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졔이 Aug 30. 2023

물건뿐만 아니라 소리로도

작별 6. 우퍼스피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동료들의 플레이 리스트를 노동요 삼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오늘은 누구 차례라는 식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일을 하다가 음악이 듣고 싶어진 사람이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틀어 놓는다. 그걸 가만히 듣다 보면 연잇는 노래들 사이에 공통점이 엿보여 신기하고 재밌다.


어떤 동료는 노랫말에 공들인 노래, 이야기가 분명한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이의 선곡을 듣고 나면 수필집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상 위에 그이가 고른 노래들과 엇비슷한 인상을 주는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이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노랫말에 담긴 이야기보다 음악이 제공하는 공간과 무드를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그이가 고르는 노래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무대로 만들었다. 그이는 그이가 고른 노래들이 만든 세계에서 어김없이 반짝거렸고, 그래서 그곳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이 꼭 어울려 보였다.


또 다른 동료는 무조건 댄스 음악을 좋아한다. 나는 몇 번인가 그이가 일을 하다 말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걸 본 적도 있다. 춤을 추다 말고 거래처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엄격하고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본 적 있다. 무척 가증스럽고 또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이들은 그걸 알고 있었을까? 자기들이 소나무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젠가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던 날의 일이다. 마냥 놀자고 나선 길은 아니었고 무언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목적이 있는 외출이었는데… 어차피 우리는 이유 없는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 고로 모든 외출이 데이트다. 그날의 운전자는 남편이었다. 신호가 긴 사거리에서 정차한 채 먼 데를 보던 남편이 문득 물었다.


만약에 앞으로 평생 음악을 듣지 못하는 대가로 10억을 준다고 하면 누나는 받을 거야?


우리는 곧바로 심각해졌다. 아예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는 거야? 내가 물었고, 남편이 대답했다. 아니야.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는데 그걸 음악으로 인식할 수가 없는 거야. 노래를 들어도? 나는 다시 물었고 남편이 또 대답했다. 응. 그냥 뚱땅거리는 소리의 연속으로만 느껴지는 거야. 그러면 새 소리나 파도 소리를 듣고도 그게 음악처럼 들리지 않는 거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냥 10억 안 받을래.


내 대답을 듣고 남편은 조금 웃었다. 우리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는 데 안심한 것처럼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도 안도했다. 정답을 맞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신호가 바뀌어 남편은 다시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털어놓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정말로 10억이 생긴다면 이 동네에 살면 좋겠네.


그즈음 나는 이미 음악을 듣는 일에 그렇게까지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음악을 듣지 않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쓰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상의 노래들을 소리의 연속으로만 듣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지도 보지도 않고. 나를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떠밀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기 위해서.


오랫동안 무서웠던 것 같다. 물길을 거슬러 들어간 도원에서 복숭아를 얻어먹은 대가로 자기의 세월을 통째로 잃어버린 나무꾼처럼 될까 봐서. 노래 한 곡, 하나의 이야기, 어떤 이의 얼굴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게 되어 끝내는 너무 먼 데까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까지 흘러가버리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여기 이곳에만 단단히 발을 붙이고 싶었다. 현실에 머물고 싶었다. 모르는 곳을 그리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10억이 갖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 버리는 스피커는 고시원 탈출을 기념하며 구입한 물건이다. 그 시절에 나는 게걸스러운 청자였다. 왜냐하면 그때는…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래들이 묘사해 내는 곳으로 기꺼이 갔다. 그건 록페스티벌 현장의 한가운데일 때도 있었고 바로크 풍으로 꾸며진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일 때도 있었고 잘 모르는 한낮의 시골길, 저녁의 작은 소리들이 깊게 내려앉은 숲,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창가일 때도 있었다.


공간은 물건뿐만 아니라 소리로도 채울 수 있는 법이지만 고시원의 좁은 방은 습기 외엔 도무지 채울 것이 없었다. 매일 밤마다 복도에 나와 방문을 힘껏 여닫기를 반복했다. 물론,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방문이 닫힐 때 이는 바람을 이용해 방안의 습기를 덜어내려고 했던 것인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면 스피커를 하나 가져야겠다고. 원하는 소리로 꽝꽝 채워도 괜찮은 곳으로 가서.


캔스톤 A320은 정말 괜찮은 모델이다. 중저음부가 선명하게 긁히지 않는 스피커는 좀이 쑤시고 갑갑한 소리가 난다. 그런 면에서 이 스피커는 좋은 해답이 돼 줬다. 애초에 우퍼가 따로 달린 데다, 두 개의 위성 스피커도 소리를 찢어서 내는 법이 없어 어떤 노래를 듣더라도 조마조마해할 필요 없이 늘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었다.


케이블 연결부가 우퍼의 옆면에 있는 점도 좋았다. 우퍼를 벽에 완전히 붙일 수 있어 전선 정리가 덜 번거로운데다 단선 걱정을 덜 해도 됐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단종이 되어 더는 구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무선 가전의 편리함에 눈 뜨지 않았거나 지금보다 에너지가 조금 더 남아 있어 먼지 청소 힘겨워하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고장이 날 때까지 사용했을 물건이 아닌가 싶다.



Canston F&D A320 (ZU09176-12001)

매번 정말 괜찮은 스피커라고 생각했던 물건이라 꼭 다음 주인을 찾고 싶었는데 당근마켓에 물품을 등록하고 며칠 동안이나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런가, 이제 세상의 대세가 바뀌었는가, 생각하면서 좀 의기소침했다. 그런데 다행럽게도 내게 좋았던 것을 아직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값으로 만오천 원을 받았다.



남편에게

그래도 누가 찐으로 나한테 10억을 대가로 걸고 '그 질문'을 하면 10억을 안 받겠다고 할게. 진짜 진짜로.

이전 10화 탈주로 흥한 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