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소원이 들어갈 빈칸을 마련해야겠다고, 조금쯤은 삶에 아쉬운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집안꼴을 돌아보니 나날이 거지꼴이다. 어느새 용도가 분명치 않은, 풍경으로만 기능하는 물건이 산더미다.
어릴 적에는 이사를 자주 다녔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온갖 잔짐이 버려졌다. 당시의 내게는 그게 큰 문젯거리였다. 매 시절마다의 사사로운 기억을 돌이킬 만한 물건이 너무 적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부엌에 담금주가 보관된 선반을 두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시간을 쌓아온 사람과 환경을 뜻하기에 좋은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편은 나의 동거인이 되기 전까지 계속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래선지 교우 관계가 독특하다.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중학교의 친구가 소개해서 알게 된 고등학교 친구, 중학생 때 친구의 친구였는데 마침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어 친구가 된 친구, 동네에서 오다가다 만난 애인데 알고 보니 내 친구랑 친구라 본격적으로 친구가 된 친구…라는 식으로 열댓 명 남짓 되는 학창 시절 동네 친구와 변함없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자라온 환경 덕인지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은 나보다도 더 물건에 정을 주는 편이다. 각종 티켓이나 영수증, 행사장에 입장할 때 채워주는 종이 팔찌와 같이 거기에 담긴 기억 외에는 쓸모를 상실한 종잇조각 같은 것을, 다람쥐가 숲의 눈을 피해 도토리를 감추듯 차곡차곡 모은다. 그래도 다람쥐의 건망증 덕에 상수리나무가 자라는 법이니까, 대개는 가만히 두는 쪽을 택한다. 남편이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그렇지만 집안의 엔트로피 증가폭에 남편이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없다. 좀처럼 새 물건을 원하지 않으니까. 이때껏 함께 살며 관찰해 본 바 남편은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는 유형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종잇조각 같은 것이나 착실하게 모았다가, 아내의 종용을 받으면 마지못해 버리기를 택하는 무해한 인간…
그러니까, 요사이 발생한 가내 상황의 원인 제공자는 나라고, 이제 인정을 해야겠지…
포장을 뜯기가 아까워 쓰지 않은 선물들, 끝까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꽂혀있는 책,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엄마에게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보관하는 옷, 끝내주게 불편하고 예쁜 구두, 몇 번인가 시도와 실망을 반복하다 방치된 색조 화장품, 각종 취미 생활에 쓰이다가 창고에 처박힌 자질구레들.
물건을 버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거기에 들러붙은 기억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끼리 작고한 이의 생전 이야기를 나누거나 추모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버려야 할 물건에 묻은 사사로운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시간에도 소화가 필요한 법이라, 어쩌면 버려야 하는 쪽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일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