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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31. 2023

잘 가세요, 나의 록스타들

작별 7. 음반(들)

우리 집에는 CD 플레이어가 없다.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싶으면 유튜브 프리미엄의 신세를 지거나 멜론과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한다. 음악 감상용으로 쓰던 스피커 역시 근자에 팔아 버렸다. 내 귀에는 카오디오나 에어팟 정도의 품질도 충분히 충분해서, 남편의 필요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새로운 스피커를 들이는 일에 신중해질 것 같다.


지난 주말 창고 정리를 마무리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라면 박스를 끄집어냈는데, 뚜껑을 열기 직전까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같이 사는 거로도 모자라서 결혼까지 한 마당에 보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남편에게 큰 실례가 되고 가정의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는 그런… 무언가를… 깜빡 잊고 아직 처분하지 않았을까 봐 매우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침실에서 잘 놀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다음, 불온한 물건이 발견되면 곧장 처리해 버릴 심산으로 아예 쓰레기봉투까지 챙겨서 베란다로 갔다.


갑자기 남편이 도와줄까? 묻기에 나는 황급히 아아니! 아니! 괜찮아!라고 답했다.


박스 안에는 일흔 장쯤 되는 음반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무척 행스럽고도 해괴한 일이라 오 헨리의 유명한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렸다. 그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서 상대의 값진 것을 돋보이게 할 선물을 마련한다는 내용이니까, 이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그냥… 어릴 적의 내 기억에 그 소설이 어처구니없음의 대명사, 부부간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남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스피커가 쓸모를 잃은 것이야 비교적 근래의 일이니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CD 플레이어를 처분한 게 한참 전이다. 얼마나 한참 전이냐면 이 집에 이사를 오기도 전이다. 나는 도움이 필요가 없다고 확언했던 것을 급히 철회하고 남편을 불렀다. 그 음반들의 주인은 나였고 그러니 범인도 나였지만 이것을 창고에 처박기 전에 나를 말리지 않은 남편의 탓을 조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오 헨리가 어릴 적 나에게 주었던 가르침에 따라 이번에야 말로 나는 물었고 남편이 대답했다.


우리가 구순쯤 먹었을 때는 이게 나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유교는 역사에 부창부수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남편이 진실로 공범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어 흡족했다. 우리는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음반들을 들추어 보기 시작했다. 어떤 시절에 우리의 영웅이었던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를 이루었다. 그들의 모든 작업물을 인터넷이 보관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내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우리가 박물관을 차릴 게 아닌 이상 음반들은 처분하는 것이 맞다는 데 가까스로 합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음반이 든 라면 박스를 자동차 뒷좌석에 실었다.




나는 리그 오브 레전드와 힙합에 작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둘 모두 내가 좋아하던 것들, 그러니까 스타크래프트 대회와 MMORPG 그리고 밴드 음악을 옛것으로 만들며 등장한 새것들이기 때문이다. 옛것들이 쇠락한 이유가 새것들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매번 좀 얄미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본래는 그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물려받은 취향인 스콜피온스와 주다스 프리스트, AC/DC에 관해서. 신해철이 고스트스테이션에서 틀어준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한 곡씩 녹음해서 나름의 선곡집을 만들던 고릿적 시절과 '소리바다'를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 그럼에도 내 모든 영웅들의 정규 앨범을 사모으길 좋아했던 심리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취향을 무기처럼 휘두르 애로 차근차근 자랐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테레자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내 꼴이 그 꼴이었다고 보면 알맞을 것 같다. 그녀는 책을 통해 남과 자기를 구분 짓는 일에 익숙했고 마음에 든 상대를 꼬시기 위한 일종의 자격 증명서로 자기의 취향을 써먹기도 한다. 그러니 차라리 반성과 학습의 의미에서 부르디외 더 공부해 본다든가 하는 편이 생산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취향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 일기를 다 쓰고 나면 책을 읽으러 갈 것이다.


누군가 '너는 무슨 음악을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그걸 '오 어디 한 번 겨뤄보자는 의미인가'라고 해석하던, 나의 취향은 한 끗 차이로 너와 격을 달리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해야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던… 대단히 처참한 애송이 시절. 오래전 즐겨 부르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불러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때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오는 쓸쓸함과 안도감이 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오 물론. 지금 쓰는 이 일기에도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다. 사실은 완전히 있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애석히 여기는 바가 있다면, 어째서 록스타가 되어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를 않고 록스타의 여자친구가 되어보는 꿈이나 꿨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버릇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덕에 지금은 왕년의 밴드맨과 결혼을 한 신세이고 그것을 후회하는 바는 아니나, 스스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거기서 약간의 성취감이나마 맛보았더라면?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오래 새것으로 머물게 하는 일에 아아주 조오금이나마 기여한 바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왕년의 밴드맨과 결혼을 한 것이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충분히 부끄러운 인간이었다. 이제는 그만 놓아주기로 하자.

잘 가세요, 나의 록스타들.



음반(들)

알라딘 중고서점은 앨범도 매입한다. 하지만 즐겨 듣던 음반들은 즐겨 들었던 탓에 너무 낡아버려서, 거개가 매입 불가 판정을 받았다. 조금 슬펐다. 물건 값으로는 13만 9천 원이 나왔고 남편과 절반씩 나눠 가졌다.



이번 신곡 좋더라고요. 출근길에 들었는데 여러 가지로 착잡했어요. 요절이 낭만인 건 지나간 시절의 유행인 것을 알아주시고 부디 건강하세요. 인생은 무조건 길고 볼 일이에요. 노래방에 가면 꼬박꼬박 선곡하고 스트리밍도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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