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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지키는 길

라바넬 델 카미노 가는 길(Rabanel del Camino)

by 양작가
신비로운 길
영혼의 산은 어디에 있나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며, 그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으며 무엇을 가져가야 하며,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내일은 여정의 또 다른 정점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인생의 고약함에도 부담 없이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정상에 어떤 선물을 예치하시겠습니까?
자신을 불신하고 싸우기 전에 잠을 자세요.
용기를 내기에 너무 늦지 않은 내일입니다.
존 암스트롱

출처: A Guidebook to the Camino de Santiago - John brierley


2023년 10월 17일 새벽 5시

한국인 순례자들 대부분이 가장 일찍 길을 출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일어나 한 명이 일어나는 가장 일찍 일어나는 시간이 대부분 새벽 4시~5시 즈음이다.


한국인 여성 순례자 분들은 전날 아주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오늘 역시 가장 먼저 일어나 갈 준비를 했다. 아마 그 방 사람들 대부분 나 빼고 50대 이상의 연령이었다. 아마도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한국인 여성 순례자 2분은 6시 전에 방을 빠져나가면서 모두가 깨어났다.


침대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을 때 캐나다 순례자 할아버지는 바닥에 떨어진 묵주를 나에게 주면서 이 묵주 아무래도 한국여성 분 것 같은데 어떡하지? 라고 말하며 걱정을 했다. 그때 마침 어제 주방에서 새침하게 쌀쌀맞은 한국인여성 순례자가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무언가 떨어진 물건을 찾는 제스처를 취했다.


한국인 여성 순례자에게 묵주를 건네고 저기 캐나다분이 찾으셨다고 말을 건네자 아주 공손하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순간 정적이 흘렀었는데 그분이 방을 빠져나가고 입이 터진 캐나다 노부부는 저 사람들 어제 숙소 들어와서도 인사도 안 하고 차갑게 굴었다며 말이 터져 나왔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 참 보기에 그랬다.

조용히 혼자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 2인실 방을 잡는 게 맞을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매너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굳이 친절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오늘 역시 비가 내릴락 말락 하는 날씨였다.

새벽 공기에 수증기가 가득 차있었다. 나는 짐을 가지고 내려와 냉장고에 넣어뒀던 샐러드를 꺼내 먹고는 출발 준비를 했다.



7시 12분 출발!

어느새 북적이는 숙소엔 순례자들이 빠져나가서 한산해졌다.

나는 혹시 방에 두고 가게 없는지 한번 더 체크 후 오늘은 배낭을 메고 7시 12분 밖으로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추운 새벽길을 빠져나와 오늘 라바넬 델 까미노까지 걷는 길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었다.


일상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리란 것만 생각하며 걸었지 이곳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경험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나는 라바넬 델 까미노에 숙소도 예약을 해둔 상태라 서두를 게 없는 길이었다.

이 유서 깊은 산 자비에르 알베르게에 고요한 풍경이 꽤나 나는 마음에 들어서 고요함을 잠시 감상을 하고 방명록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Vamos!



Cafetería Madrid

아스토르가를 빠져나가는 새벽길 노란색 화살표 길을 따라 걷다가 이른 아침부터 열려 있는 카페를 발견해서 무작정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새벽의 스산함에 기모 재킷까지 입고 나왔더니 벌써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비가 올 거라고 장담했던 이유는 하늘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나의 나무지팡이도 날씨의 영향으로 습기를 잔뜩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 바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는데 왼쪽에는 순례자 아저씨와 오른쪽에는 아스토르가 동네 아저씨와 주인장은 익숙한 듯 담소를 나누고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너무 더워서 기모 재킷을 배낭에 다시 정리해 넣었다. 아침 아스토르가를 빠져나와 고가 다리가 나타났다. 밤길이라 도로 옆을 지나가는 것은 더 위험했다.



가장 작은 예배당 Ermita del Ecce Homo

카페 마드리드를 나와 1.9km를 걷다가 어둠 속에서 이른 아침에도 켜져 있는 불빛에 이끌려 예배당으로 걸어갔다. 예배당 비석에는 한국어도 쓰여 있었고, 왠지 새벽에 불을 켜둔 느낌이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오는 유일하게 밤새 영업하는 술집이 떠올라 호기심에 예배당으로 향했다.


내가 예배당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문 입구에서는 길 초반에 마주쳤었던 미국인 순례자와 마주쳤다. 이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주 고도 비만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과는 로스 아르고스에 오스트리아 알베르게에서 함께 숙소에 묵었었다. 이분과 나는 통성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걷는 그룹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계시던 금발에 바비핑크 고어텍스를 입은 멋쟁이 동행여성분과 길을 가고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고는 구글 지도에서 알려주는 대로 다리를 건너 산길로 가기 시작했다.




잘못 들어선 길

예배당 앞길은 고가 도로를 가는 것이었는데 가끔씩 구글 안내가 알 수 없는 위치를 안내할 때가 꼭 있었다. 하필 그때가 지금이었다. 칠흑같이 어둡고 헷갈리는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길을 건너는 순례자의 불빛을 따라 예배당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서 다리 아래 샛길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랜턴에 의지해 점점 수풀을 헤치며 무서워서 유튜브 노래를 틀어놓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뒷쪽에서 “STOP IT!” 이라는 소리를 들렸다. 나는 순간 뒤를 돌아보니 고가 다리에서 사람들이 랜턴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망할….


옆길은 고속도로로 차들이 빠르게 질주해서 울타리가 쳐 있었기 때문에 건널목이 보이지 않았다. 영락없이 고속도로를 따라 숲길을 뚫고 가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누군가 나와 앞에 가던 순례자의 랜턴 불빛을 보고는 잘못 들어선 것을 바로 잡아 준 것이었다.


나는 다시 카미노 지도 앱을 켜고 구글 앱과 비교하며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섰다. 확인했다는 것을 랜턴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앞에 가던 순례자는 어느새 불빛이 멀리 사라져서 알려줄 수가 없었다.

소리를 못 듣고 뒤돌아보지 않았다면 나는 한참을 잘못된 길을 걷고 헤매었을 거란 생각이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고가도로로 돌아와 걷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나에게 위험을 알려준 순례자가 이미 길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감사함을 전할 길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날 아침 어려움을 당한 순례자가 있다면 꼭 내가 받은 이 포근한 천사의 보호를 나누겠다고 다짐했다.



천사의 보호를 받는 자

수비리 가는 길에서 식중독에 걸려 고생하며 가던 길에서 갑자기 캐나다 순례자 데비가 나타나 함께 길을 안내해 주고 함께 길을 걸어주었다면, 이번 아스토르가를 빠져나와 만난 예배당을 지나 잘못 들어선 길을 알려준 누군가를 통해 나는 다시 제대로 된 순례길로 들어서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할 수 있었다.


길을 걷기 전에 수두룩하게 시청했던 유투브속 순례자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하며 눈물을 터뜨린 이야기들을 봤었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나는 크게 고생하지 않고 제대로 된 길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 인가? 게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Murias de Rechivaldo / Bar Cris

새벽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동이 트고 발견한 카페에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장실 볼일을 본 후, 카페테리아 테라스에 앉아 두 번째 휴식시간을 가지며 카페콘레체를 마셨다.

해가 떴는데도 쌀쌀해진 날씨가 기온차가 크게 났다. 날이 추워지면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어지고 금방 지치는 느낌이 든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어온다.




길가에 핀 무궁화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이지만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 피어 있던 무궁화 말고 공원이나 일반적인 거리에서 무궁화를 별로 볼일이 없었다.


무궁화가 한번 뿌리를 내리면 엄청 깊게 자리 잡아서 다른 풀들을 다 죽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길을 걸을 때마다 보이는 스페인의 무궁화는 갈리시아 지방의 습한 기후에도 잘 맞는가 보다.


짙고 투박하게 건장한 무궁화를 보고 있으니 꽃인데 여리한 느낌이 아니라 튼튼하고 우직해서 길게 뻗은 순례길처럼 길게 길게 뻗어나가라는 응원의 메시지 같이 느껴졌다.


같은 스페인이라고 해도 중부와 동부 북부의 기후와 풀들만 봐도 이곳이 다른 지역이란 느낌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Santa Catalina de Somoza / Albergue El Caminante/ 3번째 브런치

산타 카탈리나 데 스무자의 마을 풍경은 파울로 코엘류의 한국판 표지 그림처럼 겹치는 마을들과 카페가 나타났다.


그리고 알베르게 엘 까미난테를 도착했을 때 멀리서도 태극기가 나를 잡아끌었다.

흙으로 지은 전통가옥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다 돌로 지은 집들의 외형이 산장분위기가 느껴진다.


점점 걸을수록 고도도 올라가고 있었다. 알베르게 엘 까미난떼에 도착했을 때 11시가 다 돼 가서 나는 3번째 식사를 하기로 했다.


토스타나 마물라다 (토스트와 잼)그리고 나랑하 쥬모(오렌지 쥬스)를 주문했다. 서비스로 치즈와 비스킷까지 나와서 브런치를 든든하게 먹은 것 같다. 이때부터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토스트는 금방 바깥바람에 차게 식어버렸다.


만약 아스토르가까지 기차를 타고 오지 않았다면 산타 카탈리나 데 스무자도 꽤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너무 추워서 빨리 먹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스에는 어제 기타를 쳤던 페루 순례자 커플이 있었다.



포도덩굴과 할아버지

길을 걷다가 다시 만난 포도나무가 길초반에 만났던 대규모 포도농장과는 다른 포도덩굴이 있었다.

사실 철조망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유지인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포도를 보자 자연스럽게 몸이 그쪽으로 갔다.


제버릇 남 주나?ㅋ ㅋㅋ 소싯적 포도 서리를 하던 버릇 어디 못 가니 포도를 따러 가는데 철조망 끝에 주인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나와 함께 앞서거니 하던 브라질 순례자는 자연스럽게 포도를 따서 먹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키득 거리며 포도를 땄고 심지어 이 브라질 순례자는 브라질 사람 특유의 친근감으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포도 따먹어도 되는지 허락까지 받았다.


역시 친화력 대단!!!


한국사람들이 감성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만난 남미사람들을 만나고는 한국사람들은 괭장히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감정을 누르며 사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본성이 감성적이긴 한데 교육을 받아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바뀐 상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본인 순례자 모모카상

계속 높고 낮은 오르막이 나타났다. 길을 걷는 누군가 옆으로 오는 걸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 이게 누군가?

엘 부르고 라네로 흙집에서 만났던 일본 순례자 모모카상이었다.


내가 분명 레온에서 이틀을 쉰다고 해서 마주칠 것을 예상 못했기 때문에 모모카상은 상당히 놀라 했다. 나는 모모카에게 아스토르가까지 기차를 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라바넬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을 말동무가 생긴 것에 기쁘고 반가웠다. 나는 새벽에 길을 잃을뻔했던 얘기를 해주었다.



El Ganso / Albergue y Bar La Barraca

우리는 엘간소까지 걸어가면서 길을 마치면 어떤 계획이 있는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왠지 꼰데가 된 듯해서 조금 미안하다. 모모카는 일본인답게 친절하게 답을 해줬다.


고등학교 때부터 남미에서 살았고 오랜 시간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순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취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영어에 스페인어까지 구사하니 사실 스페인에서 자리를 잡아도 되지만 너무 어린 날에 고생을 많이 하고 향수병으로 고생했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어느새 우리는 엘간소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엘 간소는 폐가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들이 많았고, 무너진 예배당 꼭대기에는 황새부부가 둥지를 트고 살고 있었다. 모모카상은 식사를 하러 알베르게 이 바 라 바라카로 나와 함께 들어갔다.

이때 나는 이미 식사를 마쳤기 때문에 단지 화장실을 쓰기 위해 함께 들어갔다.


모모카는 길을 먼저 가고 싶으면 먼저 가도 괜찮다고 말했으나 나는 일단 화장실이 가고 싶어 따라 들어간 것이다. 아니 근데 입구에 에스텔라에서 만났던 한국인 모녀가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오늘 무슨 계속 만남과 우연의 연속이었다.


진짜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경계를 넘어 반가움이 먼저 앞섰다.

아무리 같은 날 걸어도 만나기 어려운 길에서 우리는 분기별로 계속 만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숙소에서 파는 음식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나는 마땅히 먹을만한 게 없는 것 같아 먹지 않고 모모카가 먹는 것을 기다리며 식당 안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 가족들을 만지며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 손이 익숙한지 알베르게 영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 고양이 가족이었다. 모모카상은 얼굴보다 큰 빵에 하몽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만 오는 게 아니라 바람도 세차게 불면서 점점 안개도 끼는 분위기였다.


엘간소를 빠져나오는 길 철로 만들어진 십자가 즈음에서 모모카상은 비옷 바지를 갈아입었고, 양산을 쓰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양산에 비옷 바지까지 가지고 다니면 얼마나 무거울까?

젊음이 좋구만!


여기서 모모카상은 옷을 갈아입고 할 건데 “먼저 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두 번째로 했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일본인 특유의 돌려 말하는 표현 방법이었다. 서양 사람들이나 한국사람들이었다면 “그냥 먼저 가세요!”라고 말했을 텐데 이 친절한 일본친구는 나에게 끝까지 예의를 차려서 돌려서 말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눈치 없이 옷 갈아입을 때 우산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모모카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냥 내 걸음으로 다시 천천히 걸었다. 거의 한불록 거리 정도 거리가 차이 났었던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한 느낌만 남기고 모모카는 먼저 길을 갔다.

나에게 라바넬 델 카미노 다음 도시엔 Foncebadón에 가서 머물 예정이라고 했었는데 비가 오니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떠나는 인연은 Buen Camino! 다시 만나길 바를 뿐이다.



라바넬 가는 길

그렇게 다시 나는 오르막을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다.

이제 라바넬로 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비가 오다 말다 흐린 날씨에 산길은 꽤 추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모모카를 보내고 경치를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정말 중무장한 순례자 앞을 지나가게 됐다. 나는 그 순례자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면서 "부엔 까미노!" 인사를 외치며 얼굴을 마주 보게 됐다.


앗! 캐티! 왜 여기 있어요?


캐티는 분명 나와 마지막 연락한 곳이 아스토르가였었다. 이렇게 길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는 서로 각자 왓츠앱으로 걷는 길을 공유했다.


이렇게 같은 길을 걷다가 마주치게 될 줄이야.


심지어 우리는 의도치 않았지만 라바넬에 있는 숙소도 같은 곳을 예약했다.


캐티와 나는 초반 팜플로나 중반길 사하군 그리고 이제 후반부 길 라바넬 델 카미노를 함께 걷고 있다.

아까 엘간소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만났던 한국인 모녀 역시 길에서 다시 마주치게 됐다.


어머니 짐을 라바넬 델 카미노를 지나 작은 소도시 알베르게로 짐을 보내서 지금 빨리 가는 중인데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서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안부와 건강을 체크할 정도로 가까워 졌다.

캐티의 모습은 길을 걸을수록 건강하고 밝아 보였다.



Rabanel del Camino/ Albergue La senda

캐티와 내가 묵을 숙소는 라바넬 델 카미노 입구에 위치한 Albergue La senda이다. 거의 숙소에 도착할 즈음 흩날리던 비는 장대비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우리가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나는 숙소 6인실 숙소를 예약해 놔서 캐시와 나는 방을 떨어져 쓰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2층 침대를 쓸 거면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이 들어서 호스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8인실 캐시 침대 2층을 쓰기로 했다.


0층 다인용 숙소 방에는 공동 화장실이 1개밖에 없어서 6인실 사용자들도 8인실 방안에 있는 샤워실 겸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8인실은 화장실이 포함된 방이란 게 장점이었지만 확실히 촘촘하게 좁고 6인실 나무 침대와는 다른 얇은 철제 침대였다.


꿉꿉해진 옷을 라디에이터 위에 널고 샤워를 마치고 자리 정리를 마쳤다.

막상 8인실로 옮기고 나니 좁아서 6인실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냥 쓰기로 했다.

비가 세차게 내려 어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늑한 난로

이숙소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난로였는데, 샤워를 마치고 2층 거실로 올라와 보니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어서 다들 젖은 빨래를 가지고 올라와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쉬고 있었다.


작은아씨들에서 가족들이 옹기종기 난로 앞에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거실에 모여 있는 분들은 레온에서도 같은 숙소를 쓴 브라이언, 피터, 벤 아저씨와 캐시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캐티도 이분들을 다 알고 있는 듯 편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게다가 아스토르가에서 함께 숙소를 썼던 캐나다 노부부도 같은 숙소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쥬 인사를 하며 반가워했다.


침대가 있는 0층보다 1층 휴게실이 장작냄새와 난로의 열기가 거실을 훈훈하게 덥혀주면서 아득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다. 캐시와 나는 잠깐이라도 젖은 옷가지와 빨래를 말리기 위해 양말과 몇 개 옷가지를 가지고 올라와 의자에 옳려 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늦은 점심/ POSADA EL TESIN 16:18

우리는 3시에서 4시 사이 시에스타 시간이었지만 도착하고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생겨 식사를 하러 움직이기로 했다. 비가 세차게 내려 멀리는 갈 수가 없어서 숙소 바로 옆에 잇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합석자리를 만들어 테이블에 앉았다. 내 테이블 옆에는 이테로 데라 베가에서 만났던 젊은 미국 커플이 스페인서 살고 있는 동생커플과 만나 함께 기도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나와 아나가 길가에서 찾아준 페이즐 문양 분홍색 스카프를 찾아드린 뉴욕 멋쟁이 자매 할머니 분들이 계셨다.


사실 그때 다시 마주치고도 처음에는 못 알아보다가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서 서로를 인지하게 되었다. 성함과 연락처조차 없어서 아쉬울 따름인데 이렇게 우연히 찍은 사진에서 그분들 얼굴이 있어서 반가울 지경이었다.


언젠가 다시 이 인연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음식을 게눈 감추듯 빠르게 흡입했다. 뭘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북적이며 식사를 한 경험은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식당 사장님은 익숙하다는 듯 없던 자리를 테트리스처럼 역어서 만들어 냈다. 비가 와서 테라스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도 없으니 식당 안은 각국 언어로 떠드는 소리와 요리하는 소리까지 겹쳐 정말 정신이 없었다.


잠시 식사를 하려는 순례자와 하룻밤 묵는 순례자들을 파악하는 것은 옷차림과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잠시 식사로 금방 떠날 순례자일 경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사라진다.

하지만 하룻밤 묵어 가는 순례자의 경우 편안한 옷을 입고 거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며 식탁에 앉아 있는다.


숙소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어느새 8인실 방은 순례자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시에스타를 취하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우리는 1층 휴게실로 올라가 난로를 쬐면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저녁때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순례자 미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 사연이지만 브라인언의 경우 다리 수술을 받아서 무거운 짐을 들 수가 없고 오래 걷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물집 제거 수술

오른쪽 불어 터진 내 뒤꿈치에 있는 왕물집은 없어지다 생기다를 반복하면서 양파같이 물집이 겹겹이 생긴 상태라 걸을 때마다 아주 곤욕이었다. 나는 오늘 날을 잡고 바늘과 미니 가위로 소독을 마치고 집도를 시작했다.


옆에서 내 수술집도를 보던 브라이언 아저씨는 본인이 도와줄까? 라고 말하며 물집제거 전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감사함을 표하고 직접 하겠다고 했다. 이 물집이 계속 생기니 빠르게 걸을 수가 없다.


피터 아저씨는 세분의 다음 도착지점에 붙일 짐을 동키서비스 용지에 주소를 적고 있었고, 캐시는 안쪽 소파에 누워 천장에 다리를 올려놓고 다리 붓기를 빼고 있었다.


6인실 방에 있는 브라질 곱슬머리 포니테일 여성 순례자분이 2층 휴게실로 올라와 안마의자에 동전을 넣고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레온에서 아스토르가로 함께 기차를 탔던 여자 순례자도 거실로 올라와 오늘 있던 일들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휴식을 즐기며 함께 장작 타는 소리와 안락한 숙소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한결 순례길에서 이어지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통증을 참으며 물을 다 뺀 후, 꼼 피드를 상처부위 위에 붙였다.


불쌍한 내발~


순례자를 위한 미사

곧 미사시간이 다가온다.

거실에서 늘어져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캐티와 성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비는 그친 상태였으나 하늘의 먹구름은 언제고 비를 내릴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Monasterio de San Salvador del Monte Irago

수도원에 오후 예배 시간이 가까워 지자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의 맨 앞줄에는 캐나다 퀘벡 단체 관광객들이 먼저 줄을 서 있어서 더 정신없이 북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성당 입구에서 다시 한국인 모녀 순례자와 타르다 호스에서 만났던 캐나다계 아시안 혼혈 순례자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이곳에서 길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이 얼마나 연극적이고 우연의 일치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순례자 미사는 라티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로 진행되고 한국인 수도사님이 계셔서 한국인들에게도 이 미사는 꽤 유명하다. 성당 안에는 브라이언, 피터, 벤과 레온에서 다시 만났었던 Gooday Mate여성 호주커플, 타르다 호스에서 만났던 캐나다계 혼혈 순례자, 마이애미에 사는 미국인 순례자, 스페인 순례자 등등의 익숙한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어어서 행복이 배가 되었다.

일반 미사와는 다른 형식의 세족식은 없었지만 역사적인 풍경 속에 세계인들이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뜻깊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산티아고 도착 전 예행 전야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옆에 함께 앉은키 큰 순례자 아저씨가 암송 내내 브로셔에 암송문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셔서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아저씨는 늘 길에서 볼 때는 담배를 피우고 쉬는 모습이었는데 성당에서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암송문을 부르는 걸 보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한 번도 통성명을 한적이 없지만 늘 눈인사를 하던 사이였었다. 강한 인상과 다르게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캐티와 나는 성당에 앉아 각국의 대표 순례자들이 나와 기도문을 읽는 것을 지켜보고 수녀님의 영어, 불어, 독일어로 미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며 오늘 내리는 비가 마치 성수처럼 거룩했고 미사를 통해 오늘 하루의 고난과 번뇌의 죄가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풍경

미사를 받으러 갈 때 꼭 순례자 여권을 챙겨 가도록 하자. 나는 준비 없이 나와서 도장을 받지 못했지만 순례자여권에 미사인증 도장이 있으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미사시간에 눈인사만 했던 순례지인들과 성당 앞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라센다 쪽 말고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말하고는 마을 구경도 할 겸 위쪽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나는 캐티에게 착 붙어 팔짱을 끼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평소 나는 스킨십이 많은 타입이 아니지만 비 온 후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젖어 있으니 너무 추웠다.


수도원 앞쪽에는 Refugio Gaucelmo 기부제 알베르게가 열려 있었다. 성당소속 숙소에는 그 캐나다 혼혈 순례자와 그 무리들 그리고 나중에 듣기롱 마리아도 그곳에 있었다고 들었다.


마리아는 후반부 길에서 나의 가장 친한 순례자 친구였다. 라바넬이 작은 마을임에도 미사를 받기 위해 온 순례자들로 동네가 북적였다. 아스토르가에서 함께 묵었었던 스웨덴 순례자와 길을 마주쳤는데 라바넬에서는 1인실 숙소에 머물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 주었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윗길로 스웨덴 순례자는 아랫길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가 호텔 겸 음식점들이 나타났다.



Hotel-bar Restaurante La Posada de Gaspar

밖에 걸린 메뉴판을 한참 보고 있는데 식사를 마친 모모카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 여기 숙소 잡았어요?

모모카상: 비가 많이 내려서 라바넬에서 숙소를 잡았어요.

여기 음식 맛있었어요. 저는 스테이크를 다 먹었어요. 추천해요.

나: 나는 순례자 미사를 듣고 이제 저녁 먹으려고요. 좋은 하루 보내요.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식당을 원했으나 미사를 마치고 단체관광객까지 있는 지금 우리 앞 대형테이블에는 미사 때 봤던 캐나다 퀘벡 성지순례단체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단체는 언제나 소란스럽다. 웨이터 혼자서 주문과 서빙을 동시에 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맥주와 감차칩, 고기, 샐러드, 구운 피망을 시켰고, 캐티는 술은 마시지 않았던 걸로 기억난다. 우리는 늘 만나면 햄버거나 고기위주의 식사를 했었는데, 우리 테이블 앞에 혼자 걷는 순례자 무리가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러 온 듯했다. 비알까사르 데 시르가에서 만난 이탈리아 무리와 함께 있던 친구였다.


나와 캐티는 앞에 앉은 순례자들을 관찰하며 그가 말하는 영어말투와 발음은 분명 캐나다 사람일 거라 확신을 하며 여성스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들을 통틀어 "트위치"라는 말로 불리는데 그게 뭔지 아냐며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식사를 다 마치고 그쪽 테이블로 가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그 친구는 알고 보니 미국인이었다. 나와는 그때 이탈리아 무리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했었다.


마침내 그곳에서 순례길 친구 마리아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길을 걷는 내내 한 번씩은 얼굴을 마주쳤지만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마리아와 나의 기억이 맞다면 라바넬에서 먹은 저녁 식사 장소에서 인사를 나눈 게 처음이라는 결론이 났다. 순례자 유닛 무리는 이제 식사를 시작할 타이밍이었고, 나와 캐시는 끝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인사를 마치고 정신없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긴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캐시:갑자기 왜 팔짱을 끼고 친한 척하는 거예요? 원래 그런 스타일 아니지 않아요?

나: 왜냐하면... (웃으며) 당신은 나의 구미베어 애착인형 같아요. 너무 따뜻하다고요.

라고 말하며 더 꽈악 팔짱을 기며 파고들었더니 캐티는 팔짱을 뿌리치며 "안돼"라고 소리치며 도망을 쳤다.


나는 내"구미베어"라고 소리치며 다시 팔짱을 끼자 캐시는 엄마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그만큼 친해지기도 했고, 진짜 추웠던 것까지 한몫하면서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초반 팜플로나길부터 후반 라바넬까지 캐티는 몇 안 되는 나의 순례길 동료이자 엄마이자 친구였다.



숙소 안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잘 준비를 하는데 여전히 젖은 옷은 꿉꿉하게 마르지 않은 상태이다. 점심때 도착해 내 옆침대에 짐을 풀고 바로 자던 스페인 자전거 순례자 아저씨는 나와 서로 입은 옷을 보고는 서로 키득거렸다. "산티아고 유니버시티" 나는 "레온"


나: 아저씨 몇 학년이에요? 무슨 과 다니시죠?

아저씨: 너무 추워서 옷을 기념품샵에서 샀다고 한다.


나는 몸을 다시 따뜻하게 녹이고 싶어서 1층 거실 공간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장작 타는 소리와 나무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숙소 전체에 가득 채워지며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한국이었다면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었을 텐데. 캐티는 언제 올라왔는지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세명의 남성분들 벤, 브라이언, 피터가 익숙하게 아까 점심때처럼 앉아 있었고 네덜란드 오렌지 스웨터 키다리 아저씨가 긴 다리를 접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로 근처에는 내 침대 옆 2층 침대에서 자던 젊은 미국인 남자 순례자가 난롯불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네덜란드 오렌지 순례자 아저씨는 농담을 잘하시는 분이었는데 내가 침대방 말고 여기 거실에서 따뜻하게 자고 싶다고 말하자 장난 어린 말투로 내 말을 받아쳤다.


네덜란드 오렌지 순례자: 좀 참을성을 길러바! 사람들 온기 때문에 침실도 따뜻할 거야. (윙크)

나는 아저씨의 말을 받아쳤다.

나: 키가 커서 순례길을 빨리 걷겠어요. (웃으며)

네덜란드 오렌지 순례자: 꼭 크다고 빨리 걷는 건 아니야. 나는 키 작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잘 걷는지 안다며 윙크를 다시 했다. (두 손을 휘저으며 빠르게 걷는 제스처)


하긴 한국인들이 좀 잘 걷긴 하지 인정!

이제 순례자들과 농담 따먹기도 할 정도로 길이 익숙하고 편안해진 것 같이 느껴졌다.

라바넬 델 까미노의 숙소는 내가 묵었던 숙소 중 손에 꼽을 만큼 기억에 남는 곳이다.


난로 근처에 앉은 젊은 미국인 순례자는 휴게실 내에 분위기를 그저 들으며 관망하는 듯했다.

아까 자고 있었어서 대화를 할 시간이 별로 되진 않았으나 말수가 적은 탓인지 몰라도 늘 혼자 걷는 것 같아 보였다.


잠잘 시간

시간이 흘러 잘 시간이 다가왔다. 새벽 6시부터 예배당에서 길을 잃었다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다시 제대로 된 순례길을 걷고 3번의 아침을 먹었고 우연히 모모카상도 만나고 한국인 모녀도 다시 만나고 라바넬 가는 길에서는 캐티도 다시 만나 순례자 미사도 참석을 함께하며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길 초중반에 마주쳤던 대부분의 순례자들을 성당미사에서 다시 만나는 다시 못할 경험을 한 날로 나에게 기록되었다.



9시 에서 10시 즈음 우리는 방으로 내려와 잘 준비를 마쳤다. 정말 테트리스처럼 침대가 많은 작은 8인실 방에서 온기 덕분인지 그 방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캐시에게 잠들기 전 누가 준건지 아주 멋진 순례자가 준 수영전용 고무 이어 플러그를 아주 잘 쓰고 있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소등을 했는데 고개가 닿자마자 코 고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에 들어 버렸다.

오늘 물집 제거를 해서 많이 걷기가 힘들 것 같다.


내일은 배낭을 다음 종착지인 Molinasaeca(몰리나세카)에 보낼 계획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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