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는 그냥 엄마예요.” 나는 엄마인데 직업이 유치원 교사인 거다. 엄마인데 회사원인 것처럼.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냥 엄마다. 적어도 어린 시기에는 엄마의 직업이 그리 궁금하거나 아이에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으니까.
“에이 그래도 많이 알잖아. 애 교육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보다 잘 알 거 아니야.” 잘 알기는 한다. 교사로 14년간 근무했고 석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유아교육과에서도 현장에 대해 강의했으니까. 유아교수학습방법, 유아놀이지도, 유아발달, 교육·보육과정... 이론과 현장에 대해서 빠삭하다. 근데 아이가 그걸 아냐고 한다면 아니다. 우리 엄마는 유아교육을 꽤 오래 공부했으니까 엄마 말을 잘 따라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하자고 하는 놀이가 많은 엄마이거나 잔소리가 많은 엄마라고 느낄 순 있겠다. 여기서 더도 덜도 아니다.
그래도 말을 잘 듣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사실 아이라고 성인을 말을 다 잘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마도 이 말의 뜻은 부모의 말을 잘 이해하고 떼를 덜 쓰고 약속과 규칙을 잘 지키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다.
아이들이 떼를 쓰는 건 기질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부모의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 때문일 때가 많다. 키즈카페에서 딱 두 시간만 놀기로 했는데 아이가 떼를 쓴다면 “알았어. 딱 20분 만이다.”하고 이야기를 한다.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되면 아이들은 ‘지난번에도 내가 떼를 쓰니까 엄마가 좀 더 놀아도 된다고 했어. 좀 더 크게 울면 오늘도 해주겠지?’하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약속시간은 지키는 거라고 알려주고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키즈카페에서 안고 나와야 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듣는 건, 교실은 아이들의 사회이고 그 사회 안에는 지켜야 하는 약속과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약속과 규칙을 정하고, 지켜지도록 안내하고 지원해 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여기서 핵심은 교사라는 명함이 유치원 안에서만 통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친구가 생기면 자연스레 함께 온 엄마나 아빠와 말을 트게 된다. 멀리 사는 가족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더 가깝다고, 자주 보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간식을 나눠줘야 하는데 우르르 몰려들어 쟁탈전이 벌어졌다. 상황을 지켜본 엄마들(내 직업을 알고 있는 엄마들)이 말한다. “ㅇㅇ 엄마가 어떻게 좀 해봐!” “네? 제가요? 저는 그냥 얘들한테 친구 엄마인데요.” '그냥 저를 아이 친구 엄마로 봐주세요. 아이들이 제 말을 들을 리가 없답니다. 여기는 유치원이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