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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Sep 09. 2023

명랑한 할머니

작별 12. 단추가 달린 파자마 상의

H를 떠올리면 언제나, 기다란 언덕길을 오르는 명랑한 할머니가 생각난다. H는 나보다 네 살이었나, 여섯 살이었나 아무튼 몇 이나 어린 후배인 데다 나무랄 데 없이 멀끔한 아가씨인데도. 어쩐지 내 눈에는 그녀의 낙관이 이미 세상 맛을 알아버린 사람에게서 보이는 특징처럼 읽혀서 그런 듯하다.


상상 속에서 H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서 절뚝절뚝 간다. 때때로 그늘막이 있는 가겟집 앞에 멈추어 서서 무엇을 파는 인가 유리창 안쪽을 지긋이 들여다볼 때도 있고 누군가 뜻 없이 내놓았을 평상에 멀뚱히 앉아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기도 한다. 어쨌든 H는 언덕을 오른다. 쉬엄쉬엄 가기도 하고 잰걸음을 걷는 적도 있다. 가끔씩 길바닥에 퍼질러진 채 온 곳과 갈 곳을 번갈아 재어 보기도 한다. 땀을 닦고 한숨을 쉬고 허리춤을 단속하고 물도 한 모금 마신다. 그렇지만 오르는 것을 완전히 단념하는 적은 없다.


야아, 너 괜찮아? 먼 데서 내가 소리 질러 묻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명랑하고 경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네에, 선배님! 저는 괜찮아요! 선배님은요? 나는 H가 내게 괜찮다고 말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너는 괜찮구나. 그러면 나도 괜찮아.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 작년 일인데, 결혼식에 참석해 준 동료 하나가 행사 도중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그걸 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확인을 했다. 요약을 하자면 당신은 소싯적에 죄가 많은 여자였는가, 신부석에 사연 있는 여자가 너무 많다, 여자들이 다 울고 있다… 그런 내용이었다.


H는 '나의 결혼식에서 울어준 여자의 목록'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우리 언니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심정이라서 눈물까지 나오게 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H의 결혼식에 참석을 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날은 나도 메이크업 실장님께 달려가 절대 안 지워지는 초강력 워터프루프를 주문해야 할 것이다.


지난달에는 남편이 서류 정리를 하다가 H의 축의 봉투를 발견했다. 남편은 정직하게도 그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본래 다른 봉투처럼 비어 있어야 맞는 건데 그녀의 것에는 현금이 그대로 들어있더라면서. 봉투 뒷면을 보니 H의 글씨체로 짤막한 편지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그날 예식장 정산을 맡아 주신 집안 어른께서 눈먼 돈을 발견하는 기쁨을 예비해 둔 게 아닌가 싶다. 그걸 1년이 지난 다음에나 발견할 줄은 모르셨겠지만.


그렇지만 식을 마친 직후에는 그것들을 살펴보는 게 왠지 해서는 안될 짓 같았고, 그러니까… 원래 친척 집에 놀러 가면 저이가 내게 용돈을 줄 건가 아닐 건가 슬슬 눈치를 보면서도 어르신이 진짜로 지갑을 열면 화들짝 놀라면서 막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잖아. 그런 느낌으로다가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우리를 축하하러 와주었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봉투부터 살피는 건 어쩐지 해서는 안될 짓인 것 같고 그랬다. 그 뒤로는 그냥 그것들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고.


H는 봉투에 썼다. 앞으로 나의 인생에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해, 나의 판단이 맞다는 말을 미리 해두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조금 성질이 나기도 했다. 왜 미리 다 맞다고 해? 그때그때마다 맞다고 말해 줘야지. 내가 헷갈리는 순간이 오면 나하고 같이 있어 줘야지. 그래도 나는 별 수 없이 인정했다. H의 당부는 내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다. 나는 아직도 매일매일 흔들린다.




이상하게 H 앞에서는 말이 많아진다. 속으로는 '제발 그만둬 이 꼰대 새끼야 멈춰 너에게 허락된 말은 그렇구나와 그래서? 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 이제 그만 말해'라고 울부짖으면서도 아무튼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나는 주절거리기 대장이 된다.


그녀에게는 내가 아직 잘 모르는 것까지도 다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잘 모르는 것을 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과 내가 왜 그걸 잘 모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와 그럼에도 왜 이걸 말하고 앉아있는가 등등을 털어놓다 보면 끝도 없이 길어지고 마는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 알려주고 싶었는데, 나도 그걸 해봤고 너의 마음을 다 아니까 그냥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왜 이걸 모르는 멍청이 인간인지 변명을 하고 있다.


그간 이런 식으로 H에게 졌던 빚을 갚으려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하겠는데, 야속하게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 저는 내 이삿날에 와서 짐을 날라주고 청소도 도와주고 했으면서 자기가 이사하는 날에는 절대 절대 나를 부르지 않고 나는 진짜 진짜 그게 너무 섭섭한데 또 억지로 가서 얼쩡거리는 것도 좀 이상하고… 해서 다짐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H와의 관계에서 빚을 갚는 방법은 이제 돈밖에 없다. 나는 지갑이 두툼한 훌륭하고 멋진 선배가 될 것이다. 



단추가 달린 파자마 상의

H는 시인이다. 지금은 취직을 했지만, 한때 외주 일꾼이기도 했다. 의복으로 생활의 경계를 지어두면 좋다고 하면서 나와 남편에게 상하의 한 세트인 잠옷을 선물해 줬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의 바지도 내가 입고 나의 바지도 내가 입고 단추가 달린 파자마 상의 두 벌은 새것과 같은 상태 그대로 옷장에 수납되어 있어서… 상의는 그냥 처분하기로 했다. 우리가 게으른 인간이라서 미안해… 그렇지만 단추가 달린 잠옷은 정말로 못 입겠어…



H에게

그래도 맨날맨날 내가 맞다고 말해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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