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가 데 발카르쎄 가는 길(Vega de Valcarce)
길을 처음 걸었을 때 느꼈던 앞으로의 나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감이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길의 후반부에 접어든 내가 느끼는 것은 길을 걷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상처가 생겼을 때 상처만 후벼 판다고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길이 특색 있고 달랐지만 베가 데 발카르세를 걷던 이날 이후 예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온전한 나 자신으로 길을 즐길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당신이 순례길을 걸으려 하지 말고, 순례길이 당신을 걷게 하라.
-산티아고 성인 중 누군가가 했던 명언
출발: Cacabelos(카카벨로스)
도착: Vega de Valcarce(베가 데 발카르쎄)
특이사항: 두 번의 갈림길
거리:25.1km
예상대로, 스페인 아저씨는 밤새 코를 골며 내 잠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벽 6시쯤, 그 큰 몸을 놀라울 정도로 조용히 움직여 짐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갔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점이 하나 있다면, 덩치가 크다고 해서 소음이 더 많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스페인 아저씨들이 강한 인상과, 술배가 남산처럼 나온 경우가 많다. 그들이 큰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음 없이 조용히 숙소를 떠나는 모습은 조용하고 고요한 생쥐처럼 민첩했다.
몸이 날렵한 중장년 중국인이나 한국인 순례자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일찍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며 내는 소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래를 뱉는 소리, 아침부터 이어지는 잡담, 씻는 소리까지, 아마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활 습관일 것이다.
스페인 아저씨가 떠난 후, 코골이 소리가 없으니 방안은 고요해졌고, 나는 1시간 정도 더 눈을 붙일 수 있었다. 7시까지 조금 더 잠을 청하고, 화장실에서 준비를 마친 뒤,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출발 전 풍경
카페에 들어서자 일상적인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마리아와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순례자는 아침 식사에 한창이었고, 벤과 브라이언, 피터 아저씨는 프런트 로비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1층 침대를 사용했던 독일인 아줌마는 이미 정돈된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나는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퍼지고 있는 카페 카운터로 향했다. 커피와 함께 아침 빵을 주문하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다음 숙소는 이미 예약해 둔 터였다. 처음에는 짐을 부칠까 고민했지만, 어제 산 판초와 이틀간 짐을 붙였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산타 마리아 교구 교회
산티아고의 초대대주교이자 콤포스텔라 대성당 건물을 기획한 디에고 겔미레즈(Diego Gelmírez)가
1108년에 봉헌했다.
16세기에 지어지고 17세기와 18세기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양식을 지닌 후진마이 16세기 유산으로 남아 있다.
네오고딕 양식의 타워는 1904년에 지어졌으면 현관 위에는 13세기의 라 에드라나 성모상(Virgen de la Edrada) 조각이 있다.
타워에는 생명나무가 새겨진 십자가 위의 14세기의 인상적인 그리스도가 조각되어 있다.
자료: 부엔 까미노
어제 수잔이 알려준 숙소 정보로 미루어 보아, 오늘 걷다가 수잔과 마주칠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비를 피하려 서둘러 걷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오늘은 배낭을 메고 걷게 되니,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쿠아강
시엔푸에고스(Cienfuegos) 항구 근처에 있는 캄포 데 라 페스카(Camp de la Pesca)에서 발원하여 62km 떨어진 실(Sil)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카카벨로스(Cacabelo) 외곽에 있는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16~18세기에 지어졌으며 1809년 1월 3월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 군이 충돌한 곳이다.
자료: 부엔 카미노 앱
우측으로 계속 가면 발투이 데 아리바 변형루트를 따라가게 되고 이는 1KM 정도 구간이 추가된다.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라는 노란색 화살표는 사라져 있지만, 이 길이 공식 루트이다.
LE-713 도로 바로 옆을 따라 몇 킬로미터를 가면,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자료: 부엔 까미노 앱
카카벨로스를 지나 쿠아강을 건넜을 때, 마리아에게서 왓츠앱 메시지가 왔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수잔이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한 그녀는 한 블록 정도 앞에서 걷고 있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꼭 나란히 서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의 속도와 거리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순례길에서의 동행이다.
길 초반에 함께 묵었던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떠나고, 나는 온전히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전에 처음으로 수잔과 함께 걷게 되었다. 그동안은 항상 숙소에서만 마주쳤던 터라 색다른 경험이었다.
수잔은 정말 잘 걸었다. 우리는 한 블록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걸었는데, 함께 걷는다는 것은 꼭 나란히 서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며 같은 길을 공유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례자로서 서로의 거리와 속도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했다. 늦고 빠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길 위에서 마음이 맞는 누군가를 만나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오늘 오전은 수잔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서 고민할 것 없이 오른쪽 산길을 택했다. 오른쪽 길은 구불구불한 지형과 경사가 있어 언덕을 오르면 아름다운 포도밭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우리는 연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풍경을 즐기느라 느릿느릿 걸었다.
언덕을 오르기 전부터 흐리던 날씨는 다시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마리아와 함께 샀던 카키색 판초를 꺼내 입고 걷기 시작했다.
판초의 장점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단열 효과까지 있다.
보기에는 그다지 멋지지 않지만, 순례길에서 비옷을 가져갈지 말지 고민했던 나처럼, 실제로 비를 맞게 되면 당황할 수 있으니 꼭 챙겨 가기를 추천한다.
오르막에서 보이는 비에 젖은 포도나무 풍경은 아름답게 펼쳐졌다.
카키색 판초를 입은 내 모습과 어우러져 나는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걷던 수잔은 어느새 앞서 나가더니, 잠시 후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따르다호스에서 만났던 호주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즐겁고 완벽하게 걷기 좋은 시간” 이라고 말 했던 그 순례자 였다. 그녀는 나의 카키색 판초를 보고 멀리서 "키 작은 남자가 걷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 색깔은 여자들이 잘 입지 않는 밝은 카키와 녹색이 섞인 색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판초 사이즈가 커서, 나는 거의 판초에 묻혀 나무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나: "알아! 이 판초는 내가 선택할 수 없었어."
그렇게 우리는 따르다호스로 가는 길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검정 판초를 입고 빠르게 내 앞을 지나며 사라졌다. 검정 판초를 보고 있자니, 파리에 두고 온 다홍색 "이쁜" 판초가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다.
길을 걷다 보면, 길 위에는 너도 밤나무와 도토리, 그리고 야생 밤나무들이 비를 맞고 떨어져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에 짓이겨져 있다.
순례자가 아니었으면, 아마 이 도토리나 야생 밤을 다 따가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도토리나 야생 밤을 따려는 등산객들이 많아 산이 몸살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시골 산속이라 목장과 포도 농장이 중간중간 보이고, 언덕마다 송전탑과 소들이 있으며, 가끔씩 매나 독수리도 보이는 풍경이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날씨가 습해지더니, 안개가 낀 듯한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비를 맞고 싱그럽게 퍼져 나오는 신선한 공기는, 그동안 내가 안구 건조와 도시에서 늘 달고 살던 건선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할 만큼 깨끗했다.
텅 빈 마을
시골 산속을 걸어가다 보면, 곳곳에서 무너지기 직전의 텅 빈 마을들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떠나 도심으로 나갔던 것 같다.
언덕길을 내려가던 중, 수잔이 폐가들을 찍고 있었다. 길에는 주인 없는 오드 아이 보더콜리가 우리를 반겼다. 처음에는 이 녀석이 너무 친절하게 마을 입구에서부터 맞이했기 때문에, 분명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현지인이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보더콜리가 그 옆을 딱 붙어서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지인은 자기 개가 아니라고만 말했다.
이 녀석은 분명 사람 손을 타는 걸 보면 주인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누가 버리고 갔을까?
한참을 수잔과 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만져주던 보더콜리는, 비에 젖은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수잔은 스페인 시골의 폐가에 관심이 많았다. 지나가다 예쁜 집들을 보면, 주소와 위치, 외형까지 꼼꼼히 사진으로 남기곤 했다.
스페인 시골 어딘가에 별장을 구하려는 걸까? 유럽에 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폐가를 지나 크고 작은 언덕을 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또 다시 수잔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처럼 날쌔게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빌라프란카 델 비에르소에 도착했을 때, 마을 입구부터 눈에 띄는 큰 원형의 Marqueses de Villafranca 성이 있다.
이 마을은 폰페라다에서 출발해 빌라프란카 델 비에르조까지 걸어오면서 짐을 푸는 일반적인 루트에서 중요한 중간 지점이었다. 그래서 잠시 쉬어가는 동안, 흩어져 있던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다.
일본인 순례자 모모카는 오늘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거 연락이 왔고, 나와 함께 머물었던 한국인 약사 순례자와 한국인 그룹도 이곳에서 짐을 푼다고 했다. 이곳을 정확히 기억하게 된 이유는 성 앞에 있던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다.
성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카스틸로 카페의 테라스에는, 렐리고스 만실라에서 함께 호카 이야기를 나눴던 프랑스 아저씨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버킷햇 모자에 투명한 뿔테 안경을 쓰고, 항상 담배를 물고 있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비바람에 테라스 테이블 대부분이 엎어져 있었다.
나는 가방과 판초, 지팡이를 카페 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아까 만났던 호주 순례자와 카카벨로스에서 마리아와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순례자가 있었다.
둘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듯 보였다.
사실, 호주 순례자는 미국인 순례자와 얼굴만 익혔고,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주문을 마친 후, 프랑스 아저씨가 있던 테라스로 나가 인사를 나눴다.
밖에서 음식을 먹으려 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빗물이 음식에 자꾸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들고 실내로 들어왔다.
나: 혹시 합석해도 될까요?
미국, 호주 순례자: 고개를 끄덕이며.
카페풍경
호주 친구는 이미 식사를 마친 듯 보였고, 미국인 순례자는 아주 천천히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카페 내부에서는 주크박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주인장은 위쪽에 틀어놓은 TV를 보고 있다.
호주 순례자와 나는 내가 입은 판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 급하게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해프닝과, 내 고어텍스 재킷이 더 이상 방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샀던 우비가 찢어진 이야기도 했다. 사실, 그 얘기만 해도 한 보따리였다. 호주 친구도 내 판초 색이 웃기다며 동의했다.
이 촌스런 카키색 판초를 파리로 가져갈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 나도 이 카키색이 싫어. 너무 촌스럽고, 너무 튀어서 마치 나무 지팡이까지 해서 "움직이는 나무" 같지 않아?
호주 순례자: 끄덕이며 키득키득.
식사를 마친 미국인 순례자는 천천히 더 이곳을 즐기고 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호주 순례자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서로의 판초가 뒤로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살펴보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호주 순례자 카르멘
이 호주 순례자와 이제서야 통성명하고 번호를 교환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름은 카르멘
프랑스계 호주 테즈메니아 출신의 이 친구는 어리긴 했지만, 말과 행동에서 호주인의 여유와 프랑스 사람들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개방적이고 여유로운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빌라프란카 델 비에르소 마을을 가로지르며 순례길로 나갈 때, 발카르세강 주변의 풍경이 유난히 아기자기하고, 이 마을 자체가 작은 규모에 높은 위치에 있는 요새 같았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고도가 높은 마을들처럼, 인간계를 마지막으로 지켜주는 요충지 같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순례길 변형루트
이 지점에서 빌라프랑카 델 비레르조에서 나와, 프라델라 방향으로 가는 변형 루트를 따라갈 수 있으며, 후에 트라바델로에서 산티아고 공식 루트와 만나게 된다.
2km 더 길고 (변형 루트는 9.5km, 공식 루트는 11.5km)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는 산길이다.
도로의 단로로움은 피할 수 있지만 체력이 좋은 순례자를 위한 길이다.
브엔 까미노 앱 실시간 위치 찾기를 통해 지도에서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 브엔 까미노 앱
두 번째 갈림길
강 다리를 건너며 수잔에게 안부를 물으니 수잔은 두 번째 갈림길에서 공식루트인 가파른 오르막을 선택했다고 했다.
부르바아강과 발카사르세강을 지나는 다리 위 풍경이 다시 말하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카르멘은 자신은 왼쪽 변형 루트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편한 대로 동선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직진 코스는 도로 옆 길을 따라 걷는 경로였지만, 나는 이번에는 카르멘을 따라 변형 코스로 걸어보기로 했다.
어떤 길로 가건 두 군데 모두 의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길을 걷다 보니 고속도로 옆을 계속 지나야 해서 숲길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비록 편안하고 무난한 길이었지만, 옆에 비탈길에 낙상 사고를 막기 위한 그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폭우나 낙뢰, 나무가 떨어질 가능성도 염려되었다.
길을 걷는 내내, 옆길로 흐르는 강은 비를 맞고 급격히 불어나고 있었고, 오른쪽 도로에서는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며, 산벽과 고가 다리 아래로는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렸다.
경치를 구경하며 걷고 있던 사이, 카르멘은 빠른 걸음으로 멀리서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였고, 주변에는 간간히 자전거 순례자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변형 루트를 선택한 다른 순례자들이 가끔 앞뒤로 보였다. 결국 내 주변에는 혼자만 남게 되었다.
노래 부르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유튜브에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를 켰다. 빌라카자르 디 시르가에서의 이탈리아 순례자가 했던 것처럼,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데이터를 100기가짜리 유심 카드로 구매해 놓고, 동영상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깨달았다. 한 달 내내 데이터 걱정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큰 행복이었다.
그러나 길을 걷다 보니 충전을 위해 핸드폰 케이스를 벗기면서 , 케이스 안쪽에 뒀던 소창에 실크스크린으로 그려진 일러스트 그림을 잃어버렸다. 그 소중한 그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잠시 아쉬움이 밀려왔다.
길위의 생각
길을 지나면 곳곳에 큰 나무들이 벌목되어 쌓여 있는 곳들이 있었다. 순례자들의 낙서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폐가를 지날 때마다 사막지대에서 보았던 흙집 폐가가 떠오른다. 그곳은 부서져 가는 흙과 나무로 된 집들이 었지만, 이곳의 폐가는 돌로 지어진 집들이라 만약 텐트 대신 야영을 하고 싶다면 저런 빈 집에서 지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처음 길을 걸었을 때는 나의 앞날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감에 휩싸였었지만, 지금은 다리 아래를 지나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와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나 자신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그치고, 지나가던 자전거 순례자가 길을 멈추며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봐! 무지개가 나타났어!"
산 중 고가 도로와 터널 입구가 겹치는 지점에서 절묘하게 무지개가 나타났고, 그 풍경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걸으면서, 나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터졌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종종 눈물이 나온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179킬로미터가 남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베가 데 발카르세까지는 10킬로미터가 채 남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산티아고에서 얻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내가 서로 교감하며 걸었다는 표현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가 체험한 100퍼센트의 현실이다.
"만약 수잔처럼 산길을 택했다면, 또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준비되지 않은 마음가짐인 나를 순례길은 온준히 맞아주었고, 그 길을 걸으며 겪은 모든 우여곡절 속에서, 그 순간이 내가 걸었던 길 중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슬슬 배가 고프고 빗길에서 아무 곳에나 배낭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배낭을 무겁게 매고 쉬지 않고 걷다 보니, 끝없이 이어진 도로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성 야고보 사도 동상
성 야고보 사도 동상
순례자 복장을 하고 근엄한 모습을 한 사도의 조각상
2003년 5월 발카르세 지방정부가 설치
“순례자 복장을 한 사도의 형상은 순례길의 동반자가 되어 콤포스텔라로 일어지는 신성한 공간이 사도의 존재로 보호받는다.”
자료: 부엔 까미노 앱
카스티야 지역의 마지막 여정을 뒤로하고, 발카르세강을 넘어 갈리시아 지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순례자 동상을 만날 수 있었는데, 갈리시아 지역으로 갈수록 동상들의 형상은 더욱 디테일하고 현실 고증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 동상들은 하나같이 순례자들처럼 무거운 비옷을 입고, 바람을 거스르며 걷고 있는 모습이다.
만약 내가 6월에서 7월 사이에 갈리시아 후반부를 걷는다면, 발카르세강에서 수영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비는 주변 풍경을 즐기기보다는, 빗길을 거스르며 약속된 장소로 나아가는 연어 떼처럼 마냥 즐기기에는 춥고 고단한 길이었다.
트라바델로가 보이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음식점은 알베르게 크리스페타였다.
알베르게와 레스토랑이 결합된 곳으로,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내 카키색 판초와 배낭, 지팡이를 벗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벤, 브라이언, 피터 삼총사 아저씨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늘 나타난 커다란 무지개를 봤냐고 묻자, 아저씨들은 내가 그 무지개를 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들도 기쁘다며, 마시던 와인 한 병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아직 7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하니 술을 마시면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을까 걱정했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시간 비를 맞고 몸과 손이 얼어버린 나는, 녹이기 위해 시킨 코스 요리에서 갈리시아 수프를 먹었다.
맛은 마치 한국의 순한 감자탕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 뉴스에는 마드리드의 홍수 소식이 계속 방송되고 있었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공습으로 전쟁이 일어나 세계는 여전히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벤, 브라이언, 피터 삼총사 아저씨들과는 중후반부부터 거의 같은 코스의 숙소에서 계속 만났지만, 이날 트라바델로의 크리스페타 알베르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동선이 겹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연락처라도 받아놓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항상 나를 아빠처럼 보듬어 주셨던 마음 좋고 천사 같은 분들이었다.
순례자 메뉴와 피터 아저씨가 주고 간 와인을 마시자,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아가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합이었지만, 갈리시아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니 이곳이 맛집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와 볼일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오니, 아까 점심을 함께 먹었던 미국인 순례자와 항상 깜짝 등장하는 종아리에 프랑스 백합 문양의 문신을 한 순례자 아저씨가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오늘 걸으며 만난 무지개를 뒤로 하고, 오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도 오늘 무지개를 봤냐고 물었다. 길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성이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백합 심벌 문신을 한 아저씨를 보면서 재밋는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적재적소에 일어난다고 느꼈다.
우리는 서로 말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고, 늘 인사만 하고 지나갔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아저씨는 신기하게도 내가 걸을 때마다 잠깐씩 나타나서 뒷가방에 짐을 넣어달라고 부탁을 자연스럽게 하곤 했다. 그리고 190cm가 넘는 큰 키와 긴 다리로 사라져 갔다.
나는 배낭을 메고 판초를 걸친 후,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달타냥 백합문양 순례자
달타냥 백합 심벌 문신을 한 순례자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나를 불러서 판초 뒤가 말려 올라간 것을 제대로 펴주었다. 미국인 순례자는 아까 빌라프란카 델 비에르소에서처럼 여유롭게 한참을 즐기는 듯 보였다.
나는 중간에 마신 와인에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로 다시 인사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긴 다리로 이 달타냥 순례자는 나를 앞질러 나갔다.
트라바델로를 빠져나가는 길을 걷는 내내 왼쪽에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강물은 불어나서 물길에서 회오리를 치고 있다. 트라바델로를 뒤로 하고 정말 조용하고 고요한 길이 펼쳐졌다.
돌집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고양이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양이와 눈인사를 했다. 고양이는 이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익숙한 듯 고개를 돌려 자리를 피했다. 극적인 기억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면서 가방을 내리지 않고 걷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이 보인다는 것은 화장실을 쓸 수 있는 건물이 있다는 신호였다.
Repsol 주유소/La Portela de Valcarce
라 포르텔라 데 발카르세에 도착했을 때, 비가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변형 루트를 걷는 동안 자주 마주쳤던 프랑스 자매 순례자들이 잠시 둔턱에 기대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카르세 호텔에 예약을 했다고 말하며, "브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건넸다.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아마 아까 마신 술 때문인것 같다. 정말 급하면 숲으로 들어가 볼일을 봐도 괜찮지만, 되도록이면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마침 보이는 Repsol 휴게소 스타일의 주유소에 들어가 화장실을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봤다.
라 포르텔라 데 발카르세를 빠져나가는 길, 고가 다리 앞에 주유소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마치 비에 젖은 생쥐처럼 푹 젖은 상태로 주유소 편의점으로 들어가 점원에게 화장실을 써도 되는지 물었다.
신기하게도, 마을을 들어갈 때 그렇게 내리던 비가 마을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다.
점원은 익숙한 일상이라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가방과 판초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유럽에서 공짜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운 마음에, 초콜릿 바를 하나 구매해 먹으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구간은 헷갈렸던 지점이었는데, 다리 아래로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맘 같아선 여기서 짐을 풀고 싶었지만, 예약해 둔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혼잣말을 읊조리며 다시 기운을 내 보았다.
“3km만 더 걸으면 돼, 기운 내자”
까미노 앱에서는 이 길에서 다리 아래로 직진하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아스토르가에서 새벽길을 걸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카미노 앱 세 개를 켜 놓고 위치를 점검했다. 20km를 걸어왔으면서 마지막 3km 구간이 왜 이렇게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참 길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나무가 우거진 둘레길 같은 분위기에서, 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무들이 서로 얽혀 하늘을 덮고 있었고, 그 사이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밤들이 밟혀 흰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바닥에 지저분 하게 터져 있었다. 정말 그 밤을 가져가서 쪄 먹거나 구워 먹으면 꿀맛일 텐데, 그때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실행하지 못한 미련이 남았고, 그런 미련이 또다시 그 길로 나를 이끌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 같다.
베가 데 발카르세 입구에서는 마을 할아버지가 떨어진 밤을 까서 쓸어 담고 계셨다. 산간 지역 특유의 돌집들과 곡선으로 다닥다닥 붙은 풍경이 독특하면서도 아기자기했다.
마을 입구부터 굴뚝 위로 나오는 나무 타는 연기가 마을의 정취를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원래 열려 있을 레스토랑들이 대부분 닫혀 있었다.
숙소까지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내 숙소는 마을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하필이면 골라도 가장 끝 집이라,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가방을 고쳐 매고 빠른 걸음으로 커브길을 걸어 숙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행히 숙소 앞에는 슈퍼마켓과 식당이 바로 있었다.
길을 가다가 폰페라다에서 만났던 프랑스 부부, 안토니 아저씨와 브리짓 아줌마가 식사를 하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판초를 구해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안부를 나눴다. 나에게 판초가 어떤 의미인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주어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빨리 배낭과 판초를 벗고 싶었다.
도착/Albergue El Paso 17시 18분
전경이 보이는 2층 집과 주방 겸 프런트가 따로 있던 숙소였다. 주방 난로에서 굴뚝에서 올라오는 장작 연기와 나무 냄새가 감돌았다.
베가 데 발카르세의 특별함은 이 나무 타는 장작 냄새에서 비롯되는데, 장작 하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지리산 상행 중 만난 산장의 하룻밤이 떠올라 그 정취가 더 깊고 좋은 것 같다. 비 냄새와 흙냄새, 장작 타는 냄새가 싱그럽게 어우러져 마치 어릴 적 내가 뛰어놀던 지리산 자락과 비슷한 풍경의 알베르게였다.
워터푸르프와 비브람, 구름처럼 푹신한 나의 호카 트래킹화는 순례길을 걸으며 점점 너덜너덜해져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워터푸르프’와 ‘비브람 생고무’는 800km도 거뜬할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신발 안쪽은 터지고 바닥은 닳고 있었다.
내구성이 처음 신었을 때의 감동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삼십만 원대 고가의 등산화치고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빨리 벗어서 신문지로 신발 안을 채워 넣었다.
프런트로 들어가려는데 2층에서 방문이 열렸다. 아스토르가와 라바넬 델 까미노에서 함께 했던 캐나다 노부부가 2인실에서 나와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오늘 날씨가 궂어서 집사람은 미리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고 했다. 오늘 날씨는 모두에게 쉽지 않은 날이었다.
엘파소 알베르게의 주인장은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은지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프런트와 주방이 함께 붙어 있는 곳에서, 미국 전통 복장의 두건을 쓴 순례자가 요리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순례자의 복장이 신기해서 호기심이 생겼었다.
숙소의 호스트는 감기에 걸려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고 나를 숙소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여성 전용 6인실 방이었는데, 이미 다른 순례자가 입구 쪽 1층 침대에 짐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아까 주방에서 봤던 그 순례자가 이자리 주인이라고 했다.
나는 가장 창가 안쪽 1층 침대를 오래간만에 차지할 수 있었다. 숙소는 굉장히 큰데, 가벽 형태로 구분되어 있었고, 방으로 가는 내내 화장실, 샤워실, 다인실 방 3군데를 지나 맨 안쪽에 위치한 방이었다. 아까 체크인 때 주방에서 만났던 그 순례자가 바로 그 방에 있었다.
LA출신 미국인 순례자 니콜
니콜은 딱 적당한 표현으로 타샤튜더처럼 직접 만든 원피스 치마와 두건을 두르고 자연주의를 실천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나도 미국에 종교적으로 독실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고 특이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나 봤던 종교집단 혹은 생태주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산티아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일이 없을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마치 지리산 청학동에서만 살던 사람을 외국인이 만났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길을 걸으며 자주 마주쳤던 미국 아들과 아버지 순례자도 이곳에 짐을 풀고 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샤워하러 가는 길 문이 없는 가벽 형태라 누가 있는지 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큰 화장실 겸 샤워실엔 이미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간 순례자들 덕분에 혼자서 여유롭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숙소가 잘 정돈돼 있어서 마음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젖은 속옷과 빨래를 널고 나니 숙소에 아까 그 미국인 순례자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니콜과 미국인 순례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미국인 순례자와 오늘 아침 점심 심지어 숙소까지 같은 곳을 마주치자 시크하게 웃음기 없던 그녀는 마침내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님을 인정하고 서로 통성명을 했다.
미국인 순례자 올든
샤워를 마친 뒤,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 왔다. 두 명의 미국인에게 나는 식사를 함께 하겠냐고 물었다.
니콜은 아까 체크인할 때 먹고 있던 걸 봤었고, 미국인 순례자는 아직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면 같이 뭔가를 해 먹자는 제안을 했다.
매일 먹는 순례자 코스보다는 "진짜 다양한 야채"를 먹고 싶다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강조하며 이야기했다. 첫인상의 강한 여운과 달리 취향이 잘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바로 숙소 앞에 있는 동네 슈퍼마켓으로 가서 캔 토마토 퓌레 소스와 호박, 양파, 토마토, 피망 그리고 와인 한 병을 샀다. 그때 내 기억으로 올든의 카드에 문제가 생겨서 잔돈을 현금으로 건네줬던 기억이 난다. 근처에 있는 은행 ATM에서 수수료를 확인했는데 너무 비쌌다. 그래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토마토 야채볶음 파스타
올든은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주부 9단이었다. 그녀는 칼질 실력을 뽐내며 야채를 빠르게 채 썰었고, 나는 회오리 모양의 푸실리니를 삶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프고 오랜만에 하는 요리라, 찬물에 면을 넣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하,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물을 버리는데 올든의 빠른 손놀림을 보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
요리를 하면서 와인을 따서 한 잔 마시는 모습은 마치 '위기의 주부들'에서 본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보통 한국에서는 요리할 때 술을 마시는 상상을 잘 못 하지만, 이 모습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스페인 숙소 주인장도 주방에 오더니 "한국도 그렇지만, 스페인도 요리할 때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고 하며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다.
올든의 칼솜씨는 예술이었다. 면을 삶는 동안 주인장이 다가와서 나에게 한국의 ‘라면수프’를 건넸다. 우리는 파스타와 야채 볶음에 라면수프를 살짝 넣기로 했다. 그 맛이 정말 궁금했는데, 그 결정이 의외로 잘 맞았다.
주인장은 음식을 먹는 내내 여기에 한국에서 먹는 낙엽이 있다는 말을 했다.
한국이니 낙엽을 먹는다고?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는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고기와 함께 먹는 깻잎임을 알게 되었다.
맙소사!!!!
심지어 주인장은 고추장도 보여주며, 이 숙소에 한국인들이 꽤나 많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깻잎이 뒷마당 텃밭에 심어져 있을 정도로 애정하는 듯 보였다.
우리가 늦은 저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은 보통 8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주인장의 친구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알베르게 중에서 가장 정감 가고 푸근한 숙소였다. 마치 한국 동네 이모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2차 파티가 시작된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파티 같았다. 하나둘씩 모여들며 식어가던 장작에 다시 불을 지피고, 옆 테이블에 있던 주인장의 친구가 우리에게 합석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우리는 허기와 피로를 채우기 위해 요리를 정신없이 먹었고, 와인 한 병을 비운 뒤 숙소로 가서 쉬고 싶었다.
집밥을 먹듯, 오래간만에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저녁식사였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저녁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식사 후
올든을 소개하자면, 고등학생 아들이 있으며 운동을 한다고 했다. LA,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어 다양한 문화와 음식에 이미 열린 상태였고, 그래서 한국 라면 수프도 거부 없이 잘 먹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본인의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후, 남은 와인을 비우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포만감인지,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걸었던 긴 하루가 길어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올든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나가서 거의 한 시간가량 전화로 씨름하며 밖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와 니콜이 있던 숙소 바로 밖 창가에서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 계속 귀로 들어와 나는 창문을 겨우 닫았다.
니콜은 나에게 "아마 올든은 방음이 안 되는 걸 인식 못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고, 우린 그제야 고요한 방 안에서 쉴 수 있었다.
각자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가 그곳을 떠났음에도 따라왔다는 것은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골치 아픈 문제였다. 길을 걸으며 25km를 안전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이 길에서, 올든이 왜 그렇게 골똘하게 심각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듯했다.
불을 끄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올든이 들어와 자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를 마치며
판초를 구입한 덕분에 좋았던 점은, 벙커 침대에서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 상황에서 내 몸보다 큰 판초를 말리기 위해 침대 위에 얹어 놓았더니 판초가 자연스럽게 커튼 역할을 해줘 아늑하게 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울고 웃으며 긴 하루였지만, 좋은 순례자 동료를 만나고 만족스러운 숙소를 선택해 가슴이 벅찬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일은 숙소 예약도, 배낭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대략 20km 정도를 걷는 게 목표이다.
어서 자야 할 것 같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