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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2. 2023

눈에 띄지 않는 곳부터

작별 2. 창고에서 발견된 쓰레기들

남편은 퇴사에 찬성했고 환승에는 반대했다. 이직을 하되 우선은 좀 쉬라는 거였다. 그는 내게 네 달의 유예를 제안했다.  그릇을 헤아려 봤을 때 딱 네 달까지 가능하겠다고. 자기는 아내가 돈을 버는 것이 너어무 좋으니 이 기회를 빌미로 삼아 백수가 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고 단히 주의를 주다.


네에, 뭐어… 아무렴요!


나는 집안에 들어앉아 놀 생각만으로 이미 너어무 행복했기 때문에 남편이 양해한 세 달을 알차게 꽉 채워 쉴 작정이었다. 남편이 말한 것은 네 달인데 왜 나는 세 달을 생각하느냐 하면… 그가 물컵에 담긴 물을 마실 때 언제나 바닥으로부터 손가락  마디쯤 남기는 버릇이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자기 속을 짚어서 남의 속인 거라.


그런데 무작정 놀기만 하면, 아차 하면 다시 일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좀 쓰면서 놀아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든 거다. 요사이 세계정세와 경제가 모두 수상하고 그러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러저러한 부정적인 상황이야 물론 나도 알지만… 우선은 한 달을 놀고, 으음, 두 달도 놀까? 아무튼 그다음에 이력서를 다 보면 나를 오라는 곳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엣헴 나도 마냥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인 건 아니, 라는 느낌으로, 남편에게 요즘 쓰는 일기들의 테마를 이야기했다. 청소를 하고 그날 버린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거야.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를 정해서 꾸준히 업로드해 보려고. 그러니까… 남편이 머뭇거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살림을 거덜내고 싶은 거야? 일주일에 한 번씩 물건을 버리겠다고?


그새 집안의 온갖 세간에 정을 붙인 모양이지. 남편의 사정이 이러한 관계로 두 번째 소재는 그의 눈에 자주 띌 일이 없는 창고에서 찾기로 했다.




이번 단락과 윗 단락 사이에는 만 하루의 시차가 있다. 남편의 마음 사정을 고려하려고 했다가 망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쌓인 세간을 들어내면서 진짜로 크게 후회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우리 집에 거덜낼 살림이 많았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다고 하잖아? 내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반의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쌓아 놓았던 물건만 갖고도 한 달 내내 쉬는 날 없이 매일매일 글쓰기가 가능할 것 같다.


대저 우리 집에서는 어떤 물건이 창고행 판정을 받는가 하면, 우선은 계절 가전이다. 여름에는 가습기와 전기난로를 창고에 넣어 두고 겨울에는 제습기와 서큘레이터, 선풍기가 창고로 간다. 이외에도 한때 유용했으나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생활 가전들이 길이가 애매한 멀티탭 뭉치와 함께 들어있었고, 폼롤러와 요가 매트, 남편의 기타, 결혼사진, 앨범들, 추억 여행용 잡동사니를 몰아넣은 것 같은 박스가 두 개 발견됐다. 그것까지 뚜껑을 열어버리면 하루 안에 일이 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우선은 가만 두기로 했다.


보관 사유를 알 수 없는 물건들도 발견됐다. 싱크대 걸레받이인 것처럼 보이만 중간이 부러져 쓸모없어진 판때기, 등짝만 한 조각 장판 서너 장… 아마도 가구의 수평을 잡을 때 잘라 고일 용도로 유용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가 4년이 되었나 6년이 되었나 가물가물한데, 하여간 살면서 한 번도 꺼내 쓴 적이 없다. 그 밖에도 싱크대를 리폼할 때 쓰고 남은 시트지,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 트리 전구 등등.


전부 버렸다. 속이 아주 시원했다.


기록으로 남길 만한 짐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서, 인간의 기억 처리 과정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걸 왜 가지고 있었던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어 과거의 내게 저의를 묻고 싶은 지경에 이를 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두었다가 단박에 내다 버리도록, 사람은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있거나 심리적 고통에서 회복 중인 사람에게는 이런 행동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다. 덕분에 내 머릿속도 기쁨과 슬픔이 한 순간에 끓어 올라 아주 흙탕물이다.



미래의 나에게

버릴까 말까 싶을 때는 그냥 좀 버려. 살까 말까 싶을 때는 세 밤만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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