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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Oct 19. 2023

많이 버린 줄 알았는데

작별하는 글

엄청 이것 저것 내다버린 줄 알았는데 묶어 놓고 보니 한 줌이다. 아직도 가진 게 더 많다.


작가 등록을 마치고도 한동안은 이곳에 글을 발행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때때로 접속해서 눈에 띄는 이야기들을 읽기만 했다. 그게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내가 쓰는 얘기도 누군가는 흥미를 가지고 읽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고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제공하는 기능들의 힘도 컸던 것 같다. 이곳은 벼락치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치워놓은 책상 같다. 글을 읽고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끔 안배되어 있는 단출한 꾸밈새가 좋다.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려가 담긴 서비스라는 생각이 든다.



배운 점

1.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장면이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때가 있었다. 잊혔던 것을 쓰려던 것과 나란히 놓아두면 그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열렸다. 그게 정말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말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말과 말 사이를 말하려고 말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2. 어떤 지나간 일들은 그냥 지나간 것으로 두는 게 좋다는 걸 배웠다. 정말로 큰 인내심을 발휘해서 끝내 쓰지 않기로 결정한 기억들이 있는데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기억에는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잘된 복수일 때가 있다.


3. 지금의 생활이 나와 남편의 힘으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일 톤짜리 트럭에 넣어도 차곡차곡 잘 쌓아 수납해야 할 만큼 많은 분들의 조력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감사한 일이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는 행위도 믿음이 필요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이것이 그이에게 꼭 어울리는 물건이라는 확신이든지, 내 선택이 그이의 필요나 원망에 살짝 어긋나더라도 그 마음을 보고 기뻐해줄 거라는 신뢰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믿지 않고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서.



좋았던 점

1.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면 것을 사용하다가 끝내 버리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게 됐다. 한 바닥이 넘는 일기를 쓸 수 있겠는지. 그럴 만한 사연이 모이겠는지. 그러면 백지 앞에 겸손해지듯 정신이 차려져서 자질구레에 돈을 쓰는 일이 줄었다.


2. 버리는 물건은 무조건 글을 쓰고 난 다음 가능한 한 돈을 받고 팔았다. 글쓰기는 돈이 된다고 내 뇌를 속여보고 싶었다. 정확히 측량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나는 매일 일기를 쓰는 인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방법이 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다.


옷의 경우에는 도저히 사람을 만나 어쩌구저쩌구할 상태가 아니어서 모두 수거함에 넣어버린 것이지만, 회사 퇴직금 LG 싸이킹 파워 진공청소기 C40SGY 2만 원 오아 리아가습기 OA-HM046 4천 원 BUCK703 & OZ Eagle hollow fiber SL150001 각 1만원 씩 2만 원 Canston F&D A320 1만 5천 원 음반(들) 13만 9천 원 스타폼롤러(90cm) 1만 원 도합 20만 8천원과 퇴직금을 벌었다. 음. 훌륭하구만.


3. 일기를 다 쓰면 귀가 후에 고치고 다음 날 아침 발행했는데, 밤마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으니 빨리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없던 일이라 조금 놀랐다.



아쉬운 점

1. 장기 지속할 수 있는 형태의 글쓰기는 아니었다. 매일 쓸 수 있는 아이템을 개발할 수 있다면 좋겠다.


2. 본래는 책장에 읽지도 않고 방치되는 책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인데 쓰기가 수월하고 읽기에 유용한 서평의 형식이 무엇일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서 결국 물건을 버리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3. 애초에 죽을 날을 받아둔 사람이 신변 정리를 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글쓰기였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만, 이것은 쓰기 좋은 글이지 읽기 좋은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딴 것을 계속해서 쓰다가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쓰기는 영영 먼 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음 번에는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만큼 충분히 즐겁고 유익할 수 있는 것을 써보고 싶다.



회사에 속한 모든 분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승하십시오! 미래의 나에게 버릴까 말까 싶을 때는 그냥 좀 버려. 살까 말까 싶을 때는 세 밤만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 남편에게 아 남편만 안 버리면 되잖아. L에게 너의 우정에 거짓말로 보답해서 미안해. 그래도 남편이 네가 준 가습기가 더 좋대. 그때의 나에게 어깨 좀 잘 펴고 다니고 불안해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살아. 그리고 네가 지금 만나는 그 남자 구려. 당장 헤어져. 남편에게 그래도 누가 찐으로 나한테 10억을 대가로 걸고 '그 질문'을 하면 10억을 안 받겠다고 할게. 진짜 진짜로. 넬께 이번 신곡 좋더라고요. 출근길에 들었는데 여러 가지로 착잡했어요. 요절이 낭만인 건 지나간 시절의 유행인 것을 알아주시고 부디 건강하세요. 인생은 무조건 길고 볼 일이에요. 노래방에 가면 꼬박꼬박 선곡하고 스트리밍도 열심히 할게요. 지역아동센터담당자님께 저의 잘못을 대신 책임져주셔서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현명한 일에 지갑을 여는 어른이 되겠고 절대로 저얼대로 쓰지도 않을 물건을 사들이는 멍청이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빠에게 아빠가 탁구를 천천히 시작했으면 좋겠어. 회사의 결정권자님께 오늘도 지각을 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내일은 절대 절대 저얼대 지각하지 않고 정시에 출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출근을 할 때마다 저의 일부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조직에 속한 이들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서 재택근무 제도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그것이 제가 받을 복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동료들에게 꼭 필요한 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모에게 고모는 진짜 좋은 어른이에요. 회사의 결정권자님께 오늘은 지각을 하지 않아 당당히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한 가지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사직서까지 제출해 놓고 질척거려서 송구합니다만 혹시 사무실을 경기도로 이전할 계획은 없으실까요. 가능하면 북부 말고 남부로요. H에게 그래도 맨날맨날 내가 맞다고 말해주면 안 돼? M에게 요새 너를 열받게 하는 그 가시나 진짜 딱 한 번만 꽉 쥐어서 터트려주라. 


그리고 이 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재미에 계속 썼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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