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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26. 2023

탈주로 흥한 자

작별 5. 침낭

'휴브리스hubris'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어로는 대개 교만 정도로 번역된다.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자신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 활용하며 한 겹의 의미를 더 갖는, 일종의 개념어가 되었다.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고 어디서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만 주워들은 터라 내 이해가 맞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대충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정도의 의미라고 기억하고 있다.


오늘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의 퇴사는 완전한 기정사실이 되었다. 나는 이전에도 한번 이런 식의 탈주를 기획해본 경험이 있어서, 이제부터는 탈주로 흥한 자가 탈주로 망하게 될 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처지다. 어제 침낭 얘기를 하기로 정해놓고 회사 얘기만 신나게 쓴 것도, 속에 든 설움이 나도 모르게 줄줄 새서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한데, 이 침낭들이 탈주와 관계가 깊은 물건이 그랬다.


이번에 버리는 두 개의 침낭은 인생 최초 해외여행을 장기로 계획하고 떠났던 시절에 쓰던 것이다. 남반구의 겨울을 얕보고 침낭 하나만 덜렁 챙겨 갔다가 컨테이너 하우스의 무시무시한 추위에 큰 코를 다친 후 현지에서 하나 더 구입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두 개의 침낭을 한 쌍으로 묶어 보관했는데 집에서 노는 것을 최고의 사치로 여기는 나와 남편에게는 도무지 쓸모다. 아주 가끔 이부자리가 여의치 않을 때 꺼내서 썼다.




벌써 몇 년이 된 얘기인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어 보니 8년 전이다. 그때는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매일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갖고 있던 모든 가능성을 바닥까지 긁어 쓴 것 같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저 그런 나날들, 그러니까 도무지 '미래'라고는 불릴 수 없는 자투리 시간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 그래. 스물일곱 살짜리 아기니까… 코웃음이 좀 나더라도 살짝만 봐주기로 하겠다… 어차피 지금의 나 역시 십 년 뒤 나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다.


그때는 진짜 진짜 심각했다. 지금은 지금이니까, 그 애의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아니까 여유롭게 코웃음 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애는 지금을 알 방도가 없으니 눈앞이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열두 살 때부터 소설가가 장래희망이었던 인간이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까지 나름의 풍파를 겪고 마음을 다친 상태기도 했다.


그 애는 오만가지 것들을 다 의심했다. 그중에서 스스로를 제일 많이 의심했다. 그 애에게도 타고난 주랄만 한 게 하나쯤 있었을 텐데, 원체 바닥이 얕은 믿음이었는지 그 애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단박에 휘발되었다. 그러자 그 애는 또 자기의 열의를 의심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는 마음을 숨기려고 거짓말한 게 아닐까. 오랫동안 그게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에, 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이들에게 '사실은 아니었나 봐'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아직도 그게 사실인 척 버티는 것뿐인 게 아닐까.


여기에서 거기로 뭐라 말을 건넬 수가 있기만 하다면, 나는 그까짓 게 뭣이 그리 중하냐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다. 그냥 하면 되지. 해. 하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너는 원래부터 그게 하고 싶었고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 난 희대의 대천재라고 거짓말을 해. 그러다 아닌가 보다 싶으면 그냥 팍 때려치워도 되는데 뭐가 문제야, 그런다고 경찰이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이 애는 정말 애송이라서 매사에 걱정이 많고 낯짝이 두껍지 못한 게 흠이었다. 그래도 자기의 걱정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정리하는 방법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1-1) 나는 내할 수 있는  다 해봤고 이제는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2) 하지만 평소의 내가 하지 않을 만한 일은 아직 하나도 해보지 않았다. 1-3)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원래대로라면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해야 한다.


2-1) 나는 내가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2) 이것을 증명하려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봐야 한다. 2-3) 만약 거기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다.


이 친구는 고민 끝에, 도주가 정답이라는 결론을 냈다.


통장을 헐어서 도피 자금을 마련했다. 어쩐지 액수가 빠듯하고 아쉬운 것도 같아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쁘아아, 하고 무작정 우니까 아빠가 돈을 줬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를 좀 어떻게 해달라, 나는 이제부터 도망을 갈 것이니 돈을 내놓아라 생떼를 쓰는 일은 한국의 장녀로 자란 내게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던 일이라 무척 죄송하고 즐거웠다.




나는 저 어리석고 걱정 많은 애송이에게 감사하다. 그때 저 애가 나름대로 인생을 건 고민을 하고, 끝내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보기를 선택해 줘서. 저 애가 있어준 덕분에 인간이 먹고사는 일에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도 됐다. 삼백 불 남짓한 주급, 매트리스 한 장, 침낭 두 개, 캐리어 한 개 분량의 세간으로도 나는 망하지 않았고 나날은 평온히 흘러갔다.


실은 요즘의 나도 저 애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는 것 같고, 여태까지의 일이 그저 다 거짓말인 것만 같다.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고 일기를 쓰는 것 외엔 재미를 느끼는 일도 없다. 에너지 수준이 처참한 지경으로 곤두박쳤기 때문이겠고 조금만 기다리면 나아지기도 하겠으나 당장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저 애보다 여덟 살을 더 먹었다. 그사이 제법 노련미가 생겨서 굳이 먼 나라로까지는 도망을 안 가고, 이제 나도 체통이 있지 아빠한테 전화 걸어서 울기도 좀 그렇고…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짓은 유튜브에서 타로 카드 영상을 보는 이다… 그이들은 그걸 제너럴 리딩이라고 하데, 처음에는 이게 뭔 개수작인가 던 것이 지금은 아주 애청자가 됐다.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의 말을 믿어버리고 싶은 속셈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상상력을 빚지기 위함이라고 정했다.


대개 타로 카드를 읽어주는 사람들은 내가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이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무턱대고 대통령도 되고 영부인도 되고 세계 최고 갑부가 되고 다 된다고 막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미묘하게 현실성이 있는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백화점쇼핑을 간 중국인 부자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가능성을 기꺼이, 전부 다 사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하지만 제 아무리 부자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물건 앞에서는 냉담해지게 마련이라. 점치는 사람들이 도통 구미가 당기지 않는 미래를 제안하는 적도 있는데 그러면 나는 냉큼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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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보니 그제가 처서였다. 확실히 더위가 한풀 꺾인 듯도 해서, 동네에 침낭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나씩은 만 원, 1+1 행사가로 만오천 원이면 와 되게 싸고 좋지 않나?



그때의 나에게

어깨 좀 잘 펴고 다니고 불안해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살아. 그리고 네가 지금 만나는 그 남자 구려. 당장 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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