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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Sep 22. 2023

무지막지한 노동자

작별 13. 똥꼬치마가 되어버린 원피스

지난주에 출장을 다녀왔다. 퇴사를 앞둔 내게는 거의 마지막 이벤트이자 미션이나 다름없었는데 퍽 오랜만의 현장 일이라 무척 즐거웠다. 이곳 일에 진력이 났던 게 그저 페이퍼 워크가 싫어서였나, 실은 내가 현장 체질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마지막이니까 신이 났던 쪽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신명 나게 까대기를 하고, 보통은 물품을 운반하는 일을 이렇게 칭하는 듯한데 이곳에서는 박스에 포장된 물품을 지정된 장소까지 운반해서 안에 든 것을 꺼내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하고 부산물을 정리하는 일까지를 일컫는다, 숙소에 돌아오니 허벅지 군데군데에 퍼런 멍이 들어 있어 웃었다. 일이 한창 바쁜 시기엔  멍을 달고 살았다. 마음이 급하니 행사장의 온갖 집기 들이박고 다녀서 그렇다.


어느 날은 사무실 입구에서 마주친 타 부서 언니와 김에 해바라기를 하다가 문득 말했다. 언니, 저 자꾸 허벅지에 멍이 들어요. 늙었나 봐. 그러니까 언니는 웬 애송이 번데기가 자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는 표정을 한참 짓고 있다가 내게 말했다. 어디서 그랬는지도 기억 안 나죠? 내가 그렇다고 하자, 언니는 예사로운 어조로 답했다. 저도 그래요. 사려 가며 일하세요.


별 내용도 없는 대화였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기분이 좋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동기들의 손을 보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상을 가졌던 것 같다. 내가 입학한 학과에는 중지에 굳은살을 달고 있는 애들이 잔뜩 있었다. 필시 오랫동안 필기구를 잡아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싶은, 혹처럼 두꺼운 굳은살.


이제 나는 일하는 몸에 관한 이런 태도가 낭만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몸에 남은 일의 흔적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여전히 큰 감흥을 준다. 자꾸만 그런 이들을 더 신뢰하게 되는 듯도 하다.


이번주에는 휴가를 얻었다. 이 휴가로 말할 것 같으면 후임자 채용이 완료된 후에 회사로 돌아와 인수인계를 해주는 조건으로 얻은 귀중한 닷새다. 감당 못할 빚을 지는 기분이었지만 당장 휴식이 급했기 때문에 그러마고 했다. 그렇게 얻은 닷새 중 사흘을, 그러니까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를 내리 잠으로 보냈다. 밤에는 밤이니까 잠을 자고 아침에 잠깐 일어나 남편을 배웅하고 아침잠을 자기 시작해서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자고 귀가한 남편을 맞이해서 같이 저녁을 먹고 그러면 밤이니까 또 잤다…


퇴사를 하고 나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잠을 자겠다고 답했다. 아침 햇빛에 놀라 깨지 않는 잠. 깨어나도 원한다면 다시 잠들 수 있는 잠. 휴대전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키고 뒤늦은 정신을 보채지 않아도 되는 잠.


그런 잠을 원 없이 자고 나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어서 오늘은 하루 종일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욕실 바닥에 락스물을 뿌려 손잡이가 달린 짧은 솔로 벅벅 문질러 닦고 혹여 고양이가 핥아먹지 않도록 유리 청소용 헤라로 남은 물기를 싹 긁어 없앴다. 어쩐지 퇴사 후에 하리라 결심했던 일을 자꾸만 앞당겨 다 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성질이 급한 게 이런 데서도 태가 나는 건지.

 



본래의 나는 타고난 에너지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지나치게 밝거나 시끄럽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장소에서는 두어 시간만 머물러도 정신이 창백해진다고 해야 할까, 너덜너덜해진다고 해야 할까 여하간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고 금세 피로해진다.


몸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선을 택하는 것보다 최악을 회피하기 위한 선택에 더 능한 편인데, 이를테면 한 여름에 겨울 나라로 여행을 가거나 한 겨울에 여름 나라로 여행을 가는 식이다. 이렇게 살면 어느 때고 한국의 가을 같은 날씨를 즐길 수가 있어 좋지만 강렬한 감각이라든가 인생을 건 체험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밋밋한 인간으로 그치는 게 아닐까 싶어 한편 걱정스럽기도 하다.


오늘 버리는 원피스를 내게 선물한 M은 그런 점에서 나와는 영 딴판에 속한다. 그녀는 내 주변의 '도무지 멀대 같지 않은 여자들' 중 하나다. 가진 에너지의 총량으로 따지자면 나하고는 돋보기로 모은 햇볕과 핵융합 발전소만큼의 차이가 날 것이다. 요컨대 그녀는 여름에 여름 나라로 여행을 가고 겨울에 겨울 나라로 여행을 가며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꿍꿍이를 위해 연차를 쓰는 종류의 인간이다.


대학 졸업반 시절에 친분을 쌓기 시작해서 십 년이 는 시간을 왕래하며 지낸 사이지만 M에 관해서는 아직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더 많다. 이건 정말 애정이나 우정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달이 오기 직전부터 시작한 M의 집들이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 집들이를 실컷 해서 이제는 지겹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초대할 친구며 지인이며가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끝낼 수 있을까, 하면 그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월에는 나와 여행을 떠날 예정이기까지 하니까.


M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퇴근하는 직장인인데 이번 여행을 가기 위해 주말마다 농장엘 나가 상추 모종을 팔았고 농장의 상추 시즌이 종료되자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구해 평일 저녁마다 서빙을 하고 있다. 상추를 팔아 번 돈으로는 현재까지 두 달째 집들이를 진행 중인 그 집의 인테리어 값을 댔다고 하지만, 그녀가 새 집의 인테리어나 친구와의 여행 중 하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대도 딱히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방 인생의 다른 즐거움을 찾아 돈을 벌러 나갔을 테니까.


며칠 전에는 자기를 채용하기로 약속해 놓고는 반 년째 연락이 없던 학원에 전화를 걸어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대차게 항의하여 강의를 하나 따냈다고 했다… 직장 하나만 갖고도 번아웃 비슷한 게 왔느니 어쩌느니 하며 크게 앓는 중인 나로서는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M에게 물었다. 네가 헤르미온느가 아닌데 그러면 그건 또 어느 시간을 짜내서 일하러 갈 계획이냐고. 그녀는 이쪽과 저쪽의 급여를 계산해 보고 본업이나 식당 서빙 일 중에서 하나를 그만둘 거라고 했다.


노동과 돈을 대하는 M의 태도 밑바닥에는 필요한 만큼 벌겠다는, 아주 단순하고 산뜻한 원칙이 있다. 그녀는 필요한 만큼 벌기 위해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동이므로 투잡을 하고 쓰리잡을 하면서 애면글면 살아간다는 식의 자기 연민도 그다지 없다. 오히려 매 순간 자기가 이처럼 힘세고 강한 노동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웃음을 터트리는 이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낸 십 년 내내 이런 식으로 살았다.


나는 무지막지한 노동자인 M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존경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을 때마다 M을 떠올린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인데 모든 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처럼 행동하는 적도 있고 아닌 적도 있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M의 인생은 M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나는 그녀를 따라 하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고 싶지는 않다. 실제 기럭지도 황새랑 뱁새만큼 차이가 나기도 하고.




그렇지만, M이 자기의 인생에 걸고 있는 원망을 가늠하면 뱁새인 나의 가슴까지 속절없이 다. 그래서 나와 그녀를 자꾸만 대어 보게 되는 이다. 어쩌면 나도 발돋움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부유하면서 검소하기를 원하고 악착스러우면서 여유롭기를 원한다. 대범하면서 섬세하기를, 하면서 가차 없기를 원하고 열정을 유지하는 동시에 냉정을 잃지 않기를 원한다.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지만 저와의 다툼에서 영원히 낙오하는 이 없기를 바란다. 다소의 눈가림 없이는 용기를 얻기 어렵고 먼 앞을 내다보는 눈은 비겁을 동반하게 마련임에도 용감한 동시에 현명하기를 원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생을 걸어 하나 얻고도 만족할 한 모든 모순되는 자질을 제 안에 품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욕심이지만, 나는 이게 호걸의 기상이라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봉합하는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이 친구는 세상이 깜짝 놀랄 큰 인물이, 기어코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소인배인 나 하나 정도는 기어들어갈 그늘 한 자락이 넉넉할지 모르고.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나는 매일 몰래 기대한다.



똥꼬치마가 되어버린 원피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생일 선물이었다. 언제 적 생일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받은 뒤로 한창 잘 입다가 입을 때마다 이상하게 자꾸만 옷이 작아진다 싶었고 급기야 똥꼬치마가 되어 입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온수로 세탁을 하면 안 됐거나 건조기에 넣고 돌리면 안 됐거나 그랬던 거겠지. 미안합니다. 그래도 캄보디아에서 온 상의와 모로코에서 온 잠옷은 아직 무사합니다.



M에게

요새 너를 열받게 하는 그 가시나 진짜 딱 한 번만 꽉 쥐어서 터트려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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