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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0. 2023

싫어서 관두는 건 아니에요

작별 1. 회사

글쓰기를 하자고 다짐했기 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회사는 물건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곳인 건 맞아서, 첫 번째 이야깃감으로 골랐다.


퇴사를 생각하고 나니까 뭐라도 좀 쓰고 싶어졌다. 반드시 마감을 지켜 완성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듯한 결을 갖지 않아도 되고, 상급자의 지시에 맞춰 이모저모를 뜯어고치지 않아도 되는 글쓰기. 그러면 나도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 가벼운 자세가 돌아온 게 반가워 떠날 마음이 단해졌다.


실은 아직 주저하고 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합리화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봐서. 언젠가 다시 새로운 일터를 찾아야 할 텐데 그때 지금을 후회하게 될까 정이 든다. 후회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쓰는 글 앞에서까지 자신을 과장하 선택에 당위를 부여하 애쓰고 있는지모르니까.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글쎄. 객관적인 기준에서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크게 나쁘지 않은 직장이다.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무척 좋은 곳이기까지 하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부침이 있다. 당연히 이곳에도, 내가 하는 일에도 고난과 역경은 존재한다. 사내 정치라 불릴 법한 일도 생긴다. 조직원 전부가 온 힘을 다해 크런치 모드로 굴러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소규모 인원으로 유지되는 곳임에도 권력과 구조가, 나름의 푸른 거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내게 좋은 직장이었다. 이곳 업무의 연간 흐름에는 언제나 매년마다의 결말이 는데, 눈앞에 명확한 골인 지점을 두고 일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더 많은 기운을 낼 수 있다는 걸 이곳에 와서 일해보고 알았다. 마지막이 있으니 간절함이 생겨서 작은 일 하나하나마다 성취감이 대단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는 일에는 결말이 있기가 의외로 어렵다. 대표적인 것으로 집안일을 꼽을 수 있겠지. 눈 뜨면 먹고 먹으면 치우고 돌아서면 배고프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고… 인생이 소설이나 영화만큼 재미있지 못한 이유도 결말의 부재 탓이 클 것이다. 대단한 파국을 겪어도, 찰나가 영원 같은 기쁨 속에 살아도 언제나 내일이 온다.


이 조직에 복장 규정 같은 게 없다는 것도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맨투맨도 괜찮고 셔츠도 괜찮다'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무엇을 입고 출근하든, 화장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무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잘은 모르겠지만, 비키니 차림으로 출근하는 정도는 되어야 겨우 이들을 놀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래시가드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이곳의 동료들이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것은 오직 내가 맡은 일과 그 일의 상태에 관한 것뿐이다. 그야 일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니까. 자칫하면 굉장히 건조하고 피상적인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는 조직이라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도 당연히 외모나 복장이나 기타 등등에 관한 말들이 오간다. 평가가 아닌 감탄이나 염려, 혹은 가벼운 호기심의 차원에서.


조직원 대다수가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대개의 경우 별다른 자기변호 없이 문제 상황을 공유할 수 있고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적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진을 빼거나, 과한 책임을 지게 될까 봐 쩔쩔매거나, 그런 상태에 놓인 상대를 달래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책임자를 적발하고 추궁하는 건 언제나 낮은 순위에 머다. 이곳의 사람들은 사건사고 자연발생설을 신봉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들을 풀려고 회사에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도 많은 동료들이 한결같이 '해결하면 그만이야'라는 태도를 유지한다.


오. 물론. 이들이 방만한 트러블 메이커나 프리 라이더를 마냥 방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곳에서 동료의 일을 방해하는 행위는 어마어마한 중죄로 치부된다. 까딱 방심했다간 치도곤을 당할 수 있으니 유의해야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게 분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날에도 나는 여기가 좋았다. 다들 어디 병든 데가 있나 싶게 다정한 이들이었다. 이곳에서 나눈 일 이야기들의 행간에는 마도 늘 '아무도 이 문제로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만 고민을 해서 방법을 찾으면 금세 해결될 일이다, 이것은 아주 작고 귀여운 해프닝에 불과하다, 글쎄 지난번에는 말이야…'와 같은 마음이 묵음 처리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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