 수 없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칼자딜라 쿠에자에 무니시팔과 카미노리얼 두개의 알베르게


내가 가고 싶었던 숙소는 사설 숙소로 이름은 Camino Real Albergue이다.

하지만 이 실수는 나에게 행운이었을지 모른다. 이탈리아 무리들은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나는 조용히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0층에서 계단을 호스트가 안내하는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엔 보스턴에서 온 미국 순례자 ”세네카“가 있었다.

그녀는 침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친구는 이곳 칼자딜라에서 첫 만남 이후 카미노 길 끝까지 계속 마주친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 내내 자주 마주쳤지만 서로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체크인을 들어온 시카고 여자분이 있었는데, 인사를 건넬 때마다 어두운 인상에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서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시카고 순례자는 원래 내 옆자리였으나 구석 자리로 배정을 바꾸고 침대에 타월로 벽을 친 후 시야를 가려 버렸다. 걸음걸이도 그렇고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곳인 만큼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짐을 풀고 때마침 도착한 엄마의 안부문자를 보고는 숙소사진과 답변문자를 보냈다.

어느덧 400km를 넘게 길을 걷다 보니 멀어진 거리와 시차만큼이나 한국에서의 일들이 더 멀게 느껴졌다.

그리움보다는 나에게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주는 것이 더 커져갔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바깥으로 나와 마당에 젖은 빨래를 널고는 옆 숙소를 보았는데, 거기서 다들 수영을 하고 있었다.


카미노 리얼 숙소는 리셉션이 열려 있어서 무니시팔 알베르게에서는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숙소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옆 숙소 수영장 풀에 뛰어들었다.



이곳이 천국이야!

수영을 하던 한국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천국이야!”라고 말하며 입수를 했고, 수영장 옆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탈리아 무리 중 큐티 이탈리안과 나는 주먹을 쿵 부딪히며 인사를 나눴다.

나와 한번 식사한 게 다인데 정말 이탈리안들은 친절하다.


나는 옆숙소 사람인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알베르게 내부에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너무 덥고 지쳐서 일단 풀장으로 뛰어들고 봤다. 내가 워낙 물을 좋아해서 더 앞뒤 보질 않고 뛰어들었고, 물에 뛰어든 모습을 우리 숙소 호스트도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암묵적 입장 승인이라 생각했다.


벽하나 차이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말이다.


칼자딜라에는 성당도 문이 닫혀있고, 있는 것이라곤 슈퍼마켓과 레스토랑밖에 없었다.

집을 버리고 떠나 오래된 마을 건물들만 남아 오롯이 순례자들을 위해 남겨진 마을이었다.


수영장 안에서 금발의 곱슬머리 백인여자가 물괴처럼 잠영을 했다.

인사를 하자 호주 특유의 발음이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대학교를 마치고 왔다고 한다.

수영장 수질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친 근육을 잠시 쉬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참을 물놀이를 하다가 일광욕을 즐겼다. 앉아 있으니 출출하기도 하고 캐시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재회

다시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카미노 리얼에서 운영하는 카페테라스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보냈다.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뽀송뽀송하고 모든 게 새 거였던 우리의 모습은 이제 온대 간데없다.

드디어 캐시가 나타났다.


이게 얼마만인가?


우리는 팜플로나 이후 처음 만났는데 사실 그간 연락을 꾸준히 하고 지냈던 사이가 아니라 서먹할 것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원래 초반에 만난 사이일수록 더 끈끈한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와 성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더 이상 식중독으로 골골되던 나도 없고, 태풍이 왔던 피레네 산맥을 힘겹게 넘던 캐시의 모습은 온대 간대 없이 더 이상 초보 순례자의 모습이 아니다. 빨리도 느리지도 않게 각자의 속도에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띤또 데 베라노를 한잔씩 시켜 놓고 마을을 들어오거나 지나치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이곳을 내가 걷고 있음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국적도 성향도 걸음도 다르지만 오로지 한 가지 목적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걸어가는 것으로 한 사람처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걷고 있다는 자체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었는데 전통 방식으로 머리 위를 깎고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 두 분이 등산화와 오스프리 배낭을 메고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역사책 속에서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걸었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짐을 풀고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며 수사님들은 휴식을 하셨다.

마치 한국의 MZ 스님들처럼 이 수도사님들 알고 보니 미국분들이었고, 모든 최신문물을 다루고 계셨다.

단지 옷만 전통 수도사 복장일 뿐이다.


전통 수도사 복장으로 길을 걷던 MZ수도승


틴토 데 베라노가 바닥을 드러내고 곧 4시쯤 되는 시에스타 시간이라 카페가 한산했다.

나와 캐시는 팜플로나에서 함께 먹었던 햄버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간의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캐시는 저녁식사 예약을 어디에서 했는지 물었다.

왜냐하면 여기는 슈퍼마켓도 너무 작아서 해 먹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캐시와 오랜 기간 알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이곳 칼자딜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오래 알던 사람처럼 가까워졌다. 캐시는 숙소 아래 있는 레스토랑에 저녁예약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나도 예약을 하러 갔으나 7시 예약이 다 찬 상태라 8시 예약을 걸어놔야 했다.


칼자딜라에 머무는 모든 순례자가 여기 한 곳에서 모두 식사를 하는 듯 보였다.



저녁 식사 Los Canarios Albergue-Restaurante

캐시는 7시로 예약을 한상태라 잠깐 시에스타를 갖고 7시에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식당의 분위기는 혼자 먹는 사람이 없이 연합해서 합석하는 분위기였다.


나와 캐시는 2인용 식탁에 앉아 캐시가 먼저 식사하는 걸 보며 대화를 함께 나눴다.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 서빙과 프런트는 남자 사장님 혼자 했고, 요리는 여자 요리사 한 명이었다. 정신없이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고 우리 테이블에도 기본 빵이 제공돼서 캐시가 빵을 권했다. 자연스럽게 빵을 뜯으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화하게 되었다. 내가 이숙소를 묵지 않아 정확하지 않아 3차시 안까지 캐시와 상의하면서 내부구조를 수정에 수정을 거쳐 스케치를 마쳤다.


3차 작업으로 완성한 내부구조


여기 주인아저씨가 좋았던 이유는 혼자 서빙을 함에도 항상 친절함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작은 공간에 많은 순례자들이 가득 차 그날의 피로를 푸느라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화를 하며 오랜 시간 식사를 했던 것 같다.


캐시의 산티아고 길

캐시는 처음 팜플로나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여유롭고 인자한 표정이 자연스럽게 풍겨 나와 보는 나까지도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캐시의 길 역시 쉬운 길이 없었다. 피레네 고비를 넘긴 후에도 우연히 들른 작은 마을 성당에서 수녀님께 받은 성당의 펜던트 목걸이의 추억과 힘들어서 택시를 부른 일과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했던 것 같다.


나의 산티아고 이야기

나는 부르고스에 도착해 우연히 만나게 된 프랑스 귀인 몽지아의 도움으로 마드리드 여행휴가를 무사히 다녀온 일과 여행을 다녀와 부르고스에서 다시 따르다 호스를 가는 길에 만난 신비로운 호주 순례자의 걷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후 이테로 데 라 베가에 우연히 들러 순례길 초반 로스 아르고스에서 만났던 순례자 친구가 그곳 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서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휴식을 취했던 이야기 그리고 심각한 한국인 가이드의 세계최강 코골이 이야기까지.  


우리는 그간 각자의 걸어온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어냈다. 9시가 넘어서 식사를 다 마치고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라 부담이 없다. 숙소 1층 방 창문으로 카미노 리얼 마당이 보이는데 여전히 이탈리안 무리들은 수영장 옆 마당에서 맥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등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방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채워져 있었지만 길게 늘어선 침대의 2층 침대에서 자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남녀 혼용 벙커 숙소임에도 호스트가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것처럼 구분해 두었다. 옆자리엔 자전거 순례자 무리들이 누워있었다. 자전거용 짐 가방모양이 달라서 금방 알 수 있다. 큰 숙소 치고는 조용하게 귀마개를 하고 잘 잔 듯싶다.

자전거 순례자들은 보통 하루 80KM 정도를 하루거리로 달린다고 한다.


태양은 뜨겁고 먼지바람을 잃으키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에 카미노길은 친절한 길이 아니다. 길이 정말 위험하다. 보통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면 완주를 마칠 수 있다고 한다.


이 더운 날씨에 헬멧까지 쓰고 페달을 밟기 때문에 열사병으로 더위를 먹고 실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피레네 같은 산을 넘는 게 자전거를 이고 지고 넘어야 하는 것은 보통 체력으로는 안될 것 같다.

자전거 짐가방



숙소에 돌아왔을 때 세네카는 여전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서 계속 알람이 수시로 울려서 내가 귀마개를 가져간 것이 얼마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캐시와 나는 내일 새벽 사하군까지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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