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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1. 2023

번아웃 비슷한 것

작별 1. 회사

나는 이곳에서 만난 동료의 면면이 괴로워도 아니고 이곳의 조직 문화가 불편해서도 아니고 글쓰기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어서도 아니고 일이 재미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고, 출퇴근 시간 때문에 퇴사를 한다.


맹세코 이런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이유로… 직장을 관두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고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 그냥 정직하게 쓴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하루 세 시간에서 세 시간 반 정도를 출퇴근에 소요하는데, 장대비라도 쏟아지는 날에는 목숨을 걸고 후룸라이드를 타야 한다. 교통체증이야 예삿일이고. 막히지 않는 날이 재수 좋은 날이라고 봐야 옳겠다. 개인적으로는 가정의 평화가 이룩되고 직장 내 괴롭힘이 사라지는 날 대한민국의 교통체증이 해결되지 않을까 가설을 세워두고 있다. 하루 중 자동차에서 보내는 시간을 가장 마음 편안 순간으로 는 이들의 수가 속히 줄어야 한다.


따로 재택근무 제도가 없는 곳이라 오늘은 정말로 도로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다 싶은 날에는 연차를 고 집에서 일했다. 보를 믿고 연차를 썼는데 하필이면 맑은 날이 내게는 최악의 날이었다. 피로가 쌓이는 속도 비해 그것을 해소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다.


분기별 업무량의 고저 차가 크지 않은 직장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 년치 업무량의 대부분이 한두 분기 사이에 집중돼 있고 그런 시기엔 야근이 불가피하다. 일이 정말로 많아서 많은 건데 어쩌나. 긴 시간 일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어느 정도는… '그런 시기'의 강도 높은 업무량이 이곳의 좋은 문화를 보장하는 바탕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잖아. 당장 돌봐야 할 일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황이면 옆자리 동료의 팬티색이 빨강인지 파랑인지는 크게 중하지 않다. 삼십 분 뒤에 손님이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똥 냄새가 진동을 하면 어느 댁의 귀하신 분께서 싸질러놓은 덩어리인지, 궁금하기야 하겠지만, 그걸 안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괜한 엄포와 수선이 오가는 것도 다 손님맞이가 끝난 뒤의 일이지.


회사 밖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도 그가 아침을 이기고 출근을 했다면 고맙고 소중하고 얼굴만 봐도 애틋한 나의 동료다. 그런 동료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회사를 관두겠다고 하면  재난이 다름 없다. 남은 이들끼리 빈자리를 메워야 하는데 일이 그렇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가 심지어 나라고? 내 동료의 멘탈이 무사해야 나의 안전도 확보할 수 있 법이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한 것 같은데, 결국 번아웃 비슷한 게 왔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상황의 심각성을 단박에 알아챘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올 게 왔구나 싶었고 굳이 콧구멍을 쑤셔보지 않아도 코로나는 코로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니까 내가 번아웃을 번아웃이라 적지 않고 '번아웃 비슷한 것'이라 쓰는 이유는 이게 정말 그게 맞는지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냥 피곤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사이 나이를 먹어서 체력이 떨어진 걸 수도 있고 겨운 복에 취해 이전보다 덜 근면하고 덜 성실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일이 하기 싫은데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책임져야 할 남편과 고양이까지 있는 마당에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퍽 하고 때려치우기는 사람이 염치가 있지 멋쩍으니까, 그래서 그냥 해보는 말일 수도 있다. 아무렴.


모든 것은 천천히 변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밤새 두들겨 맞은 것 같이 몸이 아팠다. 그런데 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밤이 되면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지각 늘었다. 어휘력이 줄었다. 감각과 반응 사이에 눈에 띄는 공백이 생겼다. 글을 읽을 수 없었다. 환절기 때 잠깐 보이고 말던 비염 증세가 일 년 내내 극성을 부렸다.


당장 용변이 급한데도 화장실을 갈까 말까 고민하던 날에 처음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래도 어찌어찌 생활이 굴러는 갔다.


하나의 업무에서 다음 업무로 건너뛰는 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심장이 내려앉았다. 귀가하는 즉시 침대로 직행했다. 휴일에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간식을 달라 조르는 고양이가 성가시고 야속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얼굴과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일,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소하고 간단한 일조차 큰 결심이 필요했다.


어느 날은 앞서 달리던 차가 교통사고를 냈다. 차선을 급하게 바꾸어 가려다가 제 앞의 차량을 들이받은 것이다. 앞차의 비상등이 깜빡이는 것을 보는데 갑자기 머리끝까지,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화가 났다.


머리통에 눈깔 두 개는 장식으로 달았나 차폭 계산도 똑바로 못하는 오라질 놈의 새끼가 괜한 사고를 내서 안 그래도 다 같이 바쁜 출근길을 혼잡하게 만들고 저런 건 차라리 지금 그냥 뒤져야 한다 저 등신이 내 차를 받았으면 내가 출근을 안 해도 되는 건데 기왕지사 사고를 낼 거면 나를 받았어야지 빌어먹을 것도 없는 저잣거리 상놈의 새끼야… 멍청이야 나를 받았어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중에 몇 단어는 심지어 입밖으로도 내뱉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느새 이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난관에는 언제나 마취가 동봉되는 것 같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좀처럼 깨닫기 어렵고, 알아차린 순간에는 거기서 벗어날 기력이 부족하다.


내가 그랬다. 지금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인지를 고민하고… 환승 이직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퇴사 후 휴식기를 가지는 것도 고려해 봤다. 이사를 하자니 내가 겪을 고통을 남편에게 떠넘기는 것밖엔 안 되고. 주어진 모든 선택지가 다 마뜩잖았다. 해결책으로 쓸모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앞으로 뭘 해도 잘될 것 같지가 않았다.


두어 달을 양생에만 힘썼다. 영양제를 한 줌씩 먹었다. 마그네슘, 아연, 비타민 B와 E군이 피로와 관계된 영양성분이라고 해서 모두 먹었다. 특히 코큐텐에게 큰 신세를 졌기에 이곳에 밝힌다. 코큐텐은 신이다.


식욕이 돌아왔다. 당기는 음식이 생기는 족족 배달을 시켜 먹었다. 집안 곳곳이 누군가 작정하고 결딴낸 것처럼 섬세하게 무너져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모른 척했다. 그걸 들여다본댔자 의무감에 시달리기나 했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길 의지는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편의 노력이 없었다면 진작 쓰레기장이었을 것이다. 나랑 결혼한 일에 심심한 조의와 감사를 표하는 바다.


얼마간 기력을 되찾은 것 같다는 판단이 섰을 무렵 운동을 시작했는데, 내 생각에는 여기에 이천이십삼 년 최고의 행동상을 수여해도 괜찮을 것 같다. 피로 없는 수면을 취할 수 있 됐다. 사람은 매일매일 지치기 전에 졸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인생에 적신호가 켜졌을 때 운동을 시작하라는 세간의 조언은 참말로 참말이었다. 마음이 염병을 떠는 데는 쇠질이 최고다.


간단한 일상생활이 어렵지 않게 되자, 내 안에 사는 긍정맨이 이제 일터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회사는 내 생활에 들여놓기에 너무 부피가 큰 선물이었다.



이곳에 속한 모든 분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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