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에서 포장조차 뜯지 않은, 완전히 새것인 노트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언제 구매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중철 제본 노트가 몇 권 있었고 대다수는 알라딘 서점에서 책과 함께 주문한 게 분명한 굿즈들이었다. 좋아하는 책의 표지와 동일한 디자인으로 양장된 노트를 구매하지 않기는 정말 어렵다.
당연히 쓸 생각으로 샀을 것이다. 실제로는 안 썼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현찰을 다발로 쟁여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닌데, 쓰지 않을 것을 번연히 알고도 구매를 결정하는 짓은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쁜 표지의 깨끗한 노트가 주는 설렘에 의지해서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고, 반듯한 정자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겨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가 오듯 내가 쓰려는 이야기도 결말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겠지.
그러나 그것은 멍청한 판단이었다. 현명한 소비는 철저한 자기 객관화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정말 맞다. 이런 예쁜 노트를 알뜰히 잘 쓰기 위해서는, 백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용기 있게달려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처럼 문장 하나를 두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은/는'과 '이/가'라는 고작 두 가지밖에 안 되는 선택지 사이에서 백 번도 넘게 마음을 바꾸는 쫄보 겁쟁이는 근사한 양장 노트를 쓸 자격이 없다 이 말이다…
저런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간 부담감에 목이 졸려 죽고 말 것이다. 굳이 자필로 무언가를 적어야만 하겠다면 언제든 페이지를 찢어버릴 수 있는 스프링노트가 좋겠고 우리 지구의 안전과 미래까지 고려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디지털의 힘을 빌어 쓰는 편이 낫다.
게다가 나는, 먼슬리 다이어리에 휘갈기는 정도가 그나마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기록물일 텐데 그런 용도로 쓰기에 탁상용 달력만 한 게 또 없어서, 애당초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두고 간직하는 성미가 못 되는 것 같다. 단순한 메모 이상의 수고가 드는 글쓰기를 혼자서만 보기 위해 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글쓰기는 품이 많이 드는 활동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헤집어 찾아야 하고 적당한 단어를 골라 순서를 부여해야 한다. 쓰는 도중에서야 내가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때도 있어서, 그러면 또 다 써놓은 부분을 들추고 고치고 손봐야 한다. 이런 짓을 왜 혼자만 보려고 해야 하지. 당장 읽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앞으로도 영원히 내 글의 독자가 미래의 나 딱 한 명뿐일 거라고 해도 나는 봐주는 사람을 가정하지 않는 글쓰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나는 글쓰기를 하려고 노트를 사모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노트 장사를 해도 되는 사람이다.
우리 인류는 오래전 하나의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친구 얘긴데…라는 말로 시작되는 자기 고백은 정말로 그이의 친구 얘기인 것으로 믿고 듣겠다는 약속. 어째서 그렇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써내는 사람이고 싶었을까 생각해 보면, 첫 번째로는 어린 시절 내가 만난 어른 중에 제일 멋있다고 생각했던 자의 직업이 하필이면 소설가였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인류가 이뤄낸 저 빛나는 합의에 동의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이야기는 죽어도 아닌 척, 거짓말인 것처럼 꺼내고 싶던 말들이 있었는데
요새는 순도 높은 거짓말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직은 아주 가끔이지만.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이 노트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건가를 고민했다. 이것도 저것도 썩 마땅치가 않았다. 주변 사람에게 선물로 나누어주기도 참 어려운 것이 평소 글쓰기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통 노트를 필요로 하지 않고 반대의 인물들은 이미 문방사우에 관한 자기의 확고한 취향이 있기 때문에 내 노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근마켓을 통해 이것들을 한꺼번에 가져갈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노트 장사에 나설 마음을 먹은 사람이 아니고는 절대 그런 멍청이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수십 번씩 만나 한 권 한 권 팔아치운다 해도 끝내 한두 권쯤 재고로 남을 텐데 그러면 그건 또 어떡한다는 말인가.
집 근처를 물색해 보면 뭔가 그럴듯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지도 어플을 켰다. 교회에서 달란트를 내고 하는 아나바다 행사나 뭐 그런 것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지역아동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와, 어린이 시절의 나는 양장 노트에 환장하는 인간이었는데?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전화를 해 봤다.
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보려고 전화를 드렸는데요… 저한테 새것 같은, 아니 새것 같은 게 아니고 진짜 지인짜 새 거인 노트가 한 열두어 권쯤 되는데, 포장도 안 뜯은 진짜로 새건데 제가 앞으로 쓸 것 같지가 않아서요. 혹시 이게 필요할 수도 있으실까요…
담당자님은 약간 망설이다가, 기부 영수증 발급이 어려운데 괜찮겠냐고 하셨다. 나는 그게 좀 기이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지금 내가, 안 쓰는 물건을 떠안기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중일 수도 있는데, 공제를 염두에 두고? 전화를 걸 수도? 있다고?어쩌면 완곡한 거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수증 발급은 필요하지않다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담당자님께서는 그렇다면 익명 기부로 처리할 수 있다며 아무 때나 가져다주시라 하셨다.
이제 나는 노트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노트(들)
아직 직장인인 내가 직장인인 담당자님을 직접 뵙고 물건을 드릴 방도가 없었다. 해서 사전에 협의된 대로 쇼핑백에 노트를 담아 센터 문 앞에 두고 왔다. 어디엔가 쓸 데가 생긴다면 정말로 좋겠다고 빌고 있다. 그게 아니면 나는 그냥 물건을 버리는 죄책감을 이곳의 담당자님께 떠넘긴 것이 되는데 그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은 유형의 인간상이라 마음이 무겁다…
지역아동센터 담당자님께
저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주셔서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현명한 일에 지갑을 여는 어른이 되겠고 절대로 저얼대로 쓰지도 않을 물건을 사들이는 멍청이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