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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4. 2023

우주가 보우한 우정

작별 4. 가습기

우리 집에는, 생각해 보니 청소기도 그랬던 셈인데, 가습기가 두 대나 있다. 주로 잠을 자는 방에서만 필요한 가전이니까 소용에 넘치게 가진 셈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소꿉장난 같은 살림에 하나만 있어도 되는 물건을 두 개씩 쟁여놓고 살 이유가 없으니, 이번 기회에 둘 중 하나는 처분하는 게 맞다.


모두 오아라는 브랜드의 제품인데, 하나는 대학원 시절에 만난 후배 L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넓적한 원통형에 검지 세 마디가 모두 잠기는 정도의 깊이다. 눈대중보다 용량이 커서 한 번에 1L의 물을 넣어 쓸 수 있다. 특이 사항 무드등을 겸할 수 있다는 이겠다. 기본 구성품에 리모컨이 딸려 있어서 밤이 되면 집안의 큰 조명들을 끄고 홀로 켜두기에 편리하다는 점이 좋았다.




키가 큰 사람을 말할 때 '멀대 같다'라는 표현흔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키 큰 여자들은 하나도 멀대 같지가 않다. 도리어 뱃심과 강단이 대단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활기가 가득해서, 신이 그이들을 만들 때 유달리 재료를 많이 쓴 게 아닌가 싶다. 불어넣은 숨만큼 부푸는 풍선처럼 원체 넘치는 에너지를 타고나 키 껑충 큰 것인지 모르겠고. 후배 L도 웃자람 없이 근사하고 튼튼하게 잘 자란 친구였다.


L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학부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고 나는 모교 대학원을 다니며 학부의 행정 업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명목상으로야 선후배지만 실상은 오다가다 만나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익힌 사이에 가까웠다는 의미다. 그렇게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던 시절에도 나는 그녀에 특별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 


신기하게도 그녀는 원하는 것 앞에서 양보가 없었다.


그녀가 주위를 배려할 줄 모른다거나, 도무지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기분 변화를 기가 막히게 잘 읽는 축에 속했다. 그게 그녀의 신기한 면모였다.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해치려 들지 않는 선량함과 자신이 원하는 바를 틀림없이 직시하는 맹렬함이 상충하는 바조차 없이 한 사람의 자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 앞에서 정직한 자세를 유지했다. 제 키에 맞춰 주변을 구부릴 만큼의 억지를 부리지 않았으며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괜한 겸양을 부리는 법도 없었다.


내게는 도무지 없는 재능이라 L의 이러한 점이 더욱 인상 깊게 남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내게 보여준 것처럼,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단정한 태도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또 성취하는 사람의 모습을 관찰할 기회는 이후로도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우리는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는데, 그제야 나는 그녀의 모양새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자신의 원리를 구축해 온 과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위로 한 명의 언니를 두었고 아래로는 한 명씩의 여동생과 남동생을 두었다. 언니는 장녀였고 여동생은 막내딸, 남동생은 장남이자 막내아들인 환경에서 자란, 둘째 딸.


나는 혼자서 상상해 보았다. 날 때부터 이름이 둘이었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녀는 제 이름 하나만을 받아 태어났다. 그탓에 이유 없이 배고프고 허전한 날도 있었겠으나 또 그렇기에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것을 깨닫기까지 행운이 곁에서 그녀를 도왔다고 해도 제가 불릴 이름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에 르게 익숙해기까지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




한 번은 L과 부산 여행을 갔다. 처음부터 떠나기로 작정해서 간 여행은 아니었다. 그사이 L은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했고 리는 학과사무실을 함께 지키는 동료 사이가 되었는데, 선생님들을 모시고 부산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일이 생긴 것을 우리가 멋대로 우리의 여행 콘텐츠인 것처럼 바꾸어버렸다. 여행에 활용한 교통수단은 다름 아닌 나의 자동차였 이 기회를 빌어서 L에게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다…


그때 나는 진짜로 초보 운전자였다. 운전면허를 딴 것은 두 해 전의 일이었지만, 면허를 따자마자 몰았던 건 100cc짜리 스쿠터였지 자동차가 아니었다. 운전을 해서 부산까지 가겠다고 작심했던  자동차를 장만하고 두 주였나 세 주였나, 하여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디서 나온 정신 나간 자신감인가는 모르겠으나 그때 나는 자신만만했고 장거리 운전을 혼자서 하면 여행길이 따분해질 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나는 동승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세 명의 교수님과 두 명의 연구교수님이 이를 거절했는데 L만은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행여 차를 타고 가다가 모종의 불운한 사고가 생기더라도 저얼대로 선배님 탓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맹세였지만 나는 마냥 궁금했다. 왜 저런 말을 하지? 문제가 생길 리가 없는데.


놔눈 붸수투두롸이붜인뒈?


오. 물론. 나는 부산의 운전자들에 관한 세간의 평가 대부분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험악한 것은 부산의 운전자가 아니라 그곳의 도로다. 세상에는 우회전과 큰 차이가 없는 직진이 있고 거의 유턴에 가까운 좌회전도 있다는 것을, 한 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미지의 장소로까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산에서 배웠다.


반면에 부산의 운전자들은… 어쩐지 지시등을 잘 켜지 않는 것 같은 경향이 있기는 해도, 사실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클락션도 울리지 않는 것 같다. 조명이나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하느라 애를 먹느니 그냥 앞질러 가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들 중 누구도 내게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가겠거니 하면 갔고 끼겠거니 하면 끼었으며 어련히 나를 피겠거니 하면 피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부산의 운전자들은 내가 아기 운전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속으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여기서 저쪽으로 들어가야 돼요 제발요 이번에도 못 끼면 제가 정말 친구 앞에서 면목이 없어져요 생각하면 그들은 내가 깜빡이를 켜는 것을 깜빡해도 그냥 나를 끼워줬다.


덕분에 아무런 모종의 불운한 사고도 겪지 않고 우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밤이었고 옆자리에 앉은 L은 잠들었는데, 모르는 차 한 대가 하이빔을 켠 채 내 차의 꽁무니에 바짝 붙었다. 추월차로를 점유하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나는 정말 의아해졌다. 네가 바로 아기 운전자를 핍박하는 미친 자로구나 싶었 그래도 내가 초보인 건 맞으니까 좀 봐주라는 의미를 담아 비상등을 켰다. 뒤따라오던 차는 곧 차선을 바꾸어 멀리 가버렸다.


그 일이 있고도 몇 번이나, L의 자취방으로 가는 내내, 기이하게도 나는 하이빔을 켠 미친 자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비상등 버튼을 눌렀고 그러면 그들은 뭔가를 알아들었다는 듯 차선을 바꾸어 가버렸는데 나, 상대와 내가 나눈 비언어적 대화의 전말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털끝 하나 다친 데 없이 귀가했다. 나는 L의 집 앞에 도착해 잠든 그녀를 깨우며 의기양양했다. 오늘의 성공을 축하하고, 또 기분 좋게 그녀를 배웅하고도 싶어 굳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자동차에,


안개등만 들어와 있었다. 그 꼬락서니로 244km를 운전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미친, 교양 있는 운전자 분들께서는 내가 L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 그녀를 살해하는 일에 실패한 건 운전을 잘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운전자들이 우주의 기운을 모아 우리를 보호해 줬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고… 나는 속으로 그녀가 제발 이 사실을 눈치채지 않았기를 빌면서 허둥지둥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이걸 여태껏 비밀로 간직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날 제 일신상에 무슨 변고가 들이닥칠 뻔했는지 모르고…




L이 선물한 가습기 외에 다른 하나는 내가 구매한 것이다. 가습기 유지 보수 담당을 맡은 것이 남편인데 어느 날 저이가 하는 양을 가만 보니 매일 가습기에 새 물을 채워주고 있는 거라. 그게 너무 번다해 보여 기존 것보다 네 배 큰 용량 골라 주문했다. 뜻밖에 남편은 새로운 가습기를 몇 번인가 사용해 보고는 L이 선물한 물건으로 돌아가버렸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가습기에 담긴 물은 용량과 상관없이 매일 갈아줘야 하는 게 맞고, 새로 산 것은 물통이 본체와 분리되는 방식이라 청소하기에 편리한 부분도 있기는 하나 이전 것에 비해 이음매나 돌출부가 많아서 틈새에 낀 물때를 깨끗하게 닦아내기는 더 어렵다고 했다. 자고로 어떤 업무든지 실무 영역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일들에 관해서는 담당자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옳은 것이어서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이 나았겠으나, 그래도 남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매번 물 채우기 귀찮지 않아?


나는 유지 보수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남편은 말했고 나는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세상에 유지 보수와 적성이라는 단어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고 그게 적성에 맞는 사람과 내가 같이 살면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어서다. 어찌 되었든 실무자께서 본인의 맡은 바 소임에 만족하고 있다고 하여, L과의 우정의 증거를 처분하는 대신 케케묵은 비밀 하나와 담당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습기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청소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오아 리아가습기 OA-HM046

숨만 쉬어도 습한 여름에 가습기가 필요한 사람을 구하려고 하니 잘 될 리가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만 원에도 오천 원에도 나눔 딱지를 붙여도 원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우선 가을까지는 기다려보려고 하는데, 설마 세상의 모든 가습기 유지 보수 담당자에게 배척을 받는 제품을 내가 사 버린 건 아니겠지?



L에게

너의 우정에 거짓말로 보답해서 미안해. 그래도 남편이 네가 준 가습기가 더 좋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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