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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3. 2023

성주가 된 기분

작별 3. 진공청소기

이 청소기로 말할 것 같으면 연애 시절 남편이 제 월급의 일부를 헐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생일 선물로 청소기를 받는다는 게 좀 이상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나는 청소에 진심인 사람이기 때문에 이걸 받고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원룸에서 아파트로 거취를 옮 때였다. 이사한 집에서도 원룸 생활을 시작하며 장만한 보라색 핸디형 유선 청소기 는데,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서 자취생 필수품으로 언급되곤 했을 만큼 괜찮은 품질을 가진 물건이었다. 핸디형답잖게 모터 소리가 우렁찼고 흡입력이 대단했다. 연식이 더해져도 배터리 수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이 썩 마음에 들었다.


종전보다 집이 넓어진 탓에 디형 청소기의 쓰임새가 애매하기는 했다. 옮겨간 집을 청소하기에 먼지통이 너무 앙증맞았고 코드 길이 또한 터무니없이 짧았던 것이다. 그래도 일이 좀 귀찮아진다 뿐이지 별달리 말썽을 일으키거나 크게 고장 난 부분이 있는 건 아니어서 그냥 콘센트를 거실에서 한 번, 부엌에서 한 번, 방마다 한 번씩 바꾸어 가며 썼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견물생심이라, 남편이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새 청소기가 든 박스를 들이밀자 와우, 이것이 내가 꿈에도 그리고 생시에도 그리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조각이 당신으로 인해 바로 지금 완성되었다, 싶고 하여튼 되게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 청소기는 정말 여러 가지 멋진 점을 갖고 있다. 코드 길이가 무려 5m나 되는데 본체 안에 전선이 착착 감겨 있기 때문에 때때마다 필요한 길이만큼 잡아 빼서 쓸 수도 있었고 심지어 코드 감기 버튼이 있어서 따로 선 정리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크기가 넉넉하고 비우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는 먼지통도 마음에 들었다. 안쪽에 장착된 필터는 아니 글쎄 미세먼지까지 잡아준다고 하는데 물 세척이 가능한 데다 여러 번 다시 쓸 수도 있는 그야말로 최상위의 경제적 마법!


기본 흡입구와 함께 제공되는 '코너 팍팍 흡입구' 역시 이 청소기의 대단히 사랑스러운 부분 중 하나였다. 청소기의 흡입구가 벽의 모서리에 맞게 기역자로 꺾어질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그야말로 물건 중의 물건이라 할 만했다.


청소기를 끌면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닐 때마다, 와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괴상하기는 한데, 나는 내가 번듯한 성과 영지를 갖춘 성주가 된 것 같았다… 뭐어 진짜 성주들은 영지 경영을 두고 휘하의 식솔들과 업무 분담을 할 때, 보통이라면 분담이 아니라 명령을 하겠지만, 아무튼 성주씩이나 돼서 청소를 하는 역할을 맡으려 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거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청소기가 어째서 창고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느냐 하면.


때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남자친구에서 동거인으로 승격한 남편이 이번에는 다이슨 무선청소기라는 신문물을 들여왔다. 코너 팍팍 청소기를 받았을 때만큼 설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이슨이고 자시고 말이 좋아 무선이지 자고로 전기는 전선으로다가 팍팍 당겨 써야 제맛인 거라 충전식은 모터 힘도 약하고 영 쓸모가 없을 텐데 하이구 물정 모르는 양반이 순진하게 속았구먼 속았어! 뭐 그런, 복잡한 심정이었다고 해야 할까.


기껏 고심해서 살림을 장만했을 동거인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선은 나의 소중한 코너 팍팍 흡입구 진공청소기를 창고에 곱게 모셔 두고 언제든 다시 꺼내 쓸 수 있도록 나름의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다이슨 청소기가 너무… 우주급 성능을 내는 바람에…




오래전 냉장고 없이 한 계절을 지 적이 있. 뭐 대단한 결심이 있었거나 그래서 그런  아니, 그냥 집에 냉장고가 없고 냉장고를 살 돈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가 겨울이라, 반찬통을 부엌의 이중창 사이에 쌓아서 보관하면  주 정도는 넉히 먹었다. 창틀에 끼여 겨울밤을 지낸 김치는 시골 장독에서 꺼낸 것처럼 아삭아삭했다.


그때는 당근마켓이 없고 중고나라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쨌든 생활에 밀접한 물건을 찾기에는 '피터팬 좋은 방 구하기' 카페가 더 유리했던 거로 기억한다. 이름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듯 이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동산 카페였는데, 판매자가 살던 곳보다 좋은 조건으로 나가며 처분하는 물건들일 경우 대개 내놓는 값에 비해 상태가 좋기 때문이다. 겨울의 끄트머리쯤, 냉장고 없이는 원만한 섭식 생활이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만큼 푹했던 날에, 드디어 '그런 조건의' 냉장고를 구하는 일에 성공했다.


천지신명님도 21세기 현대 사회의 과학기술력에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긴 건 꼭 이부자리 한 채도 다 들여놓지 못할 것 같이 새침한 장롱처럼 생겼어도, 문을 열면 얼굴에 찬 기운이 확 끼치는 게 참 야무진 친구였다. 그냥 차갑게 먹을 것과 꽝꽝 얼려두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보관할 수도 있고 차갑든지 얼었든지 어느 칸이든지, 반찬통을 넣어만 놓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상하는 일이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코너 팍팍 청소기에 영주씩이나 된 감상을 가질 수 있던 데는, 당시의 내가… 원하는 바를 차근차근히 이루어내는 시기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똑바로 하려고 노력을 해도 손에 쥔 것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세상이 나만 빼고 반짝거린다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픈 적도 많았지만 그만큼, 길을 걷다 발끝에 걸린 돌멩이 하나까지 예쁘고 탐이 나고 귀해 보였다.



LG 싸이킹 파워 진공청소기 C40SGY

당근마켓을 통해 이만 원에 가져가겠다는 분을 만났다. 작동에 문제가 없긴 해도 외관이 워낙 낡은 물건이라, 쓰겠다는 분이 나타날까 의심스러웠는데 글을 올리자마자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다. 어쩐지 공돈이 생긴 기분이라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남편에게

아 남편만 안 버리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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