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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점프

아스토르가 가는 길(Astorga)

by 양작가


2023년 10월 16일 숙소 안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게 일찍 눈이 떠진다. 여전히 하늘이 언제고 비가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하갈언니를 만나서 1시 즈음 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으러 공용주방으로 내려왔다.

주방에는 시리얼과 토스트, 커피 각종 주스들이 비취되어 있었다.

출발 전 아침을 먹으려는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배식의 개념이 아니어서 먹는 양도 눈치 안 보고 먹을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가격도 젠트릭의 반값인데 아침까지 주니까 금상 첨화이다.



하갈언니와의 조우

하갈 언니가 숙소로 올 때까지 짐을 맡기기로 했다. 언니와 만나서 브런치도 먹고 그간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런 다음 버스로 갈지 걸을지 정할 것이라 다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짐과 가방을 싸서 짐 보관소에 짐을 두고 공동공간에 앉아 언니를 기다렸다. 주말이라 어제 그제는 핸드폰 유심을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언니와 함께 유심을 보러 갈 것이다.


언니는 발목 부상과 이스라엔 전쟁 발발 등의 여러 이유로 순례길 걷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전쟁 발발 이후 유럽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바로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기차로 레온에 왔다. 언니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일어난 계엄사태와 탄핵 시위를 체험하며 더 크게 체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순례길에서 몇번 본 사이였고 각자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임에도 서로를 이해하는 좋으누친구사이였다. 단지 오래간만에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갑고 좋은 것이다.

구글 맵 공유를 통해 언니가 드디어 숙소에 왔다.


울양말

내가 묵는 숙소 추천을 통해 오늘 레온에서 묵을 숙소로 Hostel Quartier León Jabalquinto 숙소를 정했다고 했다.

매니저에게 부탁해 언니 짐을 미리 맡겨 두었다.

우리는 바로 밖으로 나와서 숙소 근처에 있는 트레킹 용품 점으로 향했다.


왜냐 하면 울 양말이 물집도 안 잡히고 추위와 완충작용에 탁월하다고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추가로 입을 외투재킷과 양말을 보러 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델은 없었다. 나는 그때 그냥 벼룩시장에서 외투를 한 개 장만할 것을 바로 후회가 들었다. 오래간만에 반가웠으나 안나나 조셉 아저씨처럼 생기가 있지 않았다.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했다.



핸드폰 U-sim

우리는 등산용품을 지나 젠트릭이 있던 분수광장 쪽으로 이동을 했다. 어제 강가로 가면서 유심칩 판매점들을 알아 두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Vodafone 그리고 Mobistar, Orange 매장을 찾아다니며 겨우 오렌지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사실 바로 지금 당장 유심을 꽂는 다면 아무곳에서나 유심칩을 사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내 유심 만료일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10월 중순에 시작일을 설정해서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다들 판매하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


서울에서도 기간을 설정하고 구입을 했었고, 심지어 팜플로나에서도 시작 날짜를 맞춰서 해줬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다 안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안 되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안 해주는 분위기 ㅜㅜ 다들 그냥 바로 지금 꽂는 거만 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보다폰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들은 보다폰으로 유심을 구입해 가셨다.

겨우 오렌지에서 가능하다는 답을 받아 유심칩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세 개 통신사 중에 대해 얘기하자면 모비스타 <보다폰 <오렌지 순으로 가격대가 비싸진다.

한국으로 치면 U+ <KT <SK와 비슷하게 보면 될 것 같다. 가격만 봐도 오렌지가 가장 비싸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로 늦게 찾아갔던 것이다. 가격만큼 서비스나 대리점도 가장 많다.


언니는 유심시스템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듯 설명을 원했다.

발이 아파서 인지 언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한국처럼 계좌를 통해 자동이체 시스템으로 전화번호를 등록하려면 유럽에서 신용을 보장할 등록이 되어 있어야지만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처럼 장기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에게는 그 지역에서 인터넷 서칭과 자료수집을 위해 데이터는 통신장비를 이용하는데 꼭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매번 유심을 구매하는 것이다.


만약 1년 여행 계획을 가지고 있거나 구체적인 주거 지역이 있는 경우 한국에서 미리 3달치 유심칩을 준비해 가는 게 훨씬 편리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언니는 오렌지 대리점 직원의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야 비로소 유심 시스템을 이해를 했다.

한국으로 치면 알뜰폰 같은 제도인 것을.


언니는 로밍을 해서 유럽에 왔기 때문에 매번 검색을 할 때마다 데이터 비용이 로밍비용으로 처리되게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걸 알았다면 순례길 초반부터 유심을 구매했을 거라고 말이다.

어렵사리 유심을 구입하고 몇 시인지 시간을 체크했다.

아참! 유심 구매시 꼭 여권을 챙겨 가야한다.



레온 유니버시떼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겉옷을 사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고는 불현듯 팜플로나에서 어떤 순례자가 입고 다녔던 “Pamplona university”라 쓰인 후드티를 기억해 냈다. 그러곤 레온 성당 바로 앞에 줄지어 있는 기념품 샵으로 향했다.


그때 로고 심벌이 꽤 예뻤어서 기념품으로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는 “산티아고 유니버시떼” 로고가 적인 후드티를 입은 나를 보며 너무 웃기다며 “Leon“이라고 적힌 점퍼가 나은 거 같다고 했다. 기념품 샵을 두세 군데를 돌아다니며 입어 봤었던 것 같다.


언니는 너무 웃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내 발견한 네이비색에 에폭시로 레온 사자 문양이 박혀 있는 후드 재킷을 구매했다.

안쪽에 보온 처리가 되어 있어서 한결 따뜻하다. 사이즈도 XS이 있어서 나는 그걸 구매해 얇은 빨강 윈드재킷 그리고 레온 후드티를 껴입고 나서 노란색 고어텍스 재킷을 입었다. 정말 안 샀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마 길 후반부 내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분명 감기에 걸려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약국

그리고 언니 발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싶어서 약국을 여러 곳 가서 상담을 받았다.

언니의 발상태에는 걷는 거는 무리인 데다 찜질을 해줘야 하는데 숙소에서 찜질기가 있는 게 아니라 여의치 않는 상황이었다.



카페 Taberna La Genuina

오전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젠트릭이 있던 산 마르코 광장쪽 레온 사자상(Ayuntamiento de León - Consistorio de San Marcelo ) 앞 카페테라스에 앉아 드디어 하몽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다. 언니는 베지테리언이라 먹을 만한 게 많이 없었다.


나는 시간을 다시 체크하고 언니에게 버스를 탈지 걸을지 고민이라고 하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테라스에 앉아 주문을 하자마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나 걷기 싫어지는데..


나: 오늘 걸을지 버스 탈지 고민이에요. 날이 너무 안 좋네요.

하갈언니: 그냥 기차 타는 건 어때? 버스터미널 바로 옆이 기차역이야. 내가 지금 거기서 온 거잖아.


검색을 해보니 버스시간은 지났지만 기차는 30분마다 Astorga까지 가는 표가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Omio앱에는 그렇게 많은 정보가 있는 게 아니어서 직접 역에 가서 시간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피어난 호기심은 한 번은 해봐야겠다로 바뀌었다. 만약 레온에서 시도를 안 했다면 다른 어딘가 도시에서 또다시 분명 시도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숙소에 다시 가서 내 가방을 가지고 언니는 체크인을 하고는 언니와 유기농 용품을 파는 슈퍼에 함께 가서 장을 보고 헤어지기로 했다.



유기농 슈퍼마켓

언니는 생선도 안 먹는 완전 베지테리언을 하고 있어서 스페인에서 더 먹을 게 없었다. 그래서 이곳 유기농 마켓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내 안내를 받아 함께 마트 쇼핑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짐을 메고 강가를 지나 레온 외곽에 있는 기차역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정말 기차역 바로 옆이 버스 터미널이었다는 것이다. 오미오 앱으로 구매할 경우 수수료가 많이 비싼 편인데 직접 기차역에서 표를 구매했더니 5유로밖에 안 했다. 심지어 동키서비스가 6유로인데 정말 저렴하다.

레온에서 아스토르가 까지는 기차로 46킬로미터의 거리였다. 이 거리를 기차를 타면 단 30분 만에 도착한다.

대략 하루 23킬로미터를 간다고 계산했을 때 이틀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레온 기차역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고 사실 200km만 걷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던 길에서 추가적으로 생긴 나의 목표에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막상 티켓을 사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10월 중순으로 넘어서고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떨어지며 풍경도 주황 빨강 빛깔로 바뀌고 있었다.

뜨겁게 타는 태양이 나를 힘들게 했었는데 이제는 추위와 비가 길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의 후반부 길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걸었다면 아마도 25km 지점의 도시 San Martin del Camino 그리고 그다음 날 Astorga를 도착했을 것이다.

내가 지나쳐 보낼 12개의 마을들을 구글로 검색해 봤다.


기차역에 앉아 출발시간 4시까지 3시간을 대기하면서 그냥 걸을까 고민을 계속 했다. 바깥 날씨를 보면 쉽사리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걸을 때 못했던 생각들이 기차를 기다리며 물밀듯이 밀려왔다.


빠르고 편리하게 살던 삶에서 떨어져 나와 온전히 내 걸음 하나하나를 완성해 나가는데 정신적으로는 점점 선명하게 맑아졌지만 육체적으로 분명 많이 지쳐 있었다.



대기시간

10.45유로에 커피와 신선한 오렌지까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역사 내에 있는 음식점에서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진짜 끊임 먹이 먹을 곳이 보이면 먹는 것 같다.

이렇게 길을 걷고 처음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은 정말 잘한 일 같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구간점프

5시에 출발해서 30분 만에 아스토르가에 도착하고 나니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현타가 왔던 것 같다.

효율로 따지자면 산티아고 순례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나에게 순례길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평생 생각을 굳혔던 옳고 그름을 무너뜨리는 도전이었다.

중요포인트를 점프했지만 대신 시간과 효율로 50km를 대체했다.




아스토르가

아스토르가는 재미있는 도시이다.

초콜릿 생산 공장이 있고, 레온 근교에 있는 마을로 고즈넉하고 역사가 깊어 보이는 도시였다.

역에 도착해 기차역을 빠져나오면서 망원동 거리 어딘가를 걷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구글을 검색해서 Albergue San Javier숙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날이 어두워지면서 더 굵어지는 것 같다.

내 노란 고어텍스 잠바를 후드까지 쓰고 배낭 방수커버로 씌우고 걷고 있다. 이 정도의 빗방울은 이제 익숙하다.


캐시가 얘기해 줬던 아스토르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초콜릿공장이 있어서 거기서 생산한 신선한 초콜릿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레온에서 젠트릭호스텔 아래 있는 카페에서 지넬과 아침에 먹었던 추로스에 따끈하게 녹여진 초콜릿이 그렇게 맛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풍경

아스토르가 숙소로 가는 길에는 마을 중심부 공사를 하고 있는지 마치 망원동 거리를 걷다가 광화문을 지나 윗동네를 온 것 같이 조용한 성벽을 둘러싸고 조용한 북촌이 생각났다.


망원동과 북촌을 합쳐놓은 느낌이었달까? 레온에서 기차를 타고 아쉬워했던 마음은 뒤로 하고 나는 금세 아스토르가의 매력에 빠졌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중소 도시가 좋다. 있을게 다 있으면서 조용하고 현지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Albergue San Javier

느지막이 전화로 예약한 아스토르가 숙소에 6시가 넘어 마지막 손님으로 숙소에 도착했다.

공사 중이라 바로 갈 수가 없어서 길의 골목 골목을 굽이굽이 뒤지며 숙소를 찾았다. 숙소의 외관은 유럽 중세 돌집이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내부는 통나무로 만든 집인데 들어가자마자 오픈식 공유주방과 거실이 있고 누군가 안뜰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비 오는 밤 기타 선율이 이곳을 금세 따뜻한 온기의 낭만적인 분위기로 바꿔 놓았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안쪽 뜰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햇살을 쬐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공유주방 앞에는 반쯤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소파에 순례자들이 앉아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방 식탁엔 나이 든 노부부가 식사 중이었다. 나 역시 짐을 풀고 식사를 하거나 슈퍼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야 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룸메이트

방은 10인실 벙커룸이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나무소리가 삐걱삐걱 나는 게 정감이 갔다.

부직포 시트만 제공하던 중간 길과 달리 방마다 담요가 비치되어 있다. 웬만하면 진드기나 배드버그가 있을까 싶어서 안 쓰고 싶지만, 추운데 장사 없다.

방에는 총 7명의 순례자가 묵고 있고 콘센트는 문 앞 네 개가 다여서 다들 거기다가 아웅다웅 핸드폰을 충전해 두고 있다. 방 입구 왼쪽 1층에는 스웨덴 순례자 이층은 나도 모름 창가 침대는 캐나다 노부부.


오른쪽 문 쪽 침대 1층은 내 자리, 옆자리 한국인 아줌마 순례자, 창가 침대 역시 한국인 순례자 해서 이렇게 총 7명이 있었다. 방에 들어갔을 때 한국 여자분 두 분이 계셨는데 한분은 자고 있었고, 다른 한분은 아이패드로 일정을 체크 중이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씩 보고는 인사도 안 건넨다. 왠지 모르겠지만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 육감이란 게 얼마나 과학인지 아는가? 그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겠다.


나는 짐을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주방에 있던 노부부에게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지도를 펴고 동네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주셨다. 나는 가볍게 에코백을 들고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왔다.



Convento de Santi Spiritus, Franciscanas TOR 성당 미사

노부부가 알려준 대로 슈퍼마켓을 찾아 밖으로 나왔지만 골목이 구불구불한 길은 그냥 익숙한대로 아까 들어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고 돌아가다 보니 작은 성당이 보였다. 나는 문이 열려 있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 미사를 듣게 됐다. 장 보러 나왔다가 갑자기 성당 미사를 듣늗다.


이거 완전 운이 좋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경건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나는 후반부 길을 무사히 걸을 수 있게 도와달라 기도했다. 성당의 분위기가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 같다. 나는 한참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가 저녁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서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Supermercado C. Alcampo 슈퍼마켓

레스토랑이 보였지만 아직 시에스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숙소를 들어오기 전 봐놨던 대형 마트에 가서 원래는 으레 일상적으로 내일 걸을 때 먹을 바나나와 아침에 먹을 아침거리를 살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큰 마트 규모에 신선 고기 코너를 어슬렁 거렸다.


나: 혹시 저 혼자 먹으려고 하는데 목살 1 덩이도 판매하나요?

마트직원:해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200g도 되는 목살 스테이크 2점을 구매했다. 갑자기 숙소에 가서 음식을 해 먹게 생겼다.

요리를 한창 해 먹고 싶었을 때는 주방이 없었어서 못해 먹었는데 오늘은 레스토랑에 가서 사 먹으려고 했더니 상황이 또 이렇게 돼버렸다. 참 알 수가 없다.

내가 여태껏 마주친 슈퍼마켓과 점원들 중에 가장 친절하다고 느낀 곳이었다.


마트에서 목살과 샐러드를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스토르가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비가 내리는 오후에 도착한 나는 거의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금세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저녁

숙소 부엌은 인덕션이 8구짜리라 여럿이서 요리를 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마침 숙소로 도착하자 다들 식사준비를 위해 못 보던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내 옆에서 감자를 삶고 있던 키 큰 여자분에게 여기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자 자리를 옆으로 비켜 주었다.


나는 마트에서 사 온 돼지 목살 한 덩이를 구우며 괜찮으시면 함께 먹자고 얘길 건넸다.

그분은 스웨덴 분이었고, 본인은 채식주의자라 고기는 안 먹지만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나는 누군가 두고 간 마늘을 까서 채를 썰고 사온 샐러드를 덜어 한상을 차렸다.


한국인 여성 순례자

일전에도 얘기했었지만 순례길에서 한국인 비율이 높은 것에 비해 여성의 비율이 높지 못하다.

게다가 혼자 걷고 있다면 더 그렇다. 나와 스웨덴 순례자분 둘이서 주방을 독차지하고 있었어서 인덕션을 추가로 사용할 공간이 없었다.


한국 여성 순례자 분은 계란을 삶으려고 기다리는 듯 보였다. 눈이 마주쳐도 피하는 분위기로 뻗뻗하게 서있길래 살짝 그 싸함이 과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기를 다 굽고 후추를 뿌리고 간을 하기 위해 주방에 SAL(소금)이라고 쓰여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기에 뿌려댔다. 그런데 뿌려도 짠맛이 전혀 안 났다. 나는 이거 소금이 맞는지 스웨덴 순례자에게 물어봤더니 이거 소금이 아니라 베이킹 소다도 Sal이라고 쓰여 있다는 걸 알려줬다.


@_@ 헐….


베이킹 소다 뿌리는데도 아무도 뭐라고 안 했냐고 했더니, 너네 나라에서는 그걸 뿌려 먹는가 보다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와우~

놀랍다 놀라워 ㅜㅜ


나는 한국인 여성 순례자분과 눈이 마주쳐서 혹시 베이킹 소다와 소금 스페인어 단어가 똑같다는 걸 알고 계셨냐고 말했더니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투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답이 왔다.


“알고 있었어요!”


스웨덴 순례자분은 그분의 말투를 듣고는 놀란 듯 나와 눈이 마주쳤다.(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왜 저렇게 쌀쌀맞은 태도를 보이는지 의아하다는 의미를 눈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갸우뚱하고 무시하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고기를 구워 먹은 건 Viana에서 하갈 언니와 함께 먹었던 저녁식사 이후 처음이다.



휴식시간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거실에는 아까 기타를 치던 레게머리 칠레 순례자와 북유럽 여자분이 있었다. 이 둘은 국지NGO활동을 하다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칠레 순례자의 기타 연주가 너무 좋다며 다들 박수를 쳐주었다.


나와 식사를 함께 했던 스웨덴 순례자분은 북쪽길로 해서 내려왔다고 얘기해 주셨다. 우리는 한참 소파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순례자들이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근육 통증과 의료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는 보타겔 Voltadol Forte과 괄사를 가지고 내려와 스웨덴 분에게 직접 마사지를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화장실

1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처음에는 정감 있었는데 삐그덕 소리가 새벽에 모두 잘 때도 난다면 난감할 것 같다. 화장실은 넉넉하게 분포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땀을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샤워는 하지 않았다. 감기라도 들리면 큰일이니까.



취침

밤이 추울 것 같아 거실 밖에 비취 된 담요를 하나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빨래를 말리기 위해 주렁주렁 걸어놓고 나름 머플러로 침대 벽을 만들어서 시야를 차단했다. 레온 벼룩시장에서 보자기를 샀으면 더 그럴듯한 벽이 완성 됐을 텐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떠올랐다. 나는 침대 위에 펼쳐놓은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에서 아스토르가까지 짧은 일정이었지만 오늘 뭔가 미션을 많이 해치운 느낌이다.

옷도 사고, 유심도 샀고, 하갈언니도 만나고, 기차도 타고 아스토르가까지 와 있으니 말이다.

나의 두 번째 휴가는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남은 길은 이 두 발로 걸을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걷기 시작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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