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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Sep 05. 2023

더 크게 울어

작별 10.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들)

아직도 엄마와 관련된 대목에서 걸려 넘어진다. 지난 주말 뜻 모를 초조함 속에서도, 하기로 다짐했던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먹고 자고 우는 일에만 시간을 소비한 것도 실은 이 글이 쓰기 싫어서 그랬 것 같다. 쓰기 싫으면 쓰지 않으면 될 텐데, 한 번쯤은 이 문제를 짚어 봐야 다음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내내 오락가락도 하고 갈팡질팡도 하고 그랬다.


엄마를 생각하면 하고 싶은 말 없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그러모아 엄마에 관해서 쓰려고 하면 어김없이 우는 내가 떠오른다. 일이 그렇게 된 이유야 매번 달랐겠으나 어쨌든 어린이인 내가 거실에 꿇어앉아 우는 것부터 시작이다. 엄마는 단소나 리코더, 파리채, 효자손, 대충 그것들과 비슷한 몽둥이를 손에 쥐고 눈앞에 흔든다. 그러고는 말한다. 더 크게 울어.


이렇게 되면 애초 울게 된 원인이나 이유는 중요치 않다. 그만 울고 싶어도 매질이 무섭기 때문에 악을 쓰고 운다. 그러면 엄마는 말한다. 더 울어. 나는 더욱 소리 높여 운다. 엄마는 말한다. 더 크게 울어. 목이 쉬어서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엄마는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물기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게 왜 울어, 울기를. 어린이인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다. 울라면서요.


언젠가 엄마는 다 자란 내게 말했다. 동생들은 엄마가 화를 내면 적당히 도망을 치거나 숨는데, 나는 그러지를 않아서 키우는 데 애를 먹었다고. 어지간한 일에는 내색도 않다가 한번 자지러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고. 내가 나 같은 딸을 낳아보면 당신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잘 모르겠다. 내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면 그냥 울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기를 원했다면 그냥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나를 상하게 할 일이 두려웠다면 잠깐만 어디 도망이라도 가서 숨어 있으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어기에 갔다가 백까지만 세고 엄마한테 다시 오라고.


어린이 시절의 내가 당신의 당부를 알아듣지 못하고 기어이 화를 뒤집어쓰고 매를 맞게 되었더라도, 만약 당신이 내게 그렇게 말을 해주었더라면 내가 다 자란 다음에는 그때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와 살 때는 짧게는 분기마다, 길게는 연 단위로 집안에 큰 위기가 왔다. 일이 그렇게 된 이유야 매번 달랐겠으나 어쨌든 엄마가 화를 내는 데서부터 시작이다. 나는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야 인생이 별일 없이도 잘만 흘러가는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요사이 내가 느끼는 탈력의 일부 관습에 의해 학습된 반응인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슬퍼야 할 때가 왔으니 슬픈 것인데 더 이상 인생에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마침맞게 로가 그 죄를 뒤집어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이게 정말 맞다면 앞으로 나는 긴 시간에 걸쳐 스스로를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커다란 소요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사람은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된다는 것도.


엄마는 당신의 감정을 소화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불안,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일들에 관한 후회와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일에서 오는 수치심 같은 것들이 도망칠 곳 없이 엄마의 안에 고였다. 물감들을 다 섞어 놓은 팔레트가 끝내는 난장판이 되듯이, 가득 찬 물컵 안에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진다. 가스 밸브가 열린 방에 스파크가 튄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다.


엄마는 울고 소리를 지르고 세간을 부수고 나와 형제들의 물건을 망가트렸다. 좀 더 어릴 적에는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는데 우리 다 자라고 나서는 그냥 물건만 부쉈다. 쨌든 한바탕 푸닥거리를 끝내고 나면 엄마는 개운해진 얼굴로 잠을 자러 갔. 우리는 다시 애틋하고 화목한 사이가 된다. 때때 엄마의 그런 산뜻함이 섬뜩하지만 금세 잊는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 호시절은 잠깐이므로. 사랑할 시간이 부족해서.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 모든 드라마들이 인공적인 것이었음을 생각한다. 너무 한꺼번에 생각하면 마음이 완전히 상할 수도 있으니까 한 번에 조금씩만, 아주 천천히 돌이킨다. 그래도 조작된 드라마의 출연진이 느라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화가 치미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가엾다. 하지만 다시는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신파라면 딱 질색이다. 나는 냉정해서 웃긴 콩트처럼, 웃겨서 슬퍼지는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내가 사람인 게 창피해서 차라리 웃어버리고 마는 시트콤처럼 살 것이다. 언젠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는 일에 완전히 성공하고 말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고모와 아빠, 남편이 함께인 자리였다. 고기와 밥을 시킬 것이냐 고기만 시키고 나중에 냉면을 시킬 것이냐 상의를 하던 중이었는데, 고모가 할아버지에게 반주를 드시겠냐고 여쭸다. 고모는 술을 즐기지 않을뿐더러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한 분이다. 두 분의 건강챙기는 일도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런 분이 할아버지가 청하지도 않은 술을 나서서 권하는 모양이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고모에게 소주라면 좋겠다고 했다. 고모는 아버지가 정히 원하시니 어쩔 수가 없겠다고, 소주를 딱 한 병만 시켜드려야 되겠다고 하면서 흔쾌히 술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소주잔 여섯 개를 태연히 챙겨가지고 왔다. 고모는 할아버지의 잔을 가득 채워드린 다음 나와 남편과 아빠와 당신 몫의 잔에, 술 드시지 않는 할머니 몫의 잔에도 한 잔씩 따랐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시킨 기분만 내고 실제로는 두 잔밖에 못 셨다. 앞에 놓인 잔을 비우다가 고모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고모가 눈을 찡긋거리면서 웃었다.


언젠가는 나도 고모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짜고 치는 거라는 걸 알면서, 알기 때문에, 그냥 당신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나쁜 악당 역할을 스스럼없이 맡아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맞아, 정말 맞아, 엄마 인생이 망한 건 전부 다 나 때문이야,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가 야만의 시절을 함께 지났음을 참작하고 가해자가 없이는 성사되지 못하는 당신의 평안을 마음 깊이 바라면서.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아. 이걸 써버리길 잘했다. 속이 너무 시원하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들)

물건에는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혁명에는 핏값이 필요하고 나는 이제부터 내게 남은 엄마의 흔적을 숙청하겠다. 없앨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비싼 옷인데 큰맘 먹고 네게 물려주는 거라고 당신이 몇 번이나 말을 했던 모피코트라 하더라도!



고모에게

고모는 진짜 좋은 어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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