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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만사가 수상할 땐 화투점

2019년 8월의 글

이천십오년은 힘든 해였다.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과 관계가 틀어졌고 진짜 가족하고의 사이도 별로 좋지를 못했다. 이래저래 치이고 지치니까 일이 하기 싫어져서 직장을 때려 쳤더니 금세 지갑이 얄팍해졌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아무도 말해 주지를 않고. 줄어드는 잔고가 무서워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질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있고 싶어서였다. 나도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나를 모르고.


처음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열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소설가가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우연히 어떤 소설가의 강연을 듣다가, 그만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인간인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말 몇 마디로 어린애를 현혹시키다니. 정말 멋진 사람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어쨌거나 소설가로서는 출중한 능력을 갖춘 분이다.


십오년이 지나서 이천십오년이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스물일곱 살이었다. 저쪽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고 오직 이쪽에서만 저쪽을 볼 수 있는 유리벽을 사이에 둔 채로, 열두 살짜리 꼬마와 내가 줄곧 함께 살아왔는데. 정말이지 그 애를 마주 볼 면목이 없었다. 


엄마 역시 갑작스레 호주행을 자처한 딸의 얼굴을 가급적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내 결정에 대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대신에 집안의 공기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하고 한 곳에 있으면 피부가 따끔따끔 했다. 괜히 그녀의 성질을 건드려서 집안 분위기를 초토화시키느니 출국 전까지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래서 아는 언니의 원룸으로 도망을 갔다. 


다 식어버린 맥주를 앞에 두고 생각나는 말은 무엇이든 뱉었다. 언니는 길고 지루하고 장황한 하소연을 끝까지 들어줬다. 그리고는 화투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니까 네가 화투를 몰라서 인생이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거라고 아니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듣기에 되게 아니꼬운 말을 하더니 언니는, 자기가 화투점을 봐주겠다고 했다. 


언니는 화투를 착착 섞어서 가지런히 모아놓고는 우리 예지가 언제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천지신명님께 막 빌었다. 난 언니에게 그런 거 진짜 싫다고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사실 진심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패를 늘어놓고 그림끼리 짝을 맞추기를 몇 번씩 했다. 얼마 안 있어 송학 네 장이 외따로 떨어졌다. 송학은 일월이고 일월이면 역시 신춘문예 아니겠느냐고 그녀가 말했다. 그게 유월인가, 칠월 무렵의 얘기니까 출국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있을 때였다. 씨알도 안 먹히는 위로였다는 소리다. 


그랬는데, 호주에까지 가서 화투를 떠올린 건 그러니까, 카지노에 갔다가… 갖고 있던 비상금을 모조리 털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함께 간 일행들 앞에서는 포커가 코리안 트래디셔널이 아니어서 지고 말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물론 뱃속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딸기 농장에서 딸기를 포장하는 사람이었고 매일매일 싸이의 나팔바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딸기를 포장하고 머릿속으로는 역시 주키니를 갔어야 했나, 라고 생각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해의 작황은 그저 그랬다. 온다는 시즌은 여름 절반이 가도록 오지를 않고. 


한국어로 된 책을 딱 한 권 가져갔는데 그 책의 서두에 사드의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죽음과 친숙해지려면 죽음과 방탕을 결합시키는 일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라고. 나는 그걸 읽었다. 그러나 옛 시대의 문학맨이란 현시대의 가련한 인생을 얼마든지 망쳐놓을 수 있는 법이라는 걸 몰랐다. 사실 포커를 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직도 잘 설명이 되질 않는데, 하여간 나는 남반구에서도 돈이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투고를 했다. 첫 투고였다. 진짜 뻥 같은데 당선이 됐다. 사람들이 나보고 소설가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혹시 마트의 청과물 코너에 갔다가 포장된 딸기를 보면 짧게나마 묵념을 해주시라는 것과 세상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만사가 이상하고 수상할 때는 화투점을 쳐보시라는 것. 어느 날엔가 불현듯 점괘가 떠오르면 그게 세상이 당신에게 보내는 미소일지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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