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졔이 Aug 25. 2023

굳건한 P

작별 5. 침낭

퇴사 의지를 표명하였으나 아직 회사를 다니고는 있다. 돌봐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회사와 약속한 퇴사일은 까마득하고 여전히 매일매일 출퇴근 길 나서는 것인데…


어제는 아침에 두 시간 삼십 분, 저녁에 두 시간을 써서 도합 네 시간 삼십 분이 걸렸다. 아침에는 두 대의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차 사이를 질주했고 저녁에는 범퍼가 구겨진 자동차 세 대를 보았다. 항상 같은 길로 운전을 하는데 매일같이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신기하고, 왜 아직 정답이 서부간선지하도로인 스핑크스식 수수께끼가 개발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 저녁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뻗어버린 것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처럼 마음까지 고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아침이 되어 비교적 가뿐해진 상태로 출근길에 오르며 궁금해졌다. 지금은 또 나름대로 살 만하고 할 만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왜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출퇴 시간 때문에 퇴사를 할까?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매년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 거개의 업무가 마무리되고 구성원 다수가 계약 만료로 회사를 떠나거나 휴가를 쓰고 자리를 비우는 특정한 시기가 있다. 올해도 올해의 끝이 있었다. 해서 나를 포함한 이곳의 사람들은, 이제 올해를 작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하간 모든 일들이 성대한 결말을 맞이한 이후 에필로그격 잡무들만을 주로 상대하던 때에, 갑자기 MBTI 검사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MBTI는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할 때 꽤 유용하다. 자답을 하도록 되어있는 형식의 검사라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혹은 '나는 내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을 때 활용하면 좋은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아는 사람들의 면면을 되새기며 대신 검사를 해보기도 하는데 그이들이 내게 알려준 것과 동일한 결과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 재밌다.


곳에 다니는 동안  사회적 자아의 상당 부분이 바뀌었으리라 짐작하며 검사를 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꾸준하게 ENFP였던 것이 ISTP로 바뀔 줄은 몰랐다. 그 정도면 거의 환골탈태 수준 아닌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저토록 굳건한 P는 대체 뭐란 말인가.


P에 관한 이미지를 요약하여 표현하면 '무계획형 인간' 정도가 될 테다. 기에는 다소의 그러나 분명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랄만 한 걸 세운다. 그걸 지침보다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클 뿐이다. 모름지기 계획이란 언제든 변경할 수 있고 당연히 변경해야 하는 것이다.


조직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P보다 J를 선호한다지만,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자리에는 아무래도 이게 더 적합한 사고방식 게 아닌가도 싶다. 이곳에서 계획은 뭐랄까… 그저 하나의 시나리오다. 한 편의 이야기 안에서 시와 때와 장소, 등장인물이 바뀌면 이야기의 전체 얼개도 바뀌듯이. 이곳은 계획에 따라 일이 진행되기보다 일에 따라 계획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잦다. 내가 유달리 변덕스러운 상사를 모시고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여기가 상황을 모시고 일하는 곳이라서 그렇다.


바뀐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과 어쩔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은 가급적 빠르게 받아들인다. 가끔은 그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 맞는지, 충분한 자원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를 대동하면 어쩔 수 있는 일로 바뀌지 않을지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맞기 때문에 여기에 시간을 투여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그런 다음 어쩔 수 있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의 의지와 선호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대안의 실현 가능성과 이에 대한 조직의 의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안으로 적합하고 주어진 자원을 투입하여 기간 안에 실현해 낼 수 있으며 그것을 상급자가 허락까지 했다면 싫어도 해야 한다. 차라리 내 마음을 고친다. 그렇지만 내일이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을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대체로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고 타고난 통제욕도 낮은, 굳건한 P인 나도 자기 통제감에 상처를 입는 일만큼은 막을 도리가 없다.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에서 오는 불안 사람을 무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없이 나쁘고 못된 인간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어서, 반드시 주의 깊게 다뤄야만 하는 아주 무서운 감정이다. 나는 타인을 착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회복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해서 일찍이 몇 가지 방법을 강구했는데 운전과 청소, 글쓰기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하는 글쓰기는 회사의 것이다. 사료와 사려, 염두와 염려, 고심, 고려, 숙고, 궁리, 근심, 고민, 고뇌와 같은 단어들을 생각이나 걱정으로 뭉뚱그리는 글쓰기. 운전대를 잡았으나 도로 사정까지 나의 소관인 것은 아니었고 경기도민의 소중한 빨간 버스는 입석이 금지되며 이전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수단으로 바뀌었다. 운전을 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귀가는 늦을 수밖에 없고 그러니 청소기와 세탁기를 마음껏 돌릴 수 없다.


나는 내가 가진 심리적 방편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환경에서 너무 오래 일했던 것이다.

이전 08화 우주가 보우한 우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