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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일 년에 한 번인데

시작하는 글 (1)

올해 생일은 거의 3주에 걸쳐 축하를 받았다.


생일 직전 주말에 아빠와 삼계탕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아빠가 남편하고 당구를 치겠다기에 설렁설렁 따라가 두 사람을 구경했다. 첫째 판은 남편이 이겼다.


아빠는 패배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기실 아빠의 실력이 남편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반쯤 져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살짝 봐주기만 했지 져줄 생각까지는 없었던 듯했다. 아빠는 진심을 다해 두 번째 경기에 임했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승부에 결착을 짓는 대신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내 생일인데 왜 남편하고 당구를 치느냐 볼멘소리를 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두 사람이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정말이지 별일이다. 다 자란 내가 아빠와 당구장에 갈 일이 생기리라는 것도, 내게 남편이 생기리라는 것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아빠와 남편이 서로 친해야 한다고 여겨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도 그게 행복했다.




당일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 시댁에 갔다. 두 분이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쓰고 계셨다. 베란다 창문에는 생일 축하 풍선이 붙어 있었다. 네 사람이서 일주일 정도를 너끈히 먹을 법한 양의 식사가 준비돼 있었는데,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었다. 미역국과 잡채, 갈비는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생일상에 꼭 들어가야 하는 메뉴인 것 같았다. 그날의 메인 요리였던 장어는 양념을 발라 구운 것과 초밥에 올린 것 두 종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곁들임 반찬으로 깻잎 장아찌와 생강채, 샐러드, 물김치가 상에 올랐다.


엄청나게 과식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하고 남편이 딩크를 택한 게 좀 아쉽다고도 생각했다. 어머니는 이미 훌륭한 할머니가 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미래에 남편의 동생이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는다면 어머니는 아마도 그 아이의 배를 완벽하게 터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셨다. 장어를 굽고 생일 축하 풍선을 불어서 장식한 건 아버지라고도 했는데, 아버지는 별다른 부언 없이 그냥 웃기만 하셨다.


나는 좀 느슨한 환경에서 자라온 편이라, 시댁의, 뭐랄까… 두 분이 가꾸는 풍경의 전형이 낯설다. 두 분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남편과 나를, 글쎄, 퍽 성가실 법도 한데 진심을 다해 돌봐주고 싶어 하신다. 기이한 일이다. 어쩌면 두 분은 세상살이에 너무나 베테랑인 나머지 당신들이 책임지고 돌봐야 할 것들의 목록에 사람 한두 명 추가되는 것쯤은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을 물린 어머니가 케이크를 냈다. 조각 케이크 여덟 개가 한 세트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다양한 종류가 든 것으로 골라왔다고 하셨다. 초를 꽂은 케이크 앞에서 다 같이 노래를 불렀고 '사랑하는' 부분에 멋쩍은 공기가 내려앉은 게 재미있어서 웃었다. 아빠와 남편이 그랬듯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도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에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랑도 있는 법이지만, 그걸 상대에게 들키고 마는 건 아무래도 쑥스러운 일이다.




생일을 지나고 맞은 주말에는 M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갔다. 그녀 또한 만만찮게 준비된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닭갈비에 고추장 양념을 바른 것과 소금을 쳐서 구운 것, 양파와 피망이 들어간 찹스테이크, 마늘과 아스파라거스를 가니쉬로 써서 구운 소고기, 토마토소스에 손수 빚은 뇨끼를 얹어 익힌 것, 한입 크기의 식빵 위에 산뜻한 맛이 나는 소스를 발라 칵테일 새우를 올린 것, 콘옥수수와 다진 양파, 당근이 들어간 매쉬드포테이토, 닭가슴살 샐러드, 베이컨이 들어간 크림 스파게티.


후식으로는 뜻밖에도 케이크가 나왔다. 함께 초대받은 J가 준비해 온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날 커다란 보냉백을 들고 왔는데, 내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궁금해하자 드물게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케이크를 넣어가지고 온 거였다. 미리 눈치를 챘다면 괜한 질문을 삼갔을 것이다.


진주알 같이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초콜릿으로 장식이 되어 있고 복슬복슬한 푸들 모양의 양초가 꽂힌, 대단히 우아하고 귀여운 생크림 케이크였다. 꾸덕꾸덕한 초콜릿 시트 사이에 가볍게 휘핑을 친 얼그레이 크림이 쌓여 있어서 과하지 않은, 그러나 충분한 단맛이 났다. M을 축하하기로 약속하고 모인 행사에 나를 축하하는 일도 끼워준 셈이라 많이 고마웠다.


이번에는 아무도 어색하지 않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남편과 친구들은 내게 소원을 빌라고 말했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소원이 없어 그냥 촛불만 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럴 수가 있나.

소원이 없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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