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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은 절대 당신을 혼자 두지 않는다.

트리아카스텔라 가는 길(Triacastela)

by 양작가

마리아와 함께 알베르게를 떠나 트리아카스텔라로 향하는 길. 그 길은 내가 걸어온 순례길 중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곳곳에서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오가며 온정을 느낄 수 있었던 길이다.

어떤 길이 특별히 기억에 남느냐보다, 매일이 새로운 날처럼 느껴졌던 건 아마도 그날그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트리아카스텔라로 가는 길은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많아, 부상을 입은 순례자들을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Hospital de Condesa> Alto de Poio 2.8km > Fonfria 6.1km > OBiduedo 8.6km > Fillibal 11.6km > Pasantes 13.2km > Triacastela 15.3km

총 거리:15.3km



2023년 10월 22일 아침

나와 마리아만 남은 이 커다란 알베르게는 평소 아침마다 느껴지던 분주함 대신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어제 내린 비 덕분인지 공기는 한층 맑아졌고, 더 이상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걷기 좋은 날씨였다.

아침 8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오스삐딸 데 콘데사를 빠져나오면서 유일한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그대로 길을 나섰다.




Alto do Poio

아와 함께 천천히 수다를 떨며 걷다 보니 어느새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숲길 양옆으로는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들이 마치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처럼 삐죽삐죽 자라나 인도를 침범할 정도였다. 길가에 서 있는 산티아고 비석은 ‘152.591km 남음’을 가리키고 있었고, 여전히 노란 화살표는 끝까지 걸으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800km라는 긴 여정도 어느덧 152km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첫날 순례길을 내딛던 순간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다 보니 순식간에 Alto do Poio에 도착했다.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도로가 나타났고, 그 길가에는 카페 겸 숙소 두 곳이 보였다. 우리는 그중 Albergue del Puerto에 들어가 아침을 먹기로 했다.


아침식사 Albergue del Puerto

비가 내린 탓에 바깥 테라스는 온통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의자와 파라솔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여 있었고, 테이블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배낭을 식당 밖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이곳은 통나무집으로 지어진 산장 같은 분위기의 알베르게였다. 실내에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공간은 다소 어수선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주문을 받는 주인장 아저씨는 어젯밤 맥주를 잔뜩 마신 듯한 남산만 한 맥주배를 가지고 있었으나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의외로 전문가 같이 보였다.


순례자들은 서늘한 아침 공기에 몸을 녹이려는 듯 저마다 또르띠야와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해 아침을 먹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수비리에서 식중독을 겪은 이후로 또르띠야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익숙한 메뉴, 토스트와 잼을 주문했다.




마리아가 주문한 또르띠야가 먼저 나왔다.

또르띠야가 신선하다며 나에게 한 입 먹어보라고 권했다.

풍부한 치즈와 신선한 계란, 감자의 식감이 어우러져 커다란 또르띠야를 다 먹고 나면 정말 배가 든든할 것 같았다. 맛도 정말 좋았다.


폐가로 변한 산간 마을에는 주인 없는 개들과 주인들이 풀어놓은 개들이 뒤섞여 돌아다녔다. 견고한 돌집은 비바람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인다.

이곳은 오스피딸을 지나 나타나는 첫 음식점이기에, 이곳을 지나치는 모든 순례자들이 들어오는 것처럼 순례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떠나기 전 화장실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다시 걸을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약간 흐린 날씨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마리아와의 이별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일반 가정집에는 벽에 화분을 걸어놓거나 신발과 화분을 위아래로 겹쳐서 만단 길상 오브제가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젖소 모양의 길상이 집 입구에 앉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오스피딸에서 폰프리아까지는 6k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와의 동행이 곧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순례길 초안을 작성하며 그때 폰프리아에 머물었던 이유를 마리아에게 물어봤었다.


그 이유는 내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첫 번째 이유는 이제 길이 152km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으며 순례길을 느끼고 싶었고, 두 번째 이유는 북쪽길을 걸었던 마리아가 폰프리아 A Rovoleira Albergue가 좋아서 다시 그곳을 찾은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었다.

내가 이렇게 글로 그곳을 기리고 있는 것처럼, 마리아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순례길을 마음속에 새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길에서 만난다면 즐거울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이 우연이 아닌 약속과 필연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의무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왓츠앱으로 서로의 진도와 소식을 묻고, 길을 마친 후 꼭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Fonfria /Albergue Roboleira

폰프리아 Albergue Roboleira에 도착했다. 우리는 자판기로 만든 오렌지 자동 착즙 주스에서 130ml짜리 작은 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마리아는 체크인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 숙소는 동그란 원통 구조의 건물로, 내부 식당에는 대형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저녁 시간에는 모두가 함께 앉아 식사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헤어짐이 아쉬울 정도로 주스 잔은 너무 작았다.


폰프리아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마리아와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나 홀로 길을 떠났다. 혼자 걷는 내리막길은 완만한 경사에 구름이 걸쳐져 있어 풍경이 장관이었다.



LU-633 도로 조난자 구조

숲길과 도로가 합쳐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폰프리아에서 1.4km 정도 걸어간 시점이었다.

도로와 목장 카미노길이 겹치는 곳에서 비석 앞에 한 프랑스 할머니가 몸을 기대고 울고 있었다.

옆에는 할머니를 돕기 위해 길을 지나던 브라질 순례자 아저씨가 분주히 응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못 하셨지만, 응급한 상황이라 그런지 우리 모두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어가 섞인 불어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고, 그 자리의 순례자들은 할머니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연은 발목 통증으로 인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서글프게 흘렀다.


길 중간에 할머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통증 때문에 걸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는 며칠 전부터 이미 통증이 있었고, 며칠의 휴식을 취한 후 짐을 다음 도착지에 보내고 다시 걷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길을 완주하고 싶은 순례자의 마음은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150km 정도밖에 남지 않은 길을 며칠 만에 걸으면 손에 닿을 듯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기하라는 것은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에게 가장 큰 슬픔이었다. 할머니는 길을 너무 걷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하염없이 눈물이 마음이 아팠다.



정말 웃긴 것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모여든 순례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많은 프랑스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마리아와 작별을 한 폰프리아 숙소에서 스치듯 봤던 택시 회사 전화번호가 떠올라서, 나는 마리아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사진으로 택시 기사 번호를 찍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을 때, 홀로 걷고 있던 캐나다 청년 순례자가 나타나 할머니와 불어로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왕좌왕하던 상황에서 얽혀 있던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정말 모든 일이 찾지 못했던 퍼즐이 맞춰지듯, 길을 지나던 한 순례자가 나타났다.

회색 비니를 쓴 이 운동 전문가 같은 순례자는 할머니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아플 수 있지만 응급 처치가 가능하다고 하며,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기고 종아리와 발목의 중요 부위를 눌러 지압하자, 할머니는 “아야!” 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놀란 듯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그 전문가는 할머니에게 꼭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캐나다 청년 순례자에게 할머니에게 통역을 해주며 택시 기사 번호를 건넸다. 할머니는 나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며 비쥬를 해주셨다.

그때 마침 소들이 도로 위를 점령하고 지나갔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산하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1.4km를 걷는 동안 짐을 풀고 씻으며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내가 조난자의 소식을 전하자 조금 놀란 듯 뒤늦게 문자가 왔다. 다행히 이 프랑스 할머니 순례자는 응급 치료를 마쳤다는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나 역시 길을 잃고 걷고 있을 때 피아가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큰 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때 했던 나의 다짐은 누군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길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이렇게 곧바로 결과로 나타났다. 내가 받은 누군가의 작은 선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렇게 전달되었다.


순례길에서 홀로 걷기 시작했더라도, 우리 모두는 함께 그 길을 걷고 있다. 결코 당신을 외롭게 홀로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따뜻함을 느끼며 다음 마을로 걷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 덕분에 함께 모여 있었던 순례자 중 녹색 비니를 쓴 중년의 이스라엘 순례자 로닛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로닛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순례길에서 드물게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특수성과 우리가 서로 하갈 언니를 알고 있다는 인연 덕분이었다.


로닛의 딸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고, 카미노 관련 원서인 Two Step Forward (Graeme Simsion and Anne Buist)를 추천해 주었다. 이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없는 듯하지만, 내용을 간단히 줄여보자면, 주인공이 이혼 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순례길을 걷게 되는 이야기였다.



로닛

누군가 인생의 전환점과 변화를 경험한다면, 순례길만큼 인생이 바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곳은 없을 것이라 자부한다. 로닛은 말수가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하갈 언니의 소식을 전했다. 하갈 언니는 길을 걷는 것을 부상으로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길에서 나 홀로 길을 멈추고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란 생각은, 순례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슬픔 중 하나이다. 오늘 마주친 프랑스 할머니 순례자와 하갈 언니까지, 내가 이 길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걸어야 하는지 새삼 길이 다르게 보이는 하루였다.


로닛과 나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 나갔다. 길이 정말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이렇게만 친절하다면, 나는 오늘 더 많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로닛과 나는 우연과 인연에 감탄하며 왓츠앱으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로닛 역시 오늘 트리아카스텔라까지 걸을 계획이라고 했다.




Fillobal/ Bar Aira do Camiño

폰프리아에서 필로발까지 5.4km를 걸어가니 아기자기한 음식점이 나타났다. 문 입구에는 아까 할머니를 구했던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로닛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자연스럽게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식당은 내가 순례길의 시골길에서 마주한 레스토랑 중 가장 정비가 잘 되어 있고,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입구에는 떡하니 순례자 조각상이 우리를 반기고 있으니, 안 들어갈 수가 없지 않겠나?



이 음식점은 한글로 시래기 국밥을 적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 폰프리아에서 마신 오렌지주스 덕분에 아직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가스파쵸와 빵, 그리고 띤또 데 베라노를 시켰다. 날이 쌀쌀했는데 내가 선택한 메뉴는 모두 시원한 여름 음식이라 그런지, 식사 후에 냉기가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갈리시아 수프를 보면서 한국의 시래기 감자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한국인들이 제보해서 밥과 함께 판매하게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로닛은 갈리시아 수프와 레모네이드를 시켰고, 우리는 합석하여 함께 점심을 즐겼다.




Triacastela

우연히도 로닛과 나는 도착지가 같았다. 모든 길을 함께 걸은 것은 아니지만, 트리아카스텔라에는 많은 알베르게가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도착하기 전에 숙소에 전화해 침대가 있는지 문의했다.

예약을 하면서 천천히 걷는 사이 로닛은 예정된 숙소로 먼저 발을 내디뎠고, 나는 숙소 예약을 마쳤다.

트리아카스텔라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에서 나는 초반 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안과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아까 조난을 당했던 할머니처럼 얼굴이 검어져서 몹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반갑게 인사하고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니, 이안은 며칠 전 폰페라다 전에 급경사 산을 내려오면서 근육이 다쳤던 것 같다고 말했다.


Ian

나는 트리아카스텔라 마을 입구에서 발을 무겁게 내딛으며 걸어 들어갔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Albergue Atrio였는데, 거의 마을 초입에 위치해 있어 이안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숙소로 들어가며 괜스레 걱정이 됐다.


이안은 키가 거의 19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라, 이렇게 부상 때문에 걷기를 걱정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야말로 비리비리하고 저질체력인 사람이 길을 포기할 거라고 장담했으니 말이다. 순례길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


그의 얼굴빛이 너무 어두워서 앞으로 순례길에서 이안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트리아카스텔라 마을 입구에는 목조로 정교하게 조각된 순례자 남성과 여성 동상이 있었다. 마을이 아기자기해서 그런지, 동상 덕분에 귀엽게 느껴졌다.



Albergue Atrio

트리아카스텔라의 숙소는 견고한 돌로 지은 산장 같은 느낌이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내려오니 날씨가 끄물끄물해지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15킬로미터 정도밖에 걷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3시도 안 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예약해 놓고 저녁 6시에 도착했던 일이 떠오르니, 요즘처럼 해가 빨리 지는 10월 말의 가을 날씨에는 걸음을 서둘러야만 했었다.

검정 석판과 통나무 난간이 있는 오픈형 주방, 넓은 공용 화장실, 그리고 침대들도 내 자리는 문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유럽의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흔히 보던 가벽 형태의 열린 기숙사 방이었다.


내 자리는 문을 열자마자 왼쪽 가운데 벽에 붙어 있는 2층 침대였다. 계단을 두 걸음 오르면 8명이 창가를 중심으로 마주 보고 잘 수 있는 구조였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급하게 예약한 곳 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그 안에 사람이 중요한 법이니,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친절한 여자 호스트가 나를 맞이하며 물었다.


"전화로 예약하셨죠?"


예약은 선착순 원칙인데, 나는 거의 마지막으로 예약을 한 사람이라 제일 늦게 한 사람 자리로 배정받은 셈이었다.

짐을 풀고 체크인을 마친 시간은 15시 06분. 오늘은 배낭을 메고도 쉴 만큼 쉬면서 가벼운 15.3킬로미터를 걸었다.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숙소에 짐을 풀고 0층 샤워실로 가서 샤워를 하니, 역시 이곳의 습한 기후와 추운 날씨 덕분에 드라이어기가 화장실에 배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머리를 빨리 말릴 수 있었다. 빨래한 옷과 속옷을 들고 방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입소한 룸메이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쪽 자리에 배치된 젊은 스페인 무리와 라바넬 델 카미노에서 만났던 브라질 순례자와 그 친구가 짐을 풀고 있었다.


나는 라바넬에서 만났던 브라질 순례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내 침대 메이트 중 일층에는 머리가 어깨너머까지 길게 늘어뜨린 도인 같은 미국 남자 순례자가 있었고, 내 침대 옆에는 아르헨티나 커플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나는 창가에 빨래를 널기 위해 중간 길을 가로질러 창문을 열려고 하는데, 스페인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실리콘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연고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이 연고는 뜨거워지는 발열 연고라서 꼭 장갑을 끼고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너무 자연스럽게 “너 바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발라줄게”라고 말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어쩌다 보니 약 정보와 내 발목을 내주게 되었다. (맙소사!)


모르는 외국인 순례자에게 내 발목을 내주자마자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짧은 마사지를 받고 나서는 빠르게 약 소개만 듣고 발을 뺐다. 나는 짐을 정리하러 다시 내 침대 쪽으로 돌아가서, 공유 주방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궁금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소란스러운 숙소를 빠져나와 동네 슈퍼마켓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동네 구경


숙소 바로 앞에는 공동묘지와 로만틱 성당이 유적지로 서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라면 모두 한 번쯤은 이 성당을 마주했을 것이다. 나는 마을 지도에서 유일하게 있는 슈퍼마켓을 찾아, 가로로 늘어선 마을의 중심부에서 세로로 난 골목길로 들어가 마을 뒤편 도로로 향했다. 오늘은 일요일인 데다가 시에스타 시간과 겹쳐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꾸물꾸물 흐리고 비가 언제든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 하늘은 수증기를 가득 머금고, 비구름들이 대기 중에 떠 있었다.


한국인 모녀/ Refuigo Del Oribio


슈퍼마켓이 문을 닫았으니 별 수확 없이 나의 계획이 변경되면서 다시 마을로 돌아가던 중, 1층이 통창으로 되어 있던 알베르게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국인 모녀와 아스토르가에서 줄곧 마주쳤던 캐나다 민머리 카우보이 모자 할아버지를 만났다.


"보통 다른 호스텔에 들어가지 않지만, 반가운 마음에 창을 두드린 후 호스트에게 인사하고 나가겠다고 허락을 받아 휴게실로 들어가 인사를 먼저 건넸다."

한국인 어머니는 사과를 깎으며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셨다.


옆에 함께 앉아 있던 미국인 엄마와 아들 순례자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들은 사춘기가 왔는지 말수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미국인 엄마는 아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내가 발이 느려서 아들이 늘 나를 기다려준다고 웃음을 지었다. 아들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라면만 먹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 모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캐나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다시 한국인 모녀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 한국인 딸도 내 인적 사항이 궁금해졌던 모양이었다. 나에게 나이를 물어봤다. 아마 이 친구는 내가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것 같은데, 한국인 특유의 서열 나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이 다음에는 대학교, 그다음에는 직장, 결혼 여부, 애기는 있는지, 그리고 어디 사는지를 묻는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정중하게 내 나이가 더 많다고 알려주었고, 나이를 알면 서로 불편해질까 봐 지금처럼 지내자고 말했다." 사과 몇 개를 집어 먹고 가벼운 스몰 토크를 마친 후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숙소 쪽 마을 입구를 돌아보기 위해 호스텔을 나섰다.



장례식

오늘 무슨 날인지 알 수 없지만, 동네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 공동묘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풍경이 마치 까마귀 떼들이 몰려 있는 모습 같아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엄숙한 분위기에 장례를 치르는 분들의 마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용히 피해 가기로 했다.


많은 인파에 얽히지 않기 위해 직진하지 않고 다시 오른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숙소 쪽으로 내려갔다.

숙소 쪽으로 걸어가던 중, 고양이 한 마리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아마 집주인이 기르는 마당냥이가 아닐까 싶다. 똥꼬 발랄한 이 회색 고양이의 그르렁 소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배가 고파져 로닌에게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 건지 연락을 드려, 괜찮으시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저녁 식사/ Complexo Xacobeo Restaurante

로닛은 지금 묵고 있는 숙소의 레스토랑에 있으니 원한다면 함께 저녁을 먹자고 답이 왔다.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식당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까 슈퍼마켓을 찾으러 갈 때 가로질러 갔던 식당이었다.

다시 숙소를 가로질러 음식점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저녁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음식점 안쪽에 자리 잡은 로닛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순례자 메뉴로 연어 구이, 감자칩, 샐러드, 그리고 잔 와인을 주문했더니 한 병의 와인이 나왔다. 디저트로는 지역 특산품인 쌀푸딩까지 완벽하게 아늑하고 기분 좋은 저녁 식사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순례자들이 이 식당 근처에 몰려들어 몹시 붐볐다.


아까 나에게 연고를 추천했던 스페인 리더와 젊은 무리들도 한껏 치장을 하고 다녀서 눈에 띄었다. 설마 나와 같은 방을 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 설마라는 직감이 무섭게도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조난자 할머니 뒷이야기

로닛과 식사를 하며 로닛은 길에서 구조한 프랑스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는 발 상태가 호전되어 응급차를 부른 것을 취소하고 택시를 불러 짐을 맡겨놓은 숙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숙소가 우연히도 로닛과 같은 방이었고, 로닛을 알아본 프랑스 할머니는 방에서도 한참을 하소연하며 고해성사를 하셨다고 한다.

프랑스 할머니는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너무 외롭고 싫다고 말하며 로닛의 품에 앉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로닛은 한참을 할머니를 달래다 왔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로닛이 곁에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내일 길을 포기하더라도 이렇게 가슴 따뜻하게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는 순례길에서 완주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과, 마음먹었을 때 멈출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로닛을 길에서 먼저 보내고, 만났던 이안이의 캐나다 순례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안도 폰페라다 가는 길에 부상을 당했고, 그 이후 짐을 보내고 트리아카르텔라까지 길을 걸었지만, 마주쳤을 때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햄스트링 쪽 근육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걱정을 나눴다.


우리 모두에게 부상의 위협은 길 위에서 공평하게 다가오기에, 그들의 부상에 대해 가볍게 포기하라는 말을 쉽게 내뱉기 어려운 상황이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위협까지 도사리고 있는 곳이니까.


내일은 사리아로 가고, 24일이 생일이니 내 짐은 동키서비스로 붙이고 하루를 푹 쉴 계획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와인을 세 잔이나 마시고 취기가 살짝 오를 때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마지막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고, 사리아에서 시간이 된다면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었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서의 악몽

숙소로 돌아오니 밖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들어와 12인실이 북적였다. 밤 9시가 넘어 술에 취한 스페인 젊은 무리들이 요란스럽게 돌아왔다. 내가 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은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할 줄 모르는 것 같아. 밖에서 차라리 시끄러운 건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 스페인 무리들이 술에 취해 침대에 누워 큰 소리로 떠들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잠을 자려고 귀마개를 힘껏 귀에 틀어막고 있었지만 도무지 소리가 안 들리지 않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잠을 잘 수 없어서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술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뿐이었다. 처음엔 내가, 그다음엔 미국인 순례자, 그리고 결국 브라질 순례자가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미친 술주정뱅이들은 술에 취해 그 상황이 오히려 웃기기만 한 것 같았다.


아직 모르겠지만, 뭔가 벌레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이 가려워져 예방을 위해 알레르기 약을 미리 먹었다.

결국 10시가 넘어 다들 잠이 들었지만 술에 취한 술주정뱅이들은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는 잠을 쉽게 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음... 포기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다.


휴식은 내일 사리아에서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일 기념으로 예약한 1인실 숙소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망할 놈들…


그렇게 밤늦게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로 잠이 들었다. 어제 마리아와 둘만 대형 알베르게에 머물렀는데, 이로써 내가 내린 결론은 오픈형 알베르게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별 수 있겠나?


12시가 넘었고, 화장실에 다녀올 때조차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지나 0층 화장실로 내려가야 해서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녀와야 했다. 겨우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지만 잠들기 전 소란 때문에 깊은 잠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밤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일 도착할 사리아를 걷기 위해 어서 자야겠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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