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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Sep 04. 2023

실시간으로 망하는 중

작별 9. 폼롤러에 붙이는 글

저번 주말에 창고 정리가 끝이 났기 때문에 이번 주말에는 옷방 정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사연 없이 버려도 될 것들은 한 번에 버리고, 처분하기로 결정은 하였으되 기록으로 남겨둘 것은 따로 모으는 작업을 해 두어야 출근을 하는 평일에도 그것에 관한 일기를 쓰거나 물건을 팔러 다니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활기도 충분했다. 어쩐지 고기가 잔뜩 들어간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어져 가정의 식비 관리를 맡고 있는 남편을 졸라 국밥을 주문했다. 반 시간도 안 돼서 음식이 문 앞에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았다. 식탁 위에 음식을 조르르 펼치고 크게 한 술을 퍼서 입 안에 넣었는데, 갑자기 그걸 씹어서 삼키는 게 힘들었다.


음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물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원했던 것처럼 따끈하고 진하고 적절하게 짭조름했다. 찰기가 도는 밥알이 국물에 살살 풀어져서 저작하기에 편안했고 국에 든 머릿고기는 씹을 때마다 고소한 맛이 났다. 그러니까… 맛이 있어서 힘들었다. 나도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이런 걸 먹으면서 힘들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스스로에게 부아가 치밀 정도로, 토요일 아침 메뉴는 정말 맛이 있었다.


두어 술 정도를 입안에 더 욱여넣고 나자 슬슬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내가 아침부터 국밥을 먹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저 양반이 지금, 그런데 쟤는 배도 별로 안 고픈 것 같았는데 참 복스럽게 잘도 먹네 좋겠다 부럽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남은 것은 조금 뒤에 다시 먹겠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도 입이 짧은 편인 데다, 이러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라 남편은 그냥 그러라고만 했다.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몇 편 읽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까 남편도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을 받아둔 사람처럼 거실을 서성이다가, 지금 느끼는 초조함의 원인이 공복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식탁에 앉았다. 아침에 곁들임 반찬으로 주문했던 튀김 만두를 주워 먹었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침대로 돌아갔다.


눈을 떠보니 일요일 새벽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남편이 남겼을 여러 흔적들이 눈에 띄었고, 잠든 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다니면서도 놀기는 알차게 놀았구나 생각하니까 조금 웃겼다. 배가 고팠다. 토요일 아침에 다 먹지 못하고 남겼던 국밥을 냄비에 옮겨서 라면을 끓였다. 국밥에 라면을 끓이면 정말 맛있다. 그래서 그 라면도 맛있었다. 먹으면서, 이번 생은 진짜로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일요일 밤이 올 때까지 뭘 했냐면, 엄청나게 슬픈 소설을 읽으면서 하루 종일 줄줄 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소설이 그렇게까지 슬프진 않았던 것 같은데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도 울고 조력자가 죽어도 울고 악당이 자기 죄를 후회하는 장면에서도 울고 마침내 모두가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을 적에도 펑펑 울었다. 그러는 사이에 청소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고 글쓰기도 안 했는데 주말 이틀이 다 갔다.




이것을 왜 폼롤러 내다 버린 이야기에 붙이고자 하였냐면, 지난번 일기에는 내가 운동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의 효과를 정말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확고히 믿는 나의 생활조차 그렇게 간편히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나는 오늘도 회사에 지각을 했고 아마도 내일도 그럴 것 같으며 내일이 아니라면 이번주 안에 반드시 한번 더 지각할 것 같다. 심지어 지난 달에는 단 하루도 운동을 하러 가지 않았다. 헬스장에 전화를 걸어 선결제한 이용권을 홀드하는 것마저도 귀찮아서 안 했다. 요즘 나는 정말로 엉망진창이다. 딱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을, 이딴 식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


차라리 우리가 오셀로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임의 규칙이 그렇다면, 내가 백돌의 승리에 명운을 걸었어도 흑돌이 자꾸만 세를 불리는 일에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한 순간, 한 점에만 제대로 된 수를 둘 수 있다면 판세를 뒤집고 꿰차는 일이 가능하니까. 그러니까, 혹시 누군가 이것을 읽는다면, 아무도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충분한 자책이 필요한 나 같은 인간도 아직 뻔뻔하게… 살고 있으니까…



회사의 결정권자님께

오늘도 지각을 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내일은 절대 절대 저얼대 지각하지 않고 정시에 출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출근을 할 때마다 저의 일부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조직에 속한 이들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서 재택근무 제도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그것이 제가 받을 복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동료들에게 꼭 필요한 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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